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이만춘 할머니 “그때 나 혼자 살았어요”

입력 2023.03.09 (19:39) 수정 2023.03.0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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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여든 세 번째 순서입니다.

이만춘 할머니는 4·3 당시 군경의 총격에 오빠를 잃고 자신도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일본 군인들이) 밭 평수에 맞춰, 그 평수에 맞게 공출하라고 나왔어요. 공출해버리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먹을 것 없으면 너무 배고파서 풀이라는 풀은 다 뜯어다 먹었어요. (광복 후 다시)군인들이 보여. "오빠, 저 군인들 뭐예요?" "우리나라 지켜주는 군인들이야, 저 군인들은 좋은 군인이니까 죽이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마라."]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1948년) 12월 17일, 우리 집을 태워버렸어요. 우리 집에도 아침 식사 준비하는데 군인들이 우르르 와서 "내려가요, 내려가지 않으면 다 죽어요." 하니까 살림살이 놓아두고 그런 것도 아깝고 하니까 내려오지 못한 거예요. 뒷날부터 고산동산에서 딱 막아서 다시 내려오지도 못하고 내려온 사람은 올라가지도 못하고. (오빠랑)나도 못 내려왔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동생은 솥 하나 지고, 뭘 더 지겠어요? 우리 동생 일곱 살, 쌀이나 곡식 한 말 가져서 광양에 내려가니까 다시는 오지 못하고. 그냥 3.8선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산에서)너무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뭘 먹고 살았는지. 너무 배고파서 집터에 가보면 나물이라도 있을까 해서 다섯 사람인가, 여섯 사람인가 집터에 와봤어요. 가다가 두 사람은, 우리 오빠는 변을 당하고 또 동네 사람도 한 명 돌아가시고 나는 살았어요. 그 오빠 죽어가면서 내 이름을 막 부른 생각을 하면, 매일 울게 돼요. 오빠 안 부른 날이 없어요. 오빠! 대답도 없고, 70년 넘어서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도 (등에) 총 맞아서 팍 엎어지니까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엎어지니까 입으로 피가 콸콸 쏟아져. (군인들이) "한 번 더 쏴라" 하니까 엎어져 있는데 발로 툭 차니까 뒤집히며 피가 콸콸 나오니까 "죽었어" 하면서 그냥 가버렸어요."]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이틀, 사흘, 이레를 지나도 내가 목숨이 안 끊어져서 산 거예요. 외사촌 오빠가 애들이 죽은 거라도 보려고 찾아본 모양이에요. "아이고, 너는 목숨은 살았구나!" 해서 그 오빠가 업어서 움막에 가서 "밥은 주면 죽는다, 물만 끓여서 주라"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얼어도 죽고, 배고파도 죽고, 총 맞아서 피가 나도 그렇게 피가 나도 죽을 것인데 이레까지 살아서 이상했어요. 난 여드레 만에 그 오빠를 만난 거고. 다 동척회사로 가라고 해서 동척회사에 가보니까 내려온 사람들이 많고 오늘은 이 사람 잡아다 취조하는 소리에, 매 소리, 두드리는 소리. 취조받다 나온 것 보면 팔도 꺾어져서 나오고, 다리도 걷지도 못하면서 동척회사에서 한 사흘을 살았어요. 아픈 사람은 병원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병원은 동문시장 안에 육군병원이 있었어요. (거기서 치료를 받았죠.)"]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광양에 작은아버지 집에 오긴 왔는데 와서 보니 어머니도 먹을 것도 없고, 어디 가서 해올 것도 없어서 어머니도 어렵게 사는데 이때까지 살았어요. 불쌍한 백성, 죄가 무엇인지. 위에 간 사람은 죄지었다 해도 죄 하나도 없는 사람 천지예요. 너무나 불쌍한 사람 많이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도)저 아들 하나 공들여 키웠는데 4·3 때 죽어버리고 나 하나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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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증언] 이만춘 할머니 “그때 나 혼자 살았어요”
    • 입력 2023-03-09 19:39:53
    • 수정2023-03-09 20:07:23
    뉴스7(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여든 세 번째 순서입니다.

이만춘 할머니는 4·3 당시 군경의 총격에 오빠를 잃고 자신도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일본 군인들이) 밭 평수에 맞춰, 그 평수에 맞게 공출하라고 나왔어요. 공출해버리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먹을 것 없으면 너무 배고파서 풀이라는 풀은 다 뜯어다 먹었어요. (광복 후 다시)군인들이 보여. "오빠, 저 군인들 뭐예요?" "우리나라 지켜주는 군인들이야, 저 군인들은 좋은 군인이니까 죽이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마라."]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1948년) 12월 17일, 우리 집을 태워버렸어요. 우리 집에도 아침 식사 준비하는데 군인들이 우르르 와서 "내려가요, 내려가지 않으면 다 죽어요." 하니까 살림살이 놓아두고 그런 것도 아깝고 하니까 내려오지 못한 거예요. 뒷날부터 고산동산에서 딱 막아서 다시 내려오지도 못하고 내려온 사람은 올라가지도 못하고. (오빠랑)나도 못 내려왔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동생은 솥 하나 지고, 뭘 더 지겠어요? 우리 동생 일곱 살, 쌀이나 곡식 한 말 가져서 광양에 내려가니까 다시는 오지 못하고. 그냥 3.8선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산에서)너무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뭘 먹고 살았는지. 너무 배고파서 집터에 가보면 나물이라도 있을까 해서 다섯 사람인가, 여섯 사람인가 집터에 와봤어요. 가다가 두 사람은, 우리 오빠는 변을 당하고 또 동네 사람도 한 명 돌아가시고 나는 살았어요. 그 오빠 죽어가면서 내 이름을 막 부른 생각을 하면, 매일 울게 돼요. 오빠 안 부른 날이 없어요. 오빠! 대답도 없고, 70년 넘어서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도 (등에) 총 맞아서 팍 엎어지니까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엎어지니까 입으로 피가 콸콸 쏟아져. (군인들이) "한 번 더 쏴라" 하니까 엎어져 있는데 발로 툭 차니까 뒤집히며 피가 콸콸 나오니까 "죽었어" 하면서 그냥 가버렸어요."]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이틀, 사흘, 이레를 지나도 내가 목숨이 안 끊어져서 산 거예요. 외사촌 오빠가 애들이 죽은 거라도 보려고 찾아본 모양이에요. "아이고, 너는 목숨은 살았구나!" 해서 그 오빠가 업어서 움막에 가서 "밥은 주면 죽는다, 물만 끓여서 주라"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얼어도 죽고, 배고파도 죽고, 총 맞아서 피가 나도 그렇게 피가 나도 죽을 것인데 이레까지 살아서 이상했어요. 난 여드레 만에 그 오빠를 만난 거고. 다 동척회사로 가라고 해서 동척회사에 가보니까 내려온 사람들이 많고 오늘은 이 사람 잡아다 취조하는 소리에, 매 소리, 두드리는 소리. 취조받다 나온 것 보면 팔도 꺾어져서 나오고, 다리도 걷지도 못하면서 동척회사에서 한 사흘을 살았어요. 아픈 사람은 병원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병원은 동문시장 안에 육군병원이 있었어요. (거기서 치료를 받았죠.)"]

[이만춘/4·3 후유장애인 : "광양에 작은아버지 집에 오긴 왔는데 와서 보니 어머니도 먹을 것도 없고, 어디 가서 해올 것도 없어서 어머니도 어렵게 사는데 이때까지 살았어요. 불쌍한 백성, 죄가 무엇인지. 위에 간 사람은 죄지었다 해도 죄 하나도 없는 사람 천지예요. 너무나 불쌍한 사람 많이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도)저 아들 하나 공들여 키웠는데 4·3 때 죽어버리고 나 하나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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