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정보라 작가의 외로운 소송…“연세대서 퇴직금 한푼 못 받아”

입력 2022.08.31 (15:27) 수정 2022.08.3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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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저주 토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31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 발언을 하고 있다.소설 ‘저주 토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31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 발언을 하고 있다.

소설 '저주 토끼'의 정보라(46) 작가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출석했다. 모교이자 11년간 교편을 잡은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낸 민사 소송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오늘(31일) 열린 첫 변론을 앞두고는 동료 연구자 등과 함께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 작가는 "저는 연세대로부터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며, "이것이 대한민국 시간 강사 비정규직의 현실"이라고 외쳤다.

정 작가는 2010년 3월부터 연세대에서 러시아어와 문화 등을 가르쳤다. 11년 가운데 총 6년을 '우수 강사'로 살았다. 강의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은 단 50분, 하지만 그 앞뒤로 치열하게 노력한 대가였다. 매주 인터넷과 신문을 뒤져 러시아의 시사 문제를 정리하고, 문법 설명 등을 넣어 PPT를 만들고, 수업 교재를 연구했다. 중간·기말고사 출제, 감독, 채점, 성적 입력도 정 작가의 몫이었다. 때로는 교수들의 지시로 학과 역사책을 쓰거나, 연구재단에 지원금을 신청하는 것 같은 행정 작업도 했다. 1년간 강좌 3개를 맡아 가르쳤을 경우, 실제 노동 시간은 1,200시간에 이른다는 게 정 작가의 계산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정 작가가 강의를 그만두자 학교는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 결국, 올해 4월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받지 못한 주휴·연차수당 등 5천만 원을 달라는 소송을 냈다. 배(퇴직금)보다 배꼽(소송 비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자신이 쓰고 버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게 정 작가의 포부다. "소송하지 않으면 대학은 한 푼도 주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철폐와 평등한 대학 사회 건설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정 작가는 이 말을 남기고 법정으로 향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안으로 들어서는 정보라 작가.서울서부지방법원 안으로 들어서는 정보라 작가.

연세대는 정 작가의 기자회견에 대해 별도의 입장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재판이 막 시작된 만큼 앞으로 상황을 보며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법정에서는 소정 근로시간보다 연차·주휴수당 청구가 과도하다고 맞받았다. 정 작가가 1주일에 15시간 미만으로 근무한 '초단시간 근로자'이므로 퇴직금을 역시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강 의 시간 외에는 구체적인 지휘·감독이 없었고, 정 작가가 자유롭게 소설 저작 활동을 한 점 등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동료 연구자들은 "대한민국에 일주일에 열다섯 시간 이상 강의하는 강사가 어디에 있느냐. 99.9%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회견에 나선 한국 비정규교수노동조합 박중렬 위원장은 "(학교 측 논리에 따르면) 10년을 강의하든 20년을 강의하든, 퇴직금 한 푼 없이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며 "1년에 천만 원, 팔백만 원 강의료를 받아도 학생 가르치는 게 좋고 연구하는 게 좋아서 묵묵히 버틴 대학 강사의 공에 감사하다고 하지 못할망정 쪽박을 깨고 있는 게 대한민국 정부"라고 비판했다.

최근 사법부에선 주당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시간강사에게도 퇴직금과 수당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2021년 12월 서울북부지방법원이 시간강사의 주휴수당과 연차수당을 인정했고, 지난달 광주지법은 주당 강의 시간이 3시간에 불과하고 6개월마다 새롭게 계약을 맺은 시간강사도 퇴직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봤다. 서울중앙지법도 지난 2월 대학 강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강의하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필연적인 행정 업무 역시 해야 하며, 대학도 당연히 이런 사정을 알거나 예상할 수 있는 만큼 강의 시간 외에도 일정 시간을 소정 근로시간에 포함하기로 하는 묵시적 합의가 있다고 재판부는 봤다. 정 작가는 과연 못 받은 5천만 원을 받을 수 있을까. 다음 재판은 10월 26일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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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주토끼’ 정보라 작가의 외로운 소송…“연세대서 퇴직금 한푼 못 받아”
    • 입력 2022-08-31 15:27:02
    • 수정2022-08-31 15:45:15
    취재K
소설 ‘저주 토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31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 발언을 하고 있다.
소설 '저주 토끼'의 정보라(46) 작가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출석했다. 모교이자 11년간 교편을 잡은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낸 민사 소송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오늘(31일) 열린 첫 변론을 앞두고는 동료 연구자 등과 함께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 작가는 "저는 연세대로부터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며, "이것이 대한민국 시간 강사 비정규직의 현실"이라고 외쳤다.

정 작가는 2010년 3월부터 연세대에서 러시아어와 문화 등을 가르쳤다. 11년 가운데 총 6년을 '우수 강사'로 살았다. 강의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은 단 50분, 하지만 그 앞뒤로 치열하게 노력한 대가였다. 매주 인터넷과 신문을 뒤져 러시아의 시사 문제를 정리하고, 문법 설명 등을 넣어 PPT를 만들고, 수업 교재를 연구했다. 중간·기말고사 출제, 감독, 채점, 성적 입력도 정 작가의 몫이었다. 때로는 교수들의 지시로 학과 역사책을 쓰거나, 연구재단에 지원금을 신청하는 것 같은 행정 작업도 했다. 1년간 강좌 3개를 맡아 가르쳤을 경우, 실제 노동 시간은 1,200시간에 이른다는 게 정 작가의 계산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정 작가가 강의를 그만두자 학교는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 결국, 올해 4월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받지 못한 주휴·연차수당 등 5천만 원을 달라는 소송을 냈다. 배(퇴직금)보다 배꼽(소송 비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자신이 쓰고 버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게 정 작가의 포부다. "소송하지 않으면 대학은 한 푼도 주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철폐와 평등한 대학 사회 건설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정 작가는 이 말을 남기고 법정으로 향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안으로 들어서는 정보라 작가.
연세대는 정 작가의 기자회견에 대해 별도의 입장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재판이 막 시작된 만큼 앞으로 상황을 보며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법정에서는 소정 근로시간보다 연차·주휴수당 청구가 과도하다고 맞받았다. 정 작가가 1주일에 15시간 미만으로 근무한 '초단시간 근로자'이므로 퇴직금을 역시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강 의 시간 외에는 구체적인 지휘·감독이 없었고, 정 작가가 자유롭게 소설 저작 활동을 한 점 등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동료 연구자들은 "대한민국에 일주일에 열다섯 시간 이상 강의하는 강사가 어디에 있느냐. 99.9%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회견에 나선 한국 비정규교수노동조합 박중렬 위원장은 "(학교 측 논리에 따르면) 10년을 강의하든 20년을 강의하든, 퇴직금 한 푼 없이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며 "1년에 천만 원, 팔백만 원 강의료를 받아도 학생 가르치는 게 좋고 연구하는 게 좋아서 묵묵히 버틴 대학 강사의 공에 감사하다고 하지 못할망정 쪽박을 깨고 있는 게 대한민국 정부"라고 비판했다.

최근 사법부에선 주당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시간강사에게도 퇴직금과 수당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2021년 12월 서울북부지방법원이 시간강사의 주휴수당과 연차수당을 인정했고, 지난달 광주지법은 주당 강의 시간이 3시간에 불과하고 6개월마다 새롭게 계약을 맺은 시간강사도 퇴직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봤다. 서울중앙지법도 지난 2월 대학 강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강의하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필연적인 행정 업무 역시 해야 하며, 대학도 당연히 이런 사정을 알거나 예상할 수 있는 만큼 강의 시간 외에도 일정 시간을 소정 근로시간에 포함하기로 하는 묵시적 합의가 있다고 재판부는 봤다. 정 작가는 과연 못 받은 5천만 원을 받을 수 있을까. 다음 재판은 10월 26일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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