“낯익은 것을 낯설게”…인류학자가 말하는 인류학의 ‘쓸모’

입력 2022.08.2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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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책]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즐겨 말했습니다. 그는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애플의 DNA에 기술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빠른 처리 속도나 넉넉한 저장 용량을 자랑하는 하드웨어만으로는 소비자 사랑을 받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예전에도 밝혔던 내용이지만, 이건 또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애플의 DNA에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각인돼 있습니다. 기술과 인문학이 결합해야만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뭔가를 내놓을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발표회가 끝나기 직전 고마운 마음을 전하겠다면서 엔지니어링팀, 운영팀, 마케팅팀, 재무팀 사람들을 호명했습니다. 새로운 전자제품의 출시에 맞춰, '이과'와 '문과'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셈입니다. 그는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아이패드2를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즉 과학과 기술, 공학, 수학의 시대가 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문학은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겁니다.

책 '알고 있다는 착각'(원제: Anthro-Vision: A New Way to See in Business and Life )을 쓴 질리언 테트도 과학이나 공학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얘기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미국지사 편집국장인 질리언 테트는 원래 인류학자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옛 소련 연방이 해체되기 직전인 198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에 들어갔던 그는 이듬해인 1990년 타지키스탄으로 날아가 결혼 풍습을 비롯한 현지인들의 문화에 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인류학 연구를 하던 그는 수년 뒤 프리랜서 해외특파원을 거쳐, 파이낸셜 타임스 본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인류학 전공자답게 문화나 정치에 관심이 있었지만, '뜻밖에도' 경제팀에 배치됩니다.

질리언 테트에게 있어 경제와 금융은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배우는 금융' 등의 책을 읽으면서 적응해 나가려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경제부 기자'가 된 질리언 테트는 2천 년대 중반이 되자, 파생금융상품의 불안정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에게 금융시장은 너무나 불투명해 보였습니다. 금융 전문가들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파생금융상품이 실제 시장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인류학을 공부했던 그의 눈에는, 팀별로 성과금을 받는 금융인들의 경우 그저 자기 팀의 성과만 생각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전체 금융시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눈앞의 성과만 쫓는 사람들로 비쳤던 겁니다.

투자은행을 비롯한 경제와 경영 쪽 대다수 전문가가 아무 걱정할 것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질리언 테트 기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따져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2005년 중앙은행이 계속 금리를 올리는데도 시장에서는 차입 비용이 떨어지고, 시장의 유동성이 커졌는데도 부채담보부증권(CDO)은 거의 거래되지 않는 등, 특이한 신호들에 주목합니다. 기자이자 인류학자의 눈으로 시장의 위험 신호를 읽어낸 그는 위험이 쌓이고 있다는 기사를 수차례 작성합니다.

그가 시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사를 내보내자, 많은 사람이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2007년 초 질리언 테트는 가짜뉴스를 쏟아내고 있다는 비판까지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같은 해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터지고, 2008년 전 세계적 금융위기가 도래했습니다.

인류학자의 시각으로 파생금융상품 시장의 불투명성과 위험성을 간파했던 질리언 테트는 세상이 너무나 복잡해져서 컴퓨터와 같은 기존 도구만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분석 도구가 많다고 해서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닌데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는 그렇기 때문에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들고',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는' 인류학의 원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데이터과학이나 법학, 의학 등에 인류학의 개념을 더하면 더 깊이 있고 풍부한 분석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쓴 책 '알고 있다는 착각'에는 인류학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구체적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코카콜라는 중국에서 차를 병에 담아 팔려고 했지만, 중국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왜 중국에서는 팔리지 않는 것일까.' 코카콜라는 인류학자들에게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미국 남부 애틀랜타에 본사가 있는 코카콜라의 기업 문화에서 차는 바비큐와 어울리는 상쾌하고 달콤한 음료를 의미하지만, 중국에서 차는 소음이나 스트레스와 같은 자극적인 요소를 제거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다시 말해 중국과 미국의 차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중국인들이 여기고 있는 녹차의 의미가 미국인이 생각하는 녹차와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죠.

코카콜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저널리스트이자 인류학자인 질리언 테트는 '인류학의 개념이 아마존의 밀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로 불리는 아마존의 창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인류학은 세상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이면에 감춰진 무언가를 포착하고 다른 사람들을 공감하고 문제를 새롭게 통찰하는 학문이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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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익은 것을 낯설게”…인류학자가 말하는 인류학의 ‘쓸모’
    • 입력 2022-08-27 09:01:07
    취재K

※ [주말& 책]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즐겨 말했습니다. 그는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애플의 DNA에 기술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빠른 처리 속도나 넉넉한 저장 용량을 자랑하는 하드웨어만으로는 소비자 사랑을 받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예전에도 밝혔던 내용이지만, 이건 또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애플의 DNA에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각인돼 있습니다. 기술과 인문학이 결합해야만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뭔가를 내놓을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발표회가 끝나기 직전 고마운 마음을 전하겠다면서 엔지니어링팀, 운영팀, 마케팅팀, 재무팀 사람들을 호명했습니다. 새로운 전자제품의 출시에 맞춰, '이과'와 '문과'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셈입니다. 그는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아이패드2를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즉 과학과 기술, 공학, 수학의 시대가 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문학은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겁니다.

책 '알고 있다는 착각'(원제: Anthro-Vision: A New Way to See in Business and Life )을 쓴 질리언 테트도 과학이나 공학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얘기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미국지사 편집국장인 질리언 테트는 원래 인류학자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옛 소련 연방이 해체되기 직전인 198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에 들어갔던 그는 이듬해인 1990년 타지키스탄으로 날아가 결혼 풍습을 비롯한 현지인들의 문화에 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인류학 연구를 하던 그는 수년 뒤 프리랜서 해외특파원을 거쳐, 파이낸셜 타임스 본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인류학 전공자답게 문화나 정치에 관심이 있었지만, '뜻밖에도' 경제팀에 배치됩니다.

질리언 테트에게 있어 경제와 금융은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배우는 금융' 등의 책을 읽으면서 적응해 나가려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경제부 기자'가 된 질리언 테트는 2천 년대 중반이 되자, 파생금융상품의 불안정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에게 금융시장은 너무나 불투명해 보였습니다. 금융 전문가들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파생금융상품이 실제 시장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인류학을 공부했던 그의 눈에는, 팀별로 성과금을 받는 금융인들의 경우 그저 자기 팀의 성과만 생각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전체 금융시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눈앞의 성과만 쫓는 사람들로 비쳤던 겁니다.

투자은행을 비롯한 경제와 경영 쪽 대다수 전문가가 아무 걱정할 것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질리언 테트 기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따져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2005년 중앙은행이 계속 금리를 올리는데도 시장에서는 차입 비용이 떨어지고, 시장의 유동성이 커졌는데도 부채담보부증권(CDO)은 거의 거래되지 않는 등, 특이한 신호들에 주목합니다. 기자이자 인류학자의 눈으로 시장의 위험 신호를 읽어낸 그는 위험이 쌓이고 있다는 기사를 수차례 작성합니다.

그가 시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사를 내보내자, 많은 사람이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2007년 초 질리언 테트는 가짜뉴스를 쏟아내고 있다는 비판까지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같은 해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터지고, 2008년 전 세계적 금융위기가 도래했습니다.

인류학자의 시각으로 파생금융상품 시장의 불투명성과 위험성을 간파했던 질리언 테트는 세상이 너무나 복잡해져서 컴퓨터와 같은 기존 도구만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분석 도구가 많다고 해서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닌데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는 그렇기 때문에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들고',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는' 인류학의 원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데이터과학이나 법학, 의학 등에 인류학의 개념을 더하면 더 깊이 있고 풍부한 분석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쓴 책 '알고 있다는 착각'에는 인류학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구체적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코카콜라는 중국에서 차를 병에 담아 팔려고 했지만, 중국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왜 중국에서는 팔리지 않는 것일까.' 코카콜라는 인류학자들에게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미국 남부 애틀랜타에 본사가 있는 코카콜라의 기업 문화에서 차는 바비큐와 어울리는 상쾌하고 달콤한 음료를 의미하지만, 중국에서 차는 소음이나 스트레스와 같은 자극적인 요소를 제거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다시 말해 중국과 미국의 차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중국인들이 여기고 있는 녹차의 의미가 미국인이 생각하는 녹차와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죠.

코카콜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저널리스트이자 인류학자인 질리언 테트는 '인류학의 개념이 아마존의 밀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로 불리는 아마존의 창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인류학은 세상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이면에 감춰진 무언가를 포착하고 다른 사람들을 공감하고 문제를 새롭게 통찰하는 학문이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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