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된 희생자만 1,865명…서산·태안 집단학살 유해 ‘세상 밖으로’

입력 2023.05.1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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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개토제.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개토제.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충남 서산과 태안지역에서 해군과 경찰에 의해 석 달여 기간 동안 서산과 태안 일대에서 읍과 면마다 최소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살해됐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학살 희생자는 모두 1,865명. 기록에 빠진 사람까지 더하면 실제 희생자는 2,000명을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정부 판단입니다. 7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유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전세 역전 후 벌어진 학살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며 전세가 뒤집어졌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고, 10월에는 평양에 이어 압록강까지 국군이 진격했습니다.

국군이 승기를 잡고 있던 1950년 10월 8일,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대한민국 해군이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상륙한 해군의 총부리는 인민군이 아닌 마을 주민을 향했습니다.

서산 집단학살 유해매장 추정지.서산 집단학살 유해매장 추정지.

■3등급으로 엇갈린 생사

해군이 상륙한 직후 서산경찰서와 태안경찰서, 그리고 관할 지서에서는 분류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인민군에 얼마나 협조했느냐를 ‘A, B, C’ 3등급으로 나눠 분류했고 여기서 처형으로 분류된 마을 주민들은 마을 외곽 교통호 등에서 집단으로 살해됐습니다.

특히 경찰은 분류작업에 우익단체로 구성된 치안대를 공무에 투입했고, 마구잡이 분류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살이 벌어질 당시에는 서산과 태안은 이미 국군이 점령해 ‘비교전지역’으로 분류된 곳이었습니다.

정부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비교전상태에서 단지 부역 혐의 또는 비자발적 부역 혐의만으로 비무장, 무저항의 민간인을 즉결처형(Summary execution)한 행위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야만적 행위이며 실체법적으로나 절차법적으로나 불법행위였다. 동시에 본 사건의 책임은 당시 군경을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었던 정부에게 귀속된다.”
2008년 12. 2 진실화해위원회 집단희생규명위원회


■ '사적 감정에 의한 살해'

서산과 태안 집단학살사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는 ‘사적 감정에 의한 살해’가 대규모로 발생했다고 기술했습니다.

6·25 전쟁이 벌어진 직후 국군과 경찰이 후퇴하며 민간인을 학살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습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인민군 점령기 당시 좌익세력이 우익인사들을 학살하는 문제를 촉발했고, 국군 수복 후 부역 혐의자에 대한 재보복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산, 태안에 해군이 상륙한 뒤 좌익세력에 희생된 유가족을 주축으로 치안대와 우익단체가 부역자 처리에 개입했고, 여기서 사적감정에 의해 등급이 나눠지고 마구잡이 처형과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신원 기록 심사보고서

학살이 끝나고 30년 뒤인 1980년 9월 1일.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가 추진한 신원 기록 일제정비계획이 전국의 모든 경찰서에서 시행됐습니다.

서산경찰서도 한 달여 기간에 걸쳐 신원 기록 일제정비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신원기록심사보고’ 문서로 남았습니다.

전쟁은 30년 전에 끝났지만 6·25 부역자, 자수자 명단, 6·25 처형자와 좌익인 처형자 명단 등 16개 문서와 대공(對共)에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명부가 작성돼 기록됐습니다.

심지어 1980년 당시까지 위해도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신원 기록편람에 담아 활용했습니다.

서산경찰서가 남긴 신원 기록 심사보고 연명부에는 2,499명의 이름이 적혀있고 이 가운데 1,785명은 전쟁 당시 서산에서 부역 혐의로 처형된 사람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처형된 사람 중 ‘분류번호 3-8’, 처형됐지만, 부역 사실이 없거나 부역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자가 312명에 달했습니다.

경찰 스스로도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붙잡아 살해했다'는 내용이 문서로 남은 겁니다.

2021년 유족회가 희생자 유해 시굴 당시 발견된 정강이뼈.2021년 유족회가 희생자 유해 시굴 당시 발견된 정강이뼈.

■진실규명 이후 15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서산과 태안지역 집단학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군경과 지자체에 권고한 날은 2008년 12월 2일입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2023년 5월 10일 집단학살로 숨진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발굴이 시작됐습니다.

학살지에서 희생자들을 덮어놨던 흙을 걷어내고 유해를 수습하는 작업이 진실규명 결정으로부터 5,273일이나 지나고 나서야 이뤄진 겁니다.

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개토제.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개토제.

고령의 희생자 유족들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한 달여에 걸쳐 유해발굴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발굴지역은 서산시 갈산리 봉화산 교통호 일대입니다.

200㎡ 남짓한 땅에 2,000여 명 이상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 발굴에 앞서 시굴작업에서도 땅을 일부만 파 내려가도 정강이뼈와 유해들이 수습됐는데, 앞으로 발굴에서 얼마나 많은 유해가 나올지 유족들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2기 위원회는 “희생자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렸던 20대에서 40대 남성들이었고, 여성도 일부 포함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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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확인된 희생자만 1,865명…서산·태안 집단학살 유해 ‘세상 밖으로’
    • 입력 2023-05-11 13: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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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개토제.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충남 서산과 태안지역에서 해군과 경찰에 의해 석 달여 기간 동안 서산과 태안 일대에서 읍과 면마다 최소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살해됐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학살 희생자는 모두 1,865명. 기록에 빠진 사람까지 더하면 실제 희생자는 2,000명을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정부 판단입니다. 7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유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전세 역전 후 벌어진 학살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며 전세가 뒤집어졌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고, 10월에는 평양에 이어 압록강까지 국군이 진격했습니다.

국군이 승기를 잡고 있던 1950년 10월 8일,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대한민국 해군이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상륙한 해군의 총부리는 인민군이 아닌 마을 주민을 향했습니다.

서산 집단학살 유해매장 추정지.
■3등급으로 엇갈린 생사

해군이 상륙한 직후 서산경찰서와 태안경찰서, 그리고 관할 지서에서는 분류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인민군에 얼마나 협조했느냐를 ‘A, B, C’ 3등급으로 나눠 분류했고 여기서 처형으로 분류된 마을 주민들은 마을 외곽 교통호 등에서 집단으로 살해됐습니다.

특히 경찰은 분류작업에 우익단체로 구성된 치안대를 공무에 투입했고, 마구잡이 분류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살이 벌어질 당시에는 서산과 태안은 이미 국군이 점령해 ‘비교전지역’으로 분류된 곳이었습니다.

정부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비교전상태에서 단지 부역 혐의 또는 비자발적 부역 혐의만으로 비무장, 무저항의 민간인을 즉결처형(Summary execution)한 행위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야만적 행위이며 실체법적으로나 절차법적으로나 불법행위였다. 동시에 본 사건의 책임은 당시 군경을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었던 정부에게 귀속된다.”
2008년 12. 2 진실화해위원회 집단희생규명위원회


■ '사적 감정에 의한 살해'

서산과 태안 집단학살사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는 ‘사적 감정에 의한 살해’가 대규모로 발생했다고 기술했습니다.

6·25 전쟁이 벌어진 직후 국군과 경찰이 후퇴하며 민간인을 학살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습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인민군 점령기 당시 좌익세력이 우익인사들을 학살하는 문제를 촉발했고, 국군 수복 후 부역 혐의자에 대한 재보복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산, 태안에 해군이 상륙한 뒤 좌익세력에 희생된 유가족을 주축으로 치안대와 우익단체가 부역자 처리에 개입했고, 여기서 사적감정에 의해 등급이 나눠지고 마구잡이 처형과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신원 기록 심사보고서

학살이 끝나고 30년 뒤인 1980년 9월 1일.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가 추진한 신원 기록 일제정비계획이 전국의 모든 경찰서에서 시행됐습니다.

서산경찰서도 한 달여 기간에 걸쳐 신원 기록 일제정비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신원기록심사보고’ 문서로 남았습니다.

전쟁은 30년 전에 끝났지만 6·25 부역자, 자수자 명단, 6·25 처형자와 좌익인 처형자 명단 등 16개 문서와 대공(對共)에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명부가 작성돼 기록됐습니다.

심지어 1980년 당시까지 위해도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신원 기록편람에 담아 활용했습니다.

서산경찰서가 남긴 신원 기록 심사보고 연명부에는 2,499명의 이름이 적혀있고 이 가운데 1,785명은 전쟁 당시 서산에서 부역 혐의로 처형된 사람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처형된 사람 중 ‘분류번호 3-8’, 처형됐지만, 부역 사실이 없거나 부역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자가 312명에 달했습니다.

경찰 스스로도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붙잡아 살해했다'는 내용이 문서로 남은 겁니다.

2021년 유족회가 희생자 유해 시굴 당시 발견된 정강이뼈.
■진실규명 이후 15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서산과 태안지역 집단학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군경과 지자체에 권고한 날은 2008년 12월 2일입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2023년 5월 10일 집단학살로 숨진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발굴이 시작됐습니다.

학살지에서 희생자들을 덮어놨던 흙을 걷어내고 유해를 수습하는 작업이 진실규명 결정으로부터 5,273일이나 지나고 나서야 이뤄진 겁니다.

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개토제.
고령의 희생자 유족들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한 달여에 걸쳐 유해발굴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발굴지역은 서산시 갈산리 봉화산 교통호 일대입니다.

200㎡ 남짓한 땅에 2,000여 명 이상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 발굴에 앞서 시굴작업에서도 땅을 일부만 파 내려가도 정강이뼈와 유해들이 수습됐는데, 앞으로 발굴에서 얼마나 많은 유해가 나올지 유족들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2기 위원회는 “희생자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렸던 20대에서 40대 남성들이었고, 여성도 일부 포함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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