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112년 만의 특별한 추모제…대구에서 잊힌 광주·전남 애국지사

입력 2022.09.2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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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9월 14일 옛 대구 감옥 터에서 광주·전남 애국지사 추모제 열려"
- "일제강점기 대구 감옥에서 광주·전남 애국지사 45명 순국"
- "45명 가운데 43명이 한말 의병장..2명은 3.1운동 관련"
- "항소심 법원이 광주에 없어서 대구에서 재판 받고 순국"
- "광주광복회 회원들, 112년 만에 대구서 추모제 열어"
- "대구 감옥 터에 사적 표지만 남아..애국지사 추모비 세워야"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정길훈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PC9qryWlIbA


◇ 정길훈 앵커 (이하 정길훈):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이죠.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정길훈: 오늘 주제는 어떤 것일까요?

◆ 노성태: 지난주 9월 14일 대구광역시 옛 대구형무소(이하 대구감옥 터)에서요. 광주광복회 회원, 시민 100여 명이 모여서 112년 만에 아주 중요한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왜 광주전남 출신의 의병장 후손들이 대구 감옥에서 112년 만에 추모제를 열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오늘 애청자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정길훈: 일주일 전 14일에 112년 만에 특별한 추모제가 대구 감옥 터에서 열렸다. 추모제를 연 계기가 무엇일까요?


◆ 노성태: 112년 만에 대구 감옥 터에서 열었던 것은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광주전남 의병장의 혼을 달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는데요.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광주전남인 그러니까 항일독립운동가가 무려 45명이나 됩니다. 이 숫자는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206명의 22%에 해당되는데요.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독립운동가 45명 중 43명이 1908년에서 1912년 사이에 순국했던 한말의병장들이고 나머지 두 분은 3.1운동과 관련해서 대구감옥에 수감된 후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한 경우입니다.

◇ 정길훈: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한말의병 가운데 광주전남 출신이 43명이나 된다고 하셨는데요. 이분들이 왜 광주 감옥이 아닌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셨을까요?

◆ 노성태: 광주전남 의병들이 광주 감옥이 아닌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것은 당시 사법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08년부터 근대 사법 제도가 실시됐고 당시 관찰사가 있었던 13도에 지방법원이 설치됐고 고등법원은 서울, 평양, 대구에만 설립이 됩니다.

◇ 정길훈: 광주에는 없었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구 복심법원의 관할 구역이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였기 때문에 한말 전라도 의병장을 비롯한 3.1운동의 주역,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돼서 지방법원에서 불복했던 다수의 광주전남인들이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를 했고. 그래서 대구 복심법원이 남도 출신 독립운동가들로 북적였던 이유죠.


◇ 정길훈: 항소심 법원인 고법이 광주에는 없었고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군요. 대구 감옥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 노성태: 전국 8개 감옥 중 하나였던 대구 감옥은 처음에는 1908년 경산 감영, 감영이라고 하는 것이 관찰사가 근무했던 곳을 감영이라고 그러는데 경상 감영에서 개청했다가 1910년 4월 대구시 중구 삼덕동 102번지로 옮기게 되는데 이 현장에서 광주전남 의병들이 순국을 했던 것이죠.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1910년 4월 이전에 항소했던 의병장들은 대구 공소 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대구 감영에 있었던. 그다음에 1910년 5월 이후에 의병장들을 비롯한 아까 3.1 운동 관련했던 70여명의 인물이라든가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에 항소했었던 150여명 이런 분들은 삼덕동으로 이전했었던 1910년 5월 이후에 삼덕동 감옥에 수감됐고 재판을 받았던 곳입니다.

◇ 정길훈: 그러면 전남 출신 의병장들의 순국 장소는 대구 감영의 감옥인가요? 아니면 삼덕동의 감옥인가요?

◆ 노성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삼덕동 감옥에서 대부분 순국했다고 저는 봅니다. 1909년 많은 분이 알고 있습니다만 광주전남은 최대 의병 항쟁지였습니다. 1909년의 경우 참여 의병 수가 60%가 광주전남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실시된 작전이 1909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때 체포된 의병장이 심남일, 안규홍을 비롯한 다수의 의병장들이 광주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을 받았고 계속 이야기가 됩니다만 이에 불복해서 1910년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게 됩니다. 광주에 송암로, 설죽로가 있는데요. 그 길의 주인공인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인데 양진여 의병장의 경우에는 대구 감옥에서 1910년 5월 31일 그리고 아들 양상기는 8월 1일에 교수형이 집행됐고 그리고 함평 출신 심남일 의병장은 1910년 10월 4일에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됩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자면 감영 대구 감옥이 아니라 삼덕동에 있었던 대구 감옥에서 광주전남 의병장 43명이 순국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대구 감옥 터, 현재 삼덕교회가 위치해 있는데 여기에서 추모제를 지냈던 것입니다.

◇ 정길훈: 경과가 그렇게 진행됐군요. 남도 의병장들이 순국했던 대구 감옥 터 현재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나요?


◆ 노성태: 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고요. 감옥이 이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의 옛터는 대형 교회가 들어서 있습니다. 교회 건물 입구에 가면 대구 감옥이었음을 알려주는 대구형무소 사적 안내라는 제목이 붙은 당시 감옥 벽돌로 만든 사적 표시가 남아있고요. 그래서 당시 그 사적지 표지판에는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분들 또 구금당했던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제가 가서 확인해 보니까 광주전남 출신 의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정길훈: 남도 출신 의병장 가운데 이름이 새겨진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을까요?


◆ 노성태: 경상도 출신 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분, 저항시인 이육사라고 하는 분 있잖아요. 이분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고요. 보성 출신의 안규홍 의병장 그리고 전라북도 임실 출신의 전해산 의병장, 함평 출신의 심남일 의병장을 비롯해서 광주 북구 출신의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그리고 광산고 출신 오성술 의병장 그리고 심남일 의병장의 선봉장이었던 강우경 의병장 이런 분들의 이름이 하얀 글씨로 벽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 정길훈: 광주 전남 출신 의병장 이야기하실 때 앙진여, 양상기 부자 또 함평의 심남일 의병장 이런 전남 지역 의병장들이 대부분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왜 그렇습니까?

◆ 노성태: 3.1운동에 관련해서는 아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70여분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40여분이 대구 감옥에 수감이 되는데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보안법 위반이라든가 출판법 위반, 치안유지법입니다. 그래서 최고 형량이 3~4년 정도에서 몇 개월의 형이 선고되는데요. 그런데 한말 의병들에게는 적용된 죄목이 달랐습니다. 내란죄, 폭동, 강도, 살인, 방화, 모살죄. 따라서 가장 무거운 형벌인 20년이라든가 무기징역이라든가 교수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 정길훈: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의병장 가운데 전북 임실 출신 전해산 의병장이 남긴 우국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시일까요?

◆ 노성태: 일부분만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이제 영산강으로 다시 못 가리니 두견새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까나’ 이런 우국시인데요. 여기에서 제 가슴을 친 것이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 가리니,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했지만 기각이 되었고 또 교수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잖아요. 광주를 떠날 때 보았던 영산강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자신의 슬픈 현실, 또 크게 확대하면 조국의 슬픈 현실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이분이 전북 임실 출신이라고 언급을 했는데 왜 고향을 영산강이라고 표현했을까요?

◆ 노성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해산 의병장 1심 재판 광주지방법원에서 있었잖아요. 현재 5.18 기록관 자리인데요. 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이 선고가 되니까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를 하게 되는데 당시 대구로 가는 길이 지금이야 자동차로 이동합니다만 그때는 영산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까지 작은 배로 이동을 했고요. 또 목포에서 큰 배를 타고 부산까지, 부산에서 경부선 기차를 이용해서 대구까지 갑니다. 그래서 전해산이 광주를 떠나서 대구로 향할 때 봤던 고향산천은 우국시에서 언급했던 영산강인 것이고요. 그래서 이제 고향 땅을 찾을 수 없고 죽어서야 두견새가 돼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비장한 표현의 우국시라고 생각됩니다.

◇ 정길훈: 대구 감옥 터에 노 원장께서 가보셨을 텐데 남도 의병장을 기리는 추모비는 설치돼 있습니까?

◆ 노성태: 아쉽게도 아직 없습니다. 43명의 광주전남 출신 의병장이 순국했던 대구 감옥터에 그래서 그분들의 혼도 달래고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고요. 112년 전 광주전남 의병들의 순국 터는 오늘 광주와 대구가 연대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 자원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추모비가 건립이 되고 대구에 기념관이 들어선다면 아마 정치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갈등을 극복하고 연대,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정길훈: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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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112년 만의 특별한 추모제…대구에서 잊힌 광주·전남 애국지사
    • 입력 2022-09-21 14: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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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4일 옛 대구 감옥 터에서 광주·전남 애국지사 추모제 열려"<br />- "일제강점기 대구 감옥에서 광주·전남 애국지사 45명 순국"<br />- "45명 가운데 43명이 한말 의병장..2명은 3.1운동 관련"<br />- "항소심 법원이 광주에 없어서 대구에서 재판 받고 순국"<br />- "광주광복회 회원들, 112년 만에 대구서 추모제 열어"<br />- "대구 감옥 터에 사적 표지만 남아..애국지사 추모비 세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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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 : 정유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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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길훈 앵커 (이하 정길훈):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이죠.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정길훈: 오늘 주제는 어떤 것일까요?

◆ 노성태: 지난주 9월 14일 대구광역시 옛 대구형무소(이하 대구감옥 터)에서요. 광주광복회 회원, 시민 100여 명이 모여서 112년 만에 아주 중요한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왜 광주전남 출신의 의병장 후손들이 대구 감옥에서 112년 만에 추모제를 열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오늘 애청자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정길훈: 일주일 전 14일에 112년 만에 특별한 추모제가 대구 감옥 터에서 열렸다. 추모제를 연 계기가 무엇일까요?


◆ 노성태: 112년 만에 대구 감옥 터에서 열었던 것은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광주전남 의병장의 혼을 달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는데요.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광주전남인 그러니까 항일독립운동가가 무려 45명이나 됩니다. 이 숫자는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206명의 22%에 해당되는데요.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독립운동가 45명 중 43명이 1908년에서 1912년 사이에 순국했던 한말의병장들이고 나머지 두 분은 3.1운동과 관련해서 대구감옥에 수감된 후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한 경우입니다.

◇ 정길훈: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한말의병 가운데 광주전남 출신이 43명이나 된다고 하셨는데요. 이분들이 왜 광주 감옥이 아닌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셨을까요?

◆ 노성태: 광주전남 의병들이 광주 감옥이 아닌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것은 당시 사법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08년부터 근대 사법 제도가 실시됐고 당시 관찰사가 있었던 13도에 지방법원이 설치됐고 고등법원은 서울, 평양, 대구에만 설립이 됩니다.

◇ 정길훈: 광주에는 없었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구 복심법원의 관할 구역이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였기 때문에 한말 전라도 의병장을 비롯한 3.1운동의 주역,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돼서 지방법원에서 불복했던 다수의 광주전남인들이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를 했고. 그래서 대구 복심법원이 남도 출신 독립운동가들로 북적였던 이유죠.


◇ 정길훈: 항소심 법원인 고법이 광주에는 없었고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군요. 대구 감옥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 노성태: 전국 8개 감옥 중 하나였던 대구 감옥은 처음에는 1908년 경산 감영, 감영이라고 하는 것이 관찰사가 근무했던 곳을 감영이라고 그러는데 경상 감영에서 개청했다가 1910년 4월 대구시 중구 삼덕동 102번지로 옮기게 되는데 이 현장에서 광주전남 의병들이 순국을 했던 것이죠.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1910년 4월 이전에 항소했던 의병장들은 대구 공소 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대구 감영에 있었던. 그다음에 1910년 5월 이후에 의병장들을 비롯한 아까 3.1 운동 관련했던 70여명의 인물이라든가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에 항소했었던 150여명 이런 분들은 삼덕동으로 이전했었던 1910년 5월 이후에 삼덕동 감옥에 수감됐고 재판을 받았던 곳입니다.

◇ 정길훈: 그러면 전남 출신 의병장들의 순국 장소는 대구 감영의 감옥인가요? 아니면 삼덕동의 감옥인가요?

◆ 노성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삼덕동 감옥에서 대부분 순국했다고 저는 봅니다. 1909년 많은 분이 알고 있습니다만 광주전남은 최대 의병 항쟁지였습니다. 1909년의 경우 참여 의병 수가 60%가 광주전남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실시된 작전이 1909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때 체포된 의병장이 심남일, 안규홍을 비롯한 다수의 의병장들이 광주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을 받았고 계속 이야기가 됩니다만 이에 불복해서 1910년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게 됩니다. 광주에 송암로, 설죽로가 있는데요. 그 길의 주인공인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인데 양진여 의병장의 경우에는 대구 감옥에서 1910년 5월 31일 그리고 아들 양상기는 8월 1일에 교수형이 집행됐고 그리고 함평 출신 심남일 의병장은 1910년 10월 4일에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됩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자면 감영 대구 감옥이 아니라 삼덕동에 있었던 대구 감옥에서 광주전남 의병장 43명이 순국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대구 감옥 터, 현재 삼덕교회가 위치해 있는데 여기에서 추모제를 지냈던 것입니다.

◇ 정길훈: 경과가 그렇게 진행됐군요. 남도 의병장들이 순국했던 대구 감옥 터 현재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나요?


◆ 노성태: 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고요. 감옥이 이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의 옛터는 대형 교회가 들어서 있습니다. 교회 건물 입구에 가면 대구 감옥이었음을 알려주는 대구형무소 사적 안내라는 제목이 붙은 당시 감옥 벽돌로 만든 사적 표시가 남아있고요. 그래서 당시 그 사적지 표지판에는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분들 또 구금당했던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제가 가서 확인해 보니까 광주전남 출신 의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정길훈: 남도 출신 의병장 가운데 이름이 새겨진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을까요?


◆ 노성태: 경상도 출신 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분, 저항시인 이육사라고 하는 분 있잖아요. 이분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고요. 보성 출신의 안규홍 의병장 그리고 전라북도 임실 출신의 전해산 의병장, 함평 출신의 심남일 의병장을 비롯해서 광주 북구 출신의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그리고 광산고 출신 오성술 의병장 그리고 심남일 의병장의 선봉장이었던 강우경 의병장 이런 분들의 이름이 하얀 글씨로 벽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 정길훈: 광주 전남 출신 의병장 이야기하실 때 앙진여, 양상기 부자 또 함평의 심남일 의병장 이런 전남 지역 의병장들이 대부분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왜 그렇습니까?

◆ 노성태: 3.1운동에 관련해서는 아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70여분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40여분이 대구 감옥에 수감이 되는데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보안법 위반이라든가 출판법 위반, 치안유지법입니다. 그래서 최고 형량이 3~4년 정도에서 몇 개월의 형이 선고되는데요. 그런데 한말 의병들에게는 적용된 죄목이 달랐습니다. 내란죄, 폭동, 강도, 살인, 방화, 모살죄. 따라서 가장 무거운 형벌인 20년이라든가 무기징역이라든가 교수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 정길훈: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의병장 가운데 전북 임실 출신 전해산 의병장이 남긴 우국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시일까요?

◆ 노성태: 일부분만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이제 영산강으로 다시 못 가리니 두견새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까나’ 이런 우국시인데요. 여기에서 제 가슴을 친 것이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 가리니,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했지만 기각이 되었고 또 교수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잖아요. 광주를 떠날 때 보았던 영산강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자신의 슬픈 현실, 또 크게 확대하면 조국의 슬픈 현실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이분이 전북 임실 출신이라고 언급을 했는데 왜 고향을 영산강이라고 표현했을까요?

◆ 노성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해산 의병장 1심 재판 광주지방법원에서 있었잖아요. 현재 5.18 기록관 자리인데요. 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이 선고가 되니까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를 하게 되는데 당시 대구로 가는 길이 지금이야 자동차로 이동합니다만 그때는 영산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까지 작은 배로 이동을 했고요. 또 목포에서 큰 배를 타고 부산까지, 부산에서 경부선 기차를 이용해서 대구까지 갑니다. 그래서 전해산이 광주를 떠나서 대구로 향할 때 봤던 고향산천은 우국시에서 언급했던 영산강인 것이고요. 그래서 이제 고향 땅을 찾을 수 없고 죽어서야 두견새가 돼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비장한 표현의 우국시라고 생각됩니다.

◇ 정길훈: 대구 감옥 터에 노 원장께서 가보셨을 텐데 남도 의병장을 기리는 추모비는 설치돼 있습니까?

◆ 노성태: 아쉽게도 아직 없습니다. 43명의 광주전남 출신 의병장이 순국했던 대구 감옥터에 그래서 그분들의 혼도 달래고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고요. 112년 전 광주전남 의병들의 순국 터는 오늘 광주와 대구가 연대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 자원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추모비가 건립이 되고 대구에 기념관이 들어선다면 아마 정치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갈등을 극복하고 연대,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정길훈: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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