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K] 4·3 예비검속의 실체…‘절대 극비’ 취재 뒷이야기

입력 2023.04.10 (19:17) 수정 2023.04.1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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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KBS는 지난주부터 오늘까지 4·3 75주년을 맞아 '절대 극비'란 주제로 4·3 당시 자행된 예비검속을 집중 조명해봤는데요.

이 내용을 취재한 안서연 기자와 보다 자세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안 기자 오랜만입니다.

이번 기획 주제를 '예비검속'으로 잡았는데요.

수많은 과제 중 예비검속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기자]

네, 마침 올해가 4·3 75주년이자 6·25전쟁이 멈춘 지 7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더라고요.

4·3과 6·25를 별개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4·3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들이 주로 1948년과 1949년에 집중돼 있긴 하지만, 1950년 6·25전쟁 당시에도 4·3의 여파로 인한 학살은 계속됐습니다.

바로 예비검속자와 전국의 형무소 수용자들을 처형한 건데요.

6·25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희생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이들을 통해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국가폭력을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아직도 예비검속에 대해 생소해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간략히 설명해주신다면요?

[기자]

앞서 전해드린 리포트에서도 보셨다시피 6·25 당일 전국의 경찰국에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는데요.

쉽게 말해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수상한 사람을 미리 가둬놓으라는 거였습니다.

제주에선 4·3사건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증거나 혐의도 없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예비검속이 이뤄졌는데요.

죄없는 사람들을 구금한 것도 모자라 조사도, 재판도 없이 무참하게 집단 학살했습니다.

사실 이 예비검속은 일제 시기에 실시되다 해방 후 폐지된 제도였는데요.

어떤 법령이나 규정에도 없는 제도로 약 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앵커]

듣는 것만으로도 참 화가 나는 일인데요,

예비검속 실체를 밝히기 위해 직접 추적에 나선 희생자 유족도 있었잖아요.

이도영 박사였죠,

이 분은 어떻게 취재하게 된 건가요?

[기자]

네, 이번 취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을 꼽자면 바로 고 이도영 박사님인데요.

사실 저도 이번 취재 전까진 이 분을 잘 몰랐습니다.

4·3 진상조사보고서에 예비검속 부분을 샅샅히 보는데, 각주에 이 분 성함이 열 번도 넘게 등장했는데요.

대체 누구시길래 이토록 많은 부분이 이 분의 저서나 자료에서 인용됐을까 궁금한 마음에 찾아봤더니, 예비검속 희생자의 유족이었습니다.

이미 기사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3살 때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잃은 이 박사는 연좌제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97년부터 예비검속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폐기될 뻔한 1950년 경찰 공문서부터 예비검속 당시 상황이 기록된 미국의 비밀문서까지 발굴했습니다.

또, 학살의 주체인 해병대 지휘관들까지 직접 찾아가고, 당시 권력의 핵심이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에게 양민 학살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서 한 개인이 얼마나 처절하게 학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앵커]

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4·3을 입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 용기와 집념이 참 대단하다 싶더라고요.

이번 기획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게 예비검속자들이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증언자였어요.

이건 어떻게 보도하게 된건가요?

[기자]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 고민했던 부분 중 하나가 학살의 참상을 어떻게 가슴에 와닿게 전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70여년이나 흘렀다보니 증언해줄 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시면서 제3자인 유족을 통해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그때 문득 진상조사보고서에 나온 증언자들의 채록이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비검속은 군경의 기록이 턱없이 적다보니 대부분 증언에 의한 진상 규명이 많은데요.

이 중에서도 가장 섬뜩했던 게 약 500명의 예비검속자를 알몸으로 바다로 끌고갔다 빈 배로 돌아왔다는 증언이었습니다.

당시 제주항에서 경비 근무를 하던 국민방위군은 그날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본인이 목격한 상황을 털어놨는데요.

채록작업을 하신 분들께 수소문을 한 끝에 녹음 테이프를 구해 생생한 증언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앵커]

바다뿐만 아니라 제주공항 활주로에서도 집단 학살이 있었잖아요?

이미 이곳에서 유해가 발굴됐기 때문에 이 사실은 아시는 분도 많으실텐데요.

취재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한 사실도 있었을까요?

[기자]

네, 공항 학살은 4·3연구소에서 채록한 당시 공항 주변 주민들의 증언과 유족들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드렸는데요.

이번에 취재하면서 가슴 아팠던 게 2007년 유해 발굴이 있기 전 유족들이 직접 유해를 찾아다닌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도영 박사를 비롯해 예비검속으로 부모님이 모두 희생된 강창옥 할아버지까지, 이분들은 옛 공항 지적도를 들고 다니며 주민들의 증언을 모아 암매장된 곳이 어딘지 특정했다고 합니다.

이분들의 끈질긴 노력은 실제 유해 발굴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하는데요.

유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이런 노력을 했는지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앵커]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유족들까지, 예비검속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죠?

[기자]

네, 지난주 전 진화위 조사위원도 이 자리에 출연해 전해드렸지만 예비검속이 워낙 극비로 진행됐다보니 섯알오름 학살처럼 주민들에게 발각된 게 아니고선 대부분 피해를 추정만 할 뿐입니다.

2019년 발간된 4·3추가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예비검속 희생자는 566명으로 조사됐는데요.

이는 1950년 8월 1,120명이 제주에 수감됐었다는 미국 기록의 절반 수준입니다.

특히, 예비검속이 이뤄진 4개 경찰서 가운데 제주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 관내 희생자 유해는 아직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았는데요.

하다못해 불법적인 군법회의나 일반재판라도 받았으면 기록이 남아 명예라도 회복해볼 수 있을텐데,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은 이런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희생돼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유족들은 토로했습니다.

[앵커]

네, 예비검속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지속돼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앞으로 남은 과제, 또 무엇이 있을까요?

[기자]

제주4·3은 과거사 해결의 모범이라고들 하는데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그 이유를 또 한 번 알 수 있었습니다.

정부의 진상 규명 작업이 있기 전, 이도영 박사를 비롯한 유족 몇 명은 학살 지휘관을 직접 찾아갔는데요.

이들은 다짜고짜 손가락질을 하기 보단 당신도 누군가의 잘못된 명령에 따른 것 아니냐며, 당신은 죄가 없으니 진실만이라도 밝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희생자 위령제에 직접 와줄 것을 청했지만 그 지휘관은 끝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상이 끝이 아니라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가해 집단이 과거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습니다.

[앵커]

네, 예비검속과 관련해 앞으로 어떤 노력이 이어지는지 지속적인 취재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안 기자, 고맙습니다.

촬영기자:고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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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절한K] 4·3 예비검속의 실체…‘절대 극비’ 취재 뒷이야기
    • 입력 2023-04-10 19:17:30
    • 수정2023-04-10 20:56:19
    뉴스7(제주)
[앵커]

KBS는 지난주부터 오늘까지 4·3 75주년을 맞아 '절대 극비'란 주제로 4·3 당시 자행된 예비검속을 집중 조명해봤는데요.

이 내용을 취재한 안서연 기자와 보다 자세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안 기자 오랜만입니다.

이번 기획 주제를 '예비검속'으로 잡았는데요.

수많은 과제 중 예비검속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기자]

네, 마침 올해가 4·3 75주년이자 6·25전쟁이 멈춘 지 7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더라고요.

4·3과 6·25를 별개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4·3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들이 주로 1948년과 1949년에 집중돼 있긴 하지만, 1950년 6·25전쟁 당시에도 4·3의 여파로 인한 학살은 계속됐습니다.

바로 예비검속자와 전국의 형무소 수용자들을 처형한 건데요.

6·25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희생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이들을 통해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국가폭력을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아직도 예비검속에 대해 생소해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간략히 설명해주신다면요?

[기자]

앞서 전해드린 리포트에서도 보셨다시피 6·25 당일 전국의 경찰국에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는데요.

쉽게 말해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수상한 사람을 미리 가둬놓으라는 거였습니다.

제주에선 4·3사건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증거나 혐의도 없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예비검속이 이뤄졌는데요.

죄없는 사람들을 구금한 것도 모자라 조사도, 재판도 없이 무참하게 집단 학살했습니다.

사실 이 예비검속은 일제 시기에 실시되다 해방 후 폐지된 제도였는데요.

어떤 법령이나 규정에도 없는 제도로 약 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앵커]

듣는 것만으로도 참 화가 나는 일인데요,

예비검속 실체를 밝히기 위해 직접 추적에 나선 희생자 유족도 있었잖아요.

이도영 박사였죠,

이 분은 어떻게 취재하게 된 건가요?

[기자]

네, 이번 취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을 꼽자면 바로 고 이도영 박사님인데요.

사실 저도 이번 취재 전까진 이 분을 잘 몰랐습니다.

4·3 진상조사보고서에 예비검속 부분을 샅샅히 보는데, 각주에 이 분 성함이 열 번도 넘게 등장했는데요.

대체 누구시길래 이토록 많은 부분이 이 분의 저서나 자료에서 인용됐을까 궁금한 마음에 찾아봤더니, 예비검속 희생자의 유족이었습니다.

이미 기사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3살 때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잃은 이 박사는 연좌제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97년부터 예비검속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폐기될 뻔한 1950년 경찰 공문서부터 예비검속 당시 상황이 기록된 미국의 비밀문서까지 발굴했습니다.

또, 학살의 주체인 해병대 지휘관들까지 직접 찾아가고, 당시 권력의 핵심이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에게 양민 학살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서 한 개인이 얼마나 처절하게 학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앵커]

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4·3을 입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 용기와 집념이 참 대단하다 싶더라고요.

이번 기획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게 예비검속자들이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증언자였어요.

이건 어떻게 보도하게 된건가요?

[기자]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 고민했던 부분 중 하나가 학살의 참상을 어떻게 가슴에 와닿게 전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70여년이나 흘렀다보니 증언해줄 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시면서 제3자인 유족을 통해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그때 문득 진상조사보고서에 나온 증언자들의 채록이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비검속은 군경의 기록이 턱없이 적다보니 대부분 증언에 의한 진상 규명이 많은데요.

이 중에서도 가장 섬뜩했던 게 약 500명의 예비검속자를 알몸으로 바다로 끌고갔다 빈 배로 돌아왔다는 증언이었습니다.

당시 제주항에서 경비 근무를 하던 국민방위군은 그날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본인이 목격한 상황을 털어놨는데요.

채록작업을 하신 분들께 수소문을 한 끝에 녹음 테이프를 구해 생생한 증언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앵커]

바다뿐만 아니라 제주공항 활주로에서도 집단 학살이 있었잖아요?

이미 이곳에서 유해가 발굴됐기 때문에 이 사실은 아시는 분도 많으실텐데요.

취재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한 사실도 있었을까요?

[기자]

네, 공항 학살은 4·3연구소에서 채록한 당시 공항 주변 주민들의 증언과 유족들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드렸는데요.

이번에 취재하면서 가슴 아팠던 게 2007년 유해 발굴이 있기 전 유족들이 직접 유해를 찾아다닌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도영 박사를 비롯해 예비검속으로 부모님이 모두 희생된 강창옥 할아버지까지, 이분들은 옛 공항 지적도를 들고 다니며 주민들의 증언을 모아 암매장된 곳이 어딘지 특정했다고 합니다.

이분들의 끈질긴 노력은 실제 유해 발굴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하는데요.

유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이런 노력을 했는지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앵커]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유족들까지, 예비검속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죠?

[기자]

네, 지난주 전 진화위 조사위원도 이 자리에 출연해 전해드렸지만 예비검속이 워낙 극비로 진행됐다보니 섯알오름 학살처럼 주민들에게 발각된 게 아니고선 대부분 피해를 추정만 할 뿐입니다.

2019년 발간된 4·3추가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예비검속 희생자는 566명으로 조사됐는데요.

이는 1950년 8월 1,120명이 제주에 수감됐었다는 미국 기록의 절반 수준입니다.

특히, 예비검속이 이뤄진 4개 경찰서 가운데 제주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 관내 희생자 유해는 아직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았는데요.

하다못해 불법적인 군법회의나 일반재판라도 받았으면 기록이 남아 명예라도 회복해볼 수 있을텐데,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은 이런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희생돼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유족들은 토로했습니다.

[앵커]

네, 예비검속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지속돼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앞으로 남은 과제, 또 무엇이 있을까요?

[기자]

제주4·3은 과거사 해결의 모범이라고들 하는데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그 이유를 또 한 번 알 수 있었습니다.

정부의 진상 규명 작업이 있기 전, 이도영 박사를 비롯한 유족 몇 명은 학살 지휘관을 직접 찾아갔는데요.

이들은 다짜고짜 손가락질을 하기 보단 당신도 누군가의 잘못된 명령에 따른 것 아니냐며, 당신은 죄가 없으니 진실만이라도 밝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희생자 위령제에 직접 와줄 것을 청했지만 그 지휘관은 끝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상이 끝이 아니라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가해 집단이 과거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습니다.

[앵커]

네, 예비검속과 관련해 앞으로 어떤 노력이 이어지는지 지속적인 취재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안 기자, 고맙습니다.

촬영기자:고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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