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고춘자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 생전에 잊지 못해”

입력 2023.04.13 (19:26) 수정 2023.04.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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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75주년을 맞은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일본 오사카에 있는 유족들의 가슴 아픈 증언을 들어봅니다.

첫 순서로 4·3 당시 외할머니와 두 외삼촌을 잃었지만 뒤엉킨 핏줄 때문에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고춘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오사카에 살았는데 그때 일본에서 전쟁이 일어났거든요, 2차대전. 아버지가 일하러 갔다가 공장이 타버렸어요. 그래서 제주도에 (갔어요.) 어머니는 반대했는데 아버지 의견으로. 제 4살 위 오빠가 있고 그래서 우리 네 식구하고 외삼촌 두 분하고 여섯 식구가 제주도로 갔다고 합니다."]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외할머니하고 같이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농사지었던 것으로 봐요. 어머니가 농사를 짓고 아버지는 그해 12월에 돌아가셨어요. 8살 때 학교에 입학했어요. 삼양국민학교 입학했는데 4월에 입학이잖아요. 그런데 4월 3일 날 4·3사건이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학교가 타버렸어요. 너무 저를 아껴주셨던 (작은) 외삼촌이 안 보였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해도 어머니도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나중에 보니까 산에 올라갔나 봐요. 폭도가족이라고 확실하게 얘기는 안 해도 좀 동네 사람들이 피해요. 우리가 곁에 있으면."]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큰외삼촌도 산에 갔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저하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갔어요. 산지천 쪽이었어요. 시멘트 건물(주정공장)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는데 외삼촌이 앉아계셨어요. (외삼촌이) 어머니(외할머니)를 부탁한다고 '응'하고 대답을 잘 못 하고 '응응'하면서 어머니가 울었어요. 금방 헤어졌는데 오면서 어머니는 길가에서 울었어요. 저도 같이 울었어요. 그때 헤어진 모습 그대로 (육지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나 봐요. 그 후에 작은외삼촌이 어디 사사라, 거기서 어떻게 총살당했다는 얘기를 어머니가 들었나봐요. 어머니가 거기를 찾아갔는데 흙을 파서 여러 사람이 죽어있었데요. (작은외삼촌과 같이 있던 사람이) 몸이 약해서 허리띠가 길어서 돌로 잘랐데요, 그것이 있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가서 그것 보고 찾았어요 시신을."]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아들 둘이 올라가고, 그렇게 산에 올라가니까 이건 뭐 폭도 집이라는 누명이 있었죠. (외할머니가 일본에서 가져온 그릇을 마당에 묻었는데) 파출소에서 산에 보내려고 묻었다 해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어요. 어머니가 뒤따라 갔나 봐요. 그런데 그 파출소 옆에 밭이 있는데 그 밭에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외할머니에게) 총을 쏘더래요. (어머니가) 파출소 가서 (시신) 내버리면 냄새나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이 치워드리겠다고 가서 할머니를 치우는데 울면 친척이라고 할까 봐 눈물을 머금고."]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50년 전에 남편 따라 일본 와서 양복 재단) 기술이 있으니까 여기 와보니 재봉하는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작은 방 하나 얻어서 재봉 일을 했어요. 야간학교를 지었어요 (집앞)중학교에. 나도 저기 가고 싶다 해도 가게가 있으니까 못 나갔어요. 64살에 거기 가기 시작해서 중학교 생활을 9년 했거든요. (야간학교 모임에서) 여기서 누군가 4·3사건에 대해 하는 분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니까 제가 손들어서 어머니 얘기를 했거든요. 야간학교 선생님이 저한테 그것을 한번 써보라고 그래서 저는 무서웠어요. 이런 말을 써도 되냐 하니까 지금은 괜찮다고. (공모전에) 내니까 거기서 당선됐어요. 어릴 때 기억을 잘 생각했다고."]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저희 어머님이 두 번째 어머니예요. 큰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가 젊을 때 돌아가시니까 어머니 호적에 올릴 수 없었어요. 어머니 딸이 아니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아픈 일을 겪었지만 그 보상을 받을 수가 없어요. 큰외삼촌 딸이 한병화예요. 그리고 그분이 완도 해녀로 가서 결혼해 형제는 몇 형제인지 몰라요. 아들 한 명은 봤어요. 그때 본 후로는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고 소식이 없는데 4·3사건 유족에 대한 이야기 나올 때는 이 아이라도 찾아서 전했으면 형제 부모가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그 아픔을 당한 어머니의 마음. 그것이 제 생전에 못 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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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증언] 고춘자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 생전에 잊지 못해”
    • 입력 2023-04-13 19:26:40
    • 수정2023-04-13 20:05:59
    뉴스7(제주)
[앵커]

75주년을 맞은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일본 오사카에 있는 유족들의 가슴 아픈 증언을 들어봅니다.

첫 순서로 4·3 당시 외할머니와 두 외삼촌을 잃었지만 뒤엉킨 핏줄 때문에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고춘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오사카에 살았는데 그때 일본에서 전쟁이 일어났거든요, 2차대전. 아버지가 일하러 갔다가 공장이 타버렸어요. 그래서 제주도에 (갔어요.) 어머니는 반대했는데 아버지 의견으로. 제 4살 위 오빠가 있고 그래서 우리 네 식구하고 외삼촌 두 분하고 여섯 식구가 제주도로 갔다고 합니다."]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외할머니하고 같이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농사지었던 것으로 봐요. 어머니가 농사를 짓고 아버지는 그해 12월에 돌아가셨어요. 8살 때 학교에 입학했어요. 삼양국민학교 입학했는데 4월에 입학이잖아요. 그런데 4월 3일 날 4·3사건이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학교가 타버렸어요. 너무 저를 아껴주셨던 (작은) 외삼촌이 안 보였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해도 어머니도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나중에 보니까 산에 올라갔나 봐요. 폭도가족이라고 확실하게 얘기는 안 해도 좀 동네 사람들이 피해요. 우리가 곁에 있으면."]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큰외삼촌도 산에 갔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저하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갔어요. 산지천 쪽이었어요. 시멘트 건물(주정공장)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는데 외삼촌이 앉아계셨어요. (외삼촌이) 어머니(외할머니)를 부탁한다고 '응'하고 대답을 잘 못 하고 '응응'하면서 어머니가 울었어요. 금방 헤어졌는데 오면서 어머니는 길가에서 울었어요. 저도 같이 울었어요. 그때 헤어진 모습 그대로 (육지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나 봐요. 그 후에 작은외삼촌이 어디 사사라, 거기서 어떻게 총살당했다는 얘기를 어머니가 들었나봐요. 어머니가 거기를 찾아갔는데 흙을 파서 여러 사람이 죽어있었데요. (작은외삼촌과 같이 있던 사람이) 몸이 약해서 허리띠가 길어서 돌로 잘랐데요, 그것이 있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가서 그것 보고 찾았어요 시신을."]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아들 둘이 올라가고, 그렇게 산에 올라가니까 이건 뭐 폭도 집이라는 누명이 있었죠. (외할머니가 일본에서 가져온 그릇을 마당에 묻었는데) 파출소에서 산에 보내려고 묻었다 해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어요. 어머니가 뒤따라 갔나 봐요. 그런데 그 파출소 옆에 밭이 있는데 그 밭에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외할머니에게) 총을 쏘더래요. (어머니가) 파출소 가서 (시신) 내버리면 냄새나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이 치워드리겠다고 가서 할머니를 치우는데 울면 친척이라고 할까 봐 눈물을 머금고."]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50년 전에 남편 따라 일본 와서 양복 재단) 기술이 있으니까 여기 와보니 재봉하는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작은 방 하나 얻어서 재봉 일을 했어요. 야간학교를 지었어요 (집앞)중학교에. 나도 저기 가고 싶다 해도 가게가 있으니까 못 나갔어요. 64살에 거기 가기 시작해서 중학교 생활을 9년 했거든요. (야간학교 모임에서) 여기서 누군가 4·3사건에 대해 하는 분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니까 제가 손들어서 어머니 얘기를 했거든요. 야간학교 선생님이 저한테 그것을 한번 써보라고 그래서 저는 무서웠어요. 이런 말을 써도 되냐 하니까 지금은 괜찮다고. (공모전에) 내니까 거기서 당선됐어요. 어릴 때 기억을 잘 생각했다고."]

[고춘자/미인정 4·3유족 : "저희 어머님이 두 번째 어머니예요. 큰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가 젊을 때 돌아가시니까 어머니 호적에 올릴 수 없었어요. 어머니 딸이 아니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아픈 일을 겪었지만 그 보상을 받을 수가 없어요. 큰외삼촌 딸이 한병화예요. 그리고 그분이 완도 해녀로 가서 결혼해 형제는 몇 형제인지 몰라요. 아들 한 명은 봤어요. 그때 본 후로는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고 소식이 없는데 4·3사건 유족에 대한 이야기 나올 때는 이 아이라도 찾아서 전했으면 형제 부모가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그 아픔을 당한 어머니의 마음. 그것이 제 생전에 못 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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