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쌀 컵밥’ 우리쌀로 꼭 바꿔야 할까

입력 2022.10.07 (06:02) 수정 2022.10.0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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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쌀이 한 때 명품 취급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칼로스(Calrose),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나는 쌀입니다. 1970년대 개발된 '통일벼'보다 훨씬 고급으로 통했습니다. 주한미군 PX에 납품된 칼로스가 90년대 부유층에 불법 유통돼 사회 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쌀 시장 개방 때는 우리 밥상을 집어삼킬 '괴물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칼로스가 본격 수입되자, 우리 입맛에는 안 맞다는 소비자들이 많았고, 시장에서 금방 자취를 감췄습니다.

미국 PX에서 흘러나온 칼로스(왼쪽) 쌀이 시중에 불법 유통 돼 정부가 단속에 나섰다는 1994년 11월 24일 KBS 뉴스9 보도.미국 PX에서 흘러나온 칼로스(왼쪽) 쌀이 시중에 불법 유통 돼 정부가 단속에 나섰다는 1994년 11월 24일 KBS 뉴스9 보도.

■ 국정감사에 등장한 컵밥

그런데 이 칼로스가 국회 농식품부 국정감사에서 다시 등장했습니다. CJ제일제당과 오뚜기 등 식품업체가 '빅스팸마요덮밥' 등 일부 컵밥 제품을 만드는데 칼로스 등 수입쌀을 쓰고 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쌀값이 폭락하고 있는데, 수입쌀 대신 국산 쌀을 써서 농가 어려움을 덜어달란 취지였습니다.

지난 4일 농해수위 국정감사에서 컵밥 제품의 수입쌀 사용 문제를 지적하는 국회 농해수위 안호영 위원지난 4일 농해수위 국정감사에서 컵밥 제품의 수입쌀 사용 문제를 지적하는 국회 농해수위 안호영 위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안호영 위원은 "즉석밥 시장의 67%를 차지하는 CJ제일제당이 농민과 소비자를 실망시켰다"며 "대기업이 쓰면 다른 기업도 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해달라"라고 지적했습니다. 같은 상임위 소속 이원택 위원도 "국산쌀 활용을 늘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임형찬 CJ제일제당 부사장은 이런 지적에 "R&D(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해서 국산으로 대체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황성만 오뚜기 대표도 "수출용 제품에 한해서만 수입쌀을 사용하지만, 거래처와 협의해 국산 대체를 검토하겠다"라고 답했습니다.

■ 볶음밥에 쓰이는 칼로스…원가 차이 3배

국감에서 언급된 제품들이 칼로스를 쓰기 시작한 건 올해 3월부터입니다. CJ제일제당은 "소비자 맛 평가에서 국산보다 칼로스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아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품 원가를 낮추려고 그런 건 아니란 건데, 농해수위 안호영 위원이 확보한 구매원가 자료에 따르면 칼로스는 1㎏당 456원, 국산 쌀이 1㎏당 1,875원(9월 기준 도매가)으로 3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CJ제일제당이 올해 3월부터 미국산 쌀을 쓰기 시작한 컵밥 제품들CJ제일제당이 올해 3월부터 미국산 쌀을 쓰기 시작한 컵밥 제품들

칼로스는 국산 쌀과 맛이 다르다는 게 대체적 평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쌀밥으로 별로 인기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칼로스는 국산 쌀 품종(추청, 고시히카리 등)에 비해 아밀로오스 함량이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쫀득쫀득한 맛, 찰기가 조금 부족한데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우리 입맛에는 잘 안 맞는 겁니다.

다만, '고슬밥' 칼로스는 밥알 사이 양념이 스며드는 음식에는 비교적 잘 맞는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미국 쌀 협회' 홈페이지에서도 "볶음밥과 리조또 등 서양 요리나 중국요리에 적합하다"라고 칼로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소스와 함께 비벼 먹는 컵밥 종류에선 칼로스가 국산 쌀보다 어울리는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 부족할 땐 수입쌀 쓰라더니…

식품업계가 국산 쌀 대신 수입쌀을 쓴 배경엔 가공식품에 쓰는 국산 쌀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농식품부는 추수한 지 2~3년 지난 정부 비축미를 가공용 쌀로 공급하는데, 이 공급량은 ▲ 2020년 11만 톤 ▲2021년 7만 톤 ▲2022년 5만 톤으로 꾸준히 줄었습니다.

태풍으로 쌀 수확량이 크게 줄었던 2020년에는 쌀 가공 협회(정부의 수입쌀 공급을 대행)가 나서 식품업계에 수입쌀 등 대체원료 사용을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CJ제일제당을 비롯한 식품업체들이 냉동밥류 제품에 쓰이는 쌀을 수입산으로 바꿨던 것입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가공용으로 쓸 재고 쌀이 한 때 부족했었다"라면서 "내년부터는 가공용 국산 쌀 물량이 늘어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19일 ‘우리쌀 소비 촉진’ 심포지엄에서 농협경제연구소 황성혁 박사가 발표한 자료 캡처.지난달 19일 ‘우리쌀 소비 촉진’ 심포지엄에서 농협경제연구소 황성혁 박사가 발표한 자료 캡처.

■ '국산 쌀' 보다 '쌀 소비'가 먼저

쌀 소비는 급격하게 줄고 있지만, '쌀 가공식품'은 거의 유일하게 소비가 늘고 있는 쌀 관련 식품입니다.
수출 성장세도 뚜렷합니다. 2020년 기준 미국 수출액은 5,533만 달러로 직전 해에 비해 53% 늘었고, 5년 간 연평균 성장률은 23%에 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WTO 협정상 매년 41만 톤가량의 수입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합니다. 올해 쌀 예측 수요량이 347만 톤 수준이니, 적지 않은 물량인 셈입니다. 국회 농해수위 정희용 위원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이런 의무 수입 쌀을 사고 보관하는 데 2조 5천억 원가량 들어갔다고 합니다.


쌀값 폭락은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식품회사를 추궁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될 문제인지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CJ제일제당이 올해 쓴 칼로스 쌀은 468톤 규모입니다(가장 유명한 '햇반' 제품은 연간 6만 톤 규모의 국산 쌀을 씁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농업연구기관의 한 연구원은 "국산 쌀에 집착하기보다 쌀 소비 시장 자체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라면서 "일본은 즉석밥용 쌀을 따로 개발하는 등 소비 패턴에 맞게 품종을 만들어 소비 시장을 키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인포그래픽 :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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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쌀 컵밥’ 우리쌀로 꼭 바꿔야 할까
    • 입력 2022-10-07 06:02:23
    • 수정2022-10-07 09:28:51
    취재K

미국 쌀이 한 때 명품 취급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칼로스(Calrose),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나는 쌀입니다. 1970년대 개발된 '통일벼'보다 훨씬 고급으로 통했습니다. 주한미군 PX에 납품된 칼로스가 90년대 부유층에 불법 유통돼 사회 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쌀 시장 개방 때는 우리 밥상을 집어삼킬 '괴물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칼로스가 본격 수입되자, 우리 입맛에는 안 맞다는 소비자들이 많았고, 시장에서 금방 자취를 감췄습니다.

미국 PX에서 흘러나온 칼로스(왼쪽) 쌀이 시중에 불법 유통 돼 정부가 단속에 나섰다는 1994년 11월 24일 KBS 뉴스9 보도.
■ 국정감사에 등장한 컵밥

그런데 이 칼로스가 국회 농식품부 국정감사에서 다시 등장했습니다. CJ제일제당과 오뚜기 등 식품업체가 '빅스팸마요덮밥' 등 일부 컵밥 제품을 만드는데 칼로스 등 수입쌀을 쓰고 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쌀값이 폭락하고 있는데, 수입쌀 대신 국산 쌀을 써서 농가 어려움을 덜어달란 취지였습니다.

지난 4일 농해수위 국정감사에서 컵밥 제품의 수입쌀 사용 문제를 지적하는 국회 농해수위 안호영 위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안호영 위원은 "즉석밥 시장의 67%를 차지하는 CJ제일제당이 농민과 소비자를 실망시켰다"며 "대기업이 쓰면 다른 기업도 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해달라"라고 지적했습니다. 같은 상임위 소속 이원택 위원도 "국산쌀 활용을 늘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임형찬 CJ제일제당 부사장은 이런 지적에 "R&D(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해서 국산으로 대체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황성만 오뚜기 대표도 "수출용 제품에 한해서만 수입쌀을 사용하지만, 거래처와 협의해 국산 대체를 검토하겠다"라고 답했습니다.

■ 볶음밥에 쓰이는 칼로스…원가 차이 3배

국감에서 언급된 제품들이 칼로스를 쓰기 시작한 건 올해 3월부터입니다. CJ제일제당은 "소비자 맛 평가에서 국산보다 칼로스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아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품 원가를 낮추려고 그런 건 아니란 건데, 농해수위 안호영 위원이 확보한 구매원가 자료에 따르면 칼로스는 1㎏당 456원, 국산 쌀이 1㎏당 1,875원(9월 기준 도매가)으로 3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CJ제일제당이 올해 3월부터 미국산 쌀을 쓰기 시작한 컵밥 제품들
칼로스는 국산 쌀과 맛이 다르다는 게 대체적 평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쌀밥으로 별로 인기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칼로스는 국산 쌀 품종(추청, 고시히카리 등)에 비해 아밀로오스 함량이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쫀득쫀득한 맛, 찰기가 조금 부족한데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우리 입맛에는 잘 안 맞는 겁니다.

다만, '고슬밥' 칼로스는 밥알 사이 양념이 스며드는 음식에는 비교적 잘 맞는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미국 쌀 협회' 홈페이지에서도 "볶음밥과 리조또 등 서양 요리나 중국요리에 적합하다"라고 칼로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소스와 함께 비벼 먹는 컵밥 종류에선 칼로스가 국산 쌀보다 어울리는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 부족할 땐 수입쌀 쓰라더니…

식품업계가 국산 쌀 대신 수입쌀을 쓴 배경엔 가공식품에 쓰는 국산 쌀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농식품부는 추수한 지 2~3년 지난 정부 비축미를 가공용 쌀로 공급하는데, 이 공급량은 ▲ 2020년 11만 톤 ▲2021년 7만 톤 ▲2022년 5만 톤으로 꾸준히 줄었습니다.

태풍으로 쌀 수확량이 크게 줄었던 2020년에는 쌀 가공 협회(정부의 수입쌀 공급을 대행)가 나서 식품업계에 수입쌀 등 대체원료 사용을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CJ제일제당을 비롯한 식품업체들이 냉동밥류 제품에 쓰이는 쌀을 수입산으로 바꿨던 것입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가공용으로 쓸 재고 쌀이 한 때 부족했었다"라면서 "내년부터는 가공용 국산 쌀 물량이 늘어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19일 ‘우리쌀 소비 촉진’ 심포지엄에서 농협경제연구소 황성혁 박사가 발표한 자료 캡처.
■ '국산 쌀' 보다 '쌀 소비'가 먼저

쌀 소비는 급격하게 줄고 있지만, '쌀 가공식품'은 거의 유일하게 소비가 늘고 있는 쌀 관련 식품입니다.
수출 성장세도 뚜렷합니다. 2020년 기준 미국 수출액은 5,533만 달러로 직전 해에 비해 53% 늘었고, 5년 간 연평균 성장률은 23%에 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WTO 협정상 매년 41만 톤가량의 수입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합니다. 올해 쌀 예측 수요량이 347만 톤 수준이니, 적지 않은 물량인 셈입니다. 국회 농해수위 정희용 위원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이런 의무 수입 쌀을 사고 보관하는 데 2조 5천억 원가량 들어갔다고 합니다.


쌀값 폭락은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식품회사를 추궁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될 문제인지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CJ제일제당이 올해 쓴 칼로스 쌀은 468톤 규모입니다(가장 유명한 '햇반' 제품은 연간 6만 톤 규모의 국산 쌀을 씁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농업연구기관의 한 연구원은 "국산 쌀에 집착하기보다 쌀 소비 시장 자체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라면서 "일본은 즉석밥용 쌀을 따로 개발하는 등 소비 패턴에 맞게 품종을 만들어 소비 시장을 키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인포그래픽 :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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