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이운자 할머니의 가슴 아픈 가족사

입력 2022.09.22 (19:58) 수정 2022.09.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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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 세 번째 순서입니다.

이운자 할머니는 4·3 당시 친오빠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언니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끌려가듯 군인과 결혼을 해야 했던 비극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이운자/4·3 희생자 유족 : "삐라도 막 날아다닐 때였고 그때 분위기가 참 어수선 할 때였습니다. (오빠는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가서 광복되니까 제대해서 제주도에 왔거든요. 그런데 말을 못했어요, 한국말을. 시대가 험하니까 오빠를 20살 때 결혼을 시켰는데 결혼해서 그 뒷 해에 끌려갔거든요. 집에서 아침 식사 하는데 그냥 와서 경찰서에 가자 해서 간 것이 끝이에요. 오빠가 감옥에 있을 때 언니들이 면회 갔는데 "아무래도 난 3년을 살아야 될 것 같다"고 했나 봐요. 추미애 (당시)의원이 수형 기록을 뽑아냈다 그래요. 그래서 봤더니 (우리 오빠)징역 3년이 나왔고 또 15년도 나왔더라고요. (3년이면 목포로 가야 하는데)목포형무소 꽉 차니까 그것을 (15년으로) 고쳐서 대구로 보냈다 그러더라고요. 대구에 마침 언니들이 사니까 어머니가 대구에 찾아갔어요, 형무소에. 찾아갔더니 (1950년)7월27일 그날 총살당했다는 소리만 듣고. (6·25 발발하니까) 오빠는 그때 사상범이라고 해서 다 정부에서 데려가 총살을 시켰나 봐요."]

[이운자/4·3 희생자 유족 : "(2연대 헌병이) 언니와 억지로 결혼하겠다고, 언니가 도립병원 간호원으로 다녔었거든요. 한 열입곱, 열여덟 살 언니는 시집 안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한테 매 맞으면서, 왜냐하면 우리 집이 다 멸족하려고 반항하느냐, 시집 가야 된다고 해서 막 울면서 억지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때 언니가 결혼해서 딸 하나를 낳아서 그것이 비극이 돼서 지금까지 언니는 한 많은 세월을 살고 있고요. 우리 집에 자손도 끊기고 그렇게 비극으로 아버지가 마음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몇 년 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셔 버리고 어머니는 매일 바느질 하면서, 오빠 생각하며 눈물 흘리고."]

[이운자/4·3 희생자 유족 : "저도 가서 (오빠 총살당한 곳) 보았는데 대구 상도동 골짜기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뭐가 들어섰는지 흔적도 없이, 어떻게 그 시신을 처리했는지 (몰라서) 가장 그게 안타깝습니다. 최근에 군사재판 한 사람은 국가에서 다 재심하고 있다고, 이번에 연락이 왔는데 (8월 30일 재심재판 가보니) 우리도 몰랐는데 국가 반란죄로 기소됐다고, 반란은 커녕 (한국)말도 잘 못했던 오빠한테. 반란했다는 흔적이 없으니까 무죄다 해서 이번에 선고받았어요. 당장 어머니 생각이 났어요. 왜냐하면 저세상에서 어머니가 한을 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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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증언] 이운자 할머니의 가슴 아픈 가족사
    • 입력 2022-09-22 19:58:00
    • 수정2022-09-22 20:13:08
    뉴스7(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 세 번째 순서입니다.

이운자 할머니는 4·3 당시 친오빠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언니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끌려가듯 군인과 결혼을 해야 했던 비극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이운자/4·3 희생자 유족 : "삐라도 막 날아다닐 때였고 그때 분위기가 참 어수선 할 때였습니다. (오빠는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가서 광복되니까 제대해서 제주도에 왔거든요. 그런데 말을 못했어요, 한국말을. 시대가 험하니까 오빠를 20살 때 결혼을 시켰는데 결혼해서 그 뒷 해에 끌려갔거든요. 집에서 아침 식사 하는데 그냥 와서 경찰서에 가자 해서 간 것이 끝이에요. 오빠가 감옥에 있을 때 언니들이 면회 갔는데 "아무래도 난 3년을 살아야 될 것 같다"고 했나 봐요. 추미애 (당시)의원이 수형 기록을 뽑아냈다 그래요. 그래서 봤더니 (우리 오빠)징역 3년이 나왔고 또 15년도 나왔더라고요. (3년이면 목포로 가야 하는데)목포형무소 꽉 차니까 그것을 (15년으로) 고쳐서 대구로 보냈다 그러더라고요. 대구에 마침 언니들이 사니까 어머니가 대구에 찾아갔어요, 형무소에. 찾아갔더니 (1950년)7월27일 그날 총살당했다는 소리만 듣고. (6·25 발발하니까) 오빠는 그때 사상범이라고 해서 다 정부에서 데려가 총살을 시켰나 봐요."]

[이운자/4·3 희생자 유족 : "(2연대 헌병이) 언니와 억지로 결혼하겠다고, 언니가 도립병원 간호원으로 다녔었거든요. 한 열입곱, 열여덟 살 언니는 시집 안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한테 매 맞으면서, 왜냐하면 우리 집이 다 멸족하려고 반항하느냐, 시집 가야 된다고 해서 막 울면서 억지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때 언니가 결혼해서 딸 하나를 낳아서 그것이 비극이 돼서 지금까지 언니는 한 많은 세월을 살고 있고요. 우리 집에 자손도 끊기고 그렇게 비극으로 아버지가 마음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몇 년 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셔 버리고 어머니는 매일 바느질 하면서, 오빠 생각하며 눈물 흘리고."]

[이운자/4·3 희생자 유족 : "저도 가서 (오빠 총살당한 곳) 보았는데 대구 상도동 골짜기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뭐가 들어섰는지 흔적도 없이, 어떻게 그 시신을 처리했는지 (몰라서) 가장 그게 안타깝습니다. 최근에 군사재판 한 사람은 국가에서 다 재심하고 있다고, 이번에 연락이 왔는데 (8월 30일 재심재판 가보니) 우리도 몰랐는데 국가 반란죄로 기소됐다고, 반란은 커녕 (한국)말도 잘 못했던 오빠한테. 반란했다는 흔적이 없으니까 무죄다 해서 이번에 선고받았어요. 당장 어머니 생각이 났어요. 왜냐하면 저세상에서 어머니가 한을 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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