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간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 “‘추사’는 나의…”

입력 2022.11.29 (12:51) 수정 2022.11.29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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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 〈완당선생초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허련 〈완당선생초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우리는 주로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기억하지만, 그 시대가 낳은 둘도 없는 천재적 지식인이자 예술가였습니다. 이 조숙한 20대 천재에게 평생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으니, 선진 청나라의 문물을 직접 보고 익히는 것이었죠. 다행히 그 꿈은 꿈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1809년, 김정희는 그렇게도 고대했던 청나라 여행의 꿈을 마침내 이룹니다. 당시 우리 나이로 스물넷. 이 전도유망한 조선 젊은이의 등장은 당시 청나라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했죠. 아니, 이웃 나라 조선에 이런 뛰어난 인재가 있었단 말인가. 두 달 남짓에 불과한 기간이었으니 일 분 일 초가 아까웠겠죠. 김정희는 청나라에 머무는 동안 그곳 학자들과 돈독하게 교유하며 평생에 잊지 못할 귀한 배움을 얻게 됩니다.

김정희와 청나라 인사들은 중국어로 대화했을까요. 아닙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은 종이에 글을 적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붓으로 나눈 대화라 해서 필담(筆談)이라 하죠.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인 대화법이었습니다. 글로 대화를 나눴으니, 당연히 증거가 남았겠죠. 당시에 그들이 나눈 생생한 대화의 증거가 만약 남아 전한다면, 대화록 또는 녹취록이라 부를 수 있을 필담이 얼마나 중요한 사료가 될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좋을 겁니다.

〈추사필담첩〉, 1809~1810, 추사박물관〈추사필담첩〉, 1809~1810, 추사박물관

2020년,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추사박물관이 국내의 한 소장자로부터 상당한 분량의 필담을 모은 '필담첩'을 구매합니다. 편의상 '추사필담첩'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당대에 청나라에 다녀온 김정희, 박제가, 유득공, 김노경 등 여러 인물의 필담을 책자 형식으로 한 데 묶었습니다. 전체 면수만도 앞뒷면을 포함해 244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현장에서 빠르게 써 내려간 글씨라 한자깨나 안다는 사람도 읽어내기가 무척 버겁습니다. 그래서 필담첩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만도 장장 2년이 걸렸습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제 학자들이 하나둘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일이죠. 다만, 필담첩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지금껏 우리가 까맣게 몰랐던, 전혀 새로운 내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첫 만남은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법이죠. 멀리 조선에서 찾아온 청년과 한자리에 마주 앉은 청나라 인사들이 통성명을 청합니다.

중국 측 인사 : "젊은이는 이름과 호와 관직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정희 : 제 이름(名)은 정희(正喜), 자(字)는 추사(秋史), 호(號)는 보담재(寶覃齋)입니다. 지난해 10월 진사(進士)가 됐습니다.

김정희의 답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름은 정희, 그렇죠. 자는 추사, 잘못 쓴 건가? 추사는 김정희의 호(號)인데, 왜 자(字)라고 했지? 그러고 나서 호는 보담재라고 합니다. 한자 원문에도 분명하게 자(字)라고 돼 있습니다. 김정희가 그걸 틀리게 썼을 리 없죠. 김정희 본인이 '추사'를 '자'라고 직접 밝힌 최초의 기록입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 김정희가 자기 이름과 자, 호, 관직을 밝힌 내용이 보인다.사진 오른쪽 아래에 김정희가 자기 이름과 자, 호, 관직을 밝힌 내용이 보인다.

김정희는 평생 수도 없이 많은 호를 만들어 사용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두 가지입니다. 그중에서도 '추사'는 김정희라는 이름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고 부를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이죠. 그렇다 보니 다들 '추사'를 김정희의 호라고만 생각해왔던 겁니다.

자(字)를 이름만큼 흔하게 쓰는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전통적으로 호(號)를 주로 썼습니다. 조선 중기의 명필 한호(韓濩, 1543~1605)만 해도 이름만 들으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조차 호를 붙여서 '한석봉' 하면 다 압니다. 이율곡, 이퇴계 등등 이런 예는 셀 수 없이 많죠. 예부터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전통이 강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해서 대신 평소에 편하게 부르고 쓸 수 있는 이름을 자기가 따로 짓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지어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號)입니다.

반면, 자(字)는 성격이 다릅니다. 자는 16살에 성인이 되는 관례(冠禮)라는 의식을 치르고 나면, 어른이 되었음을 기념해 주로 집안 어른이 지어준 별칭이었습니다. 짓는 시기와 용도 등이 분명히 다릅니다.

재미있는 건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 중에도 호가 뭔지 전혀 모르겠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이순신' 하면 사람들은 앞에 붙는 표현으로 십중팔구 '충무공'을 떠올립니다. 사전을 찾아봐도 이순신의 호는 안 나와 있고, 자는 여해(汝諧)라고 돼 있습니다. '충무공'은 세상을 떠난 뒤에 조정에서 내려준 시호(諡號)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 호는 모르고, 여해라는 자는 익숙하지 않고, 충무공이란 시호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입니다.

자, 여기서 당연히 궁금해집니다. 김정희는 어째서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흐름과 달리 추사라는 자(字)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됐을까. 이 부분에 대해선 필담첩을 직접 번역하고 연구한 중문학자 김규선 선문대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여기서, 중국에서는 자가 범칭으로 쓰인 경우가 종종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김정희, 즉 자신의 호가 아직 일반화되기 전의 김정희가 중국 인사들과 교류할 때 불리던 '추사'라는 자가 그대로 일반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인사가 김정희에게 편지를 보낼 때 김정희를 '추사'로 명명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 교수의 설명처럼,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자를 많이 썼습니다. 가령, <삼국지>를 대표하는 인물인 제갈공명의 공명, 조자룡의 자룡이 바로 자(字)입니다. 이런 예를 중국 역사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죠. 조선 사람 김정희를 대표하는 호칭이 '추사'가 된 것은 한-중 교류사라는 큰 틀에서 충분히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김규선 교수의 추론입니다.

필담첩이 추사박물관에 소장되고, 번역되지 않았다면 몰랐을 중요한 사실입니다. 논문이고 단행본이고 역사책, 미술책, 심지어 교과서에도 추사는 김정희의 호로 소개돼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기록들은 나중에 수정돼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잘 써온 '추사 김정희'라는 표현을 버리거나 바꿀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추사라는 자가 호로 사용된, 이 특별한 예외 덕분에 김정희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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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나라에 간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 “‘추사’는 나의…”
    • 입력 2022-11-29 12:51:53
    • 수정2022-11-29 12:54:19
    취재K
허련 〈완당선생초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우리는 주로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기억하지만, 그 시대가 낳은 둘도 없는 천재적 지식인이자 예술가였습니다. 이 조숙한 20대 천재에게 평생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으니, 선진 청나라의 문물을 직접 보고 익히는 것이었죠. 다행히 그 꿈은 꿈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1809년, 김정희는 그렇게도 고대했던 청나라 여행의 꿈을 마침내 이룹니다. 당시 우리 나이로 스물넷. 이 전도유망한 조선 젊은이의 등장은 당시 청나라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했죠. 아니, 이웃 나라 조선에 이런 뛰어난 인재가 있었단 말인가. 두 달 남짓에 불과한 기간이었으니 일 분 일 초가 아까웠겠죠. 김정희는 청나라에 머무는 동안 그곳 학자들과 돈독하게 교유하며 평생에 잊지 못할 귀한 배움을 얻게 됩니다.

김정희와 청나라 인사들은 중국어로 대화했을까요. 아닙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은 종이에 글을 적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붓으로 나눈 대화라 해서 필담(筆談)이라 하죠.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인 대화법이었습니다. 글로 대화를 나눴으니, 당연히 증거가 남았겠죠. 당시에 그들이 나눈 생생한 대화의 증거가 만약 남아 전한다면, 대화록 또는 녹취록이라 부를 수 있을 필담이 얼마나 중요한 사료가 될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좋을 겁니다.

〈추사필담첩〉, 1809~1810, 추사박물관
2020년,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추사박물관이 국내의 한 소장자로부터 상당한 분량의 필담을 모은 '필담첩'을 구매합니다. 편의상 '추사필담첩'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당대에 청나라에 다녀온 김정희, 박제가, 유득공, 김노경 등 여러 인물의 필담을 책자 형식으로 한 데 묶었습니다. 전체 면수만도 앞뒷면을 포함해 244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현장에서 빠르게 써 내려간 글씨라 한자깨나 안다는 사람도 읽어내기가 무척 버겁습니다. 그래서 필담첩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만도 장장 2년이 걸렸습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제 학자들이 하나둘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일이죠. 다만, 필담첩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지금껏 우리가 까맣게 몰랐던, 전혀 새로운 내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첫 만남은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법이죠. 멀리 조선에서 찾아온 청년과 한자리에 마주 앉은 청나라 인사들이 통성명을 청합니다.

중국 측 인사 : "젊은이는 이름과 호와 관직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정희 : 제 이름(名)은 정희(正喜), 자(字)는 추사(秋史), 호(號)는 보담재(寶覃齋)입니다. 지난해 10월 진사(進士)가 됐습니다.

김정희의 답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름은 정희, 그렇죠. 자는 추사, 잘못 쓴 건가? 추사는 김정희의 호(號)인데, 왜 자(字)라고 했지? 그러고 나서 호는 보담재라고 합니다. 한자 원문에도 분명하게 자(字)라고 돼 있습니다. 김정희가 그걸 틀리게 썼을 리 없죠. 김정희 본인이 '추사'를 '자'라고 직접 밝힌 최초의 기록입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 김정희가 자기 이름과 자, 호, 관직을 밝힌 내용이 보인다.
김정희는 평생 수도 없이 많은 호를 만들어 사용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두 가지입니다. 그중에서도 '추사'는 김정희라는 이름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고 부를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이죠. 그렇다 보니 다들 '추사'를 김정희의 호라고만 생각해왔던 겁니다.

자(字)를 이름만큼 흔하게 쓰는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전통적으로 호(號)를 주로 썼습니다. 조선 중기의 명필 한호(韓濩, 1543~1605)만 해도 이름만 들으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조차 호를 붙여서 '한석봉' 하면 다 압니다. 이율곡, 이퇴계 등등 이런 예는 셀 수 없이 많죠. 예부터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전통이 강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해서 대신 평소에 편하게 부르고 쓸 수 있는 이름을 자기가 따로 짓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지어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號)입니다.

반면, 자(字)는 성격이 다릅니다. 자는 16살에 성인이 되는 관례(冠禮)라는 의식을 치르고 나면, 어른이 되었음을 기념해 주로 집안 어른이 지어준 별칭이었습니다. 짓는 시기와 용도 등이 분명히 다릅니다.

재미있는 건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 중에도 호가 뭔지 전혀 모르겠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이순신' 하면 사람들은 앞에 붙는 표현으로 십중팔구 '충무공'을 떠올립니다. 사전을 찾아봐도 이순신의 호는 안 나와 있고, 자는 여해(汝諧)라고 돼 있습니다. '충무공'은 세상을 떠난 뒤에 조정에서 내려준 시호(諡號)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 호는 모르고, 여해라는 자는 익숙하지 않고, 충무공이란 시호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입니다.

자, 여기서 당연히 궁금해집니다. 김정희는 어째서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흐름과 달리 추사라는 자(字)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됐을까. 이 부분에 대해선 필담첩을 직접 번역하고 연구한 중문학자 김규선 선문대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여기서, 중국에서는 자가 범칭으로 쓰인 경우가 종종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김정희, 즉 자신의 호가 아직 일반화되기 전의 김정희가 중국 인사들과 교류할 때 불리던 '추사'라는 자가 그대로 일반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인사가 김정희에게 편지를 보낼 때 김정희를 '추사'로 명명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 교수의 설명처럼,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자를 많이 썼습니다. 가령, <삼국지>를 대표하는 인물인 제갈공명의 공명, 조자룡의 자룡이 바로 자(字)입니다. 이런 예를 중국 역사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죠. 조선 사람 김정희를 대표하는 호칭이 '추사'가 된 것은 한-중 교류사라는 큰 틀에서 충분히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김규선 교수의 추론입니다.

필담첩이 추사박물관에 소장되고, 번역되지 않았다면 몰랐을 중요한 사실입니다. 논문이고 단행본이고 역사책, 미술책, 심지어 교과서에도 추사는 김정희의 호로 소개돼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기록들은 나중에 수정돼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잘 써온 '추사 김정희'라는 표현을 버리거나 바꿀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추사라는 자가 호로 사용된, 이 특별한 예외 덕분에 김정희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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