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광주 첫 공립학교 교장은 관찰사…1896년 시작된 교육도시의 역사는?”
입력 2023.06.07 (14:01)
수정 2023.06.0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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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j7bYWtvPeRg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광주를 교육 도시라고 합니다. 지금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서는 교육도시 광주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광주가 교육 도시가 될 수 있었던 출발이, 1896년 사마재에서 출발했던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입니다. 지금 서석초등학교인데요. 오늘은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이야기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윤주성: 1896년에 광주에 근대학교가 세워졌다니까 놀라운데요. 120년도 훨씬 지난 것 아닌가 싶은데 1896년에 근대학교가 세워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 노성태: 갑오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졌던 날인데요. 그 이전의 교육은 서당이라든가 향교, 서원, 성균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로 유교 이념이 주된 교육의 내용이었고 또 유교 경전이 주요 교과서였는데요. 고종은 1895년 2월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덕·체·지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는 그래서 교육으로 나라를 튼튼히 세워 나가자는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 윤주성: 덕·체·지, 세 가지를 기르자는 교육 강령이 교육입국조서에 담긴 내용인데 그 발표 이후 상황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 노성태: 교육입국조서 이후에 고종이 칙령 145호로 소학교령이라고 하는 법률이 반포가 됐고요. 이 법령에 의거해서 1895년 서울의 한성 사범학교가 설립되고 그리고 본과와 속성과를 두었는데 선생님을 양성하는 본과는 수업 연한은 2년 그리고 속성과는 6개월이었다고 합니다. 6개월 속성과 졸업생들이 한성부를 비롯한 전국 13개 도의 도청 소재지에 파견이 되었고 그래서 1896년 도청 소재지였던 광주에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서두에 말씀드린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지금의 서석초등학교였습니다.
◇ 윤주성: 1896년 설립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이 학교가 지금 서석초등학교라고 하셨는데요. 현재 장소와 건물은 물론 아니겠지요?
◆ 노성태: 남도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가 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 1896년 11월 말씀드렸던 것처럼 처음에는 교사를 짓지 못하고 향교에 딸린 사마재라고 하는 건물을 빌려서 개교를 하게 됩니다.

교장은 전라남도 관찰사가 겸임했고요. 교사는 한성사범학교 아까 속성과 출신 조한설이라고 하는 분이셨습니다. 지금 광주공원 입구에서 향교 쪽으로 올라가면 어린이놀이터가 있고 또 어린이헌장 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장소에 있었던 건물이 아까 사마재 건물이었는데요. 지금은 없습니다. 사마재라고 하는 건물은 과거 1차 시험이었던 생원진사시 합격했던 유생들이 모여서 2차 대과를 준비하는 학교였습니다.
◇ 윤주성: 사마재에서 시작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의 초기 모습은 어땠을까요?
◆ 노성태: 학교 운영을 맡은 전라남도 관찰부조차 독립 건물이 아닌 광주목 하나를 빌려 쓰고 있었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새 학교를 지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교에 딸렸던 사마재를 임시 교사로 사용을 했는데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학비, 학용품 전부 국가에서 지급하는 공짜였지만 2년이 지난 1898년 말까지 한 명의 학생도 모집이 안 되고 있었습니다.
◇ 윤주성: 사마재를 빌려 개교한 이후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학생이 없었다는데 궁금하네요.
◆ 노성태: 초기에는 학생 모집이 어려웠지만 10여 년 후가 되면 불어난 학생 수를 감당할 수 없어서 1907년이 되면 옛날 읍성이 있었고 지금은 전일빌딩 앞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새 교사를 짓고 옮겨가게 됩니다.

이때 학교는 1906년에 보통학교령에 의해서 학교 이름이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에서 광주 공립보통학교 줄여서 광주 보통학교로 이렇게 이름을 바꾸게 되고 그리고 수업 기간도 공립소학교 시절에 3년제에서 4년제로 늘어나게 됩니다. 새로운 학교가 만들어지면서 학생 수가 이제 넘쳐나게 됐고 교육 도시 광주의 힘찬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 윤주성: 당시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보도까지 됐다고 하던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1922년 4월 24일 자 보도인데요.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하염없이 우는 비극이 연출됐다는 기사입니다. 살펴보면 이런 것이거든요. 광주 공립보통학교 너른 마당에서 6~7세가량 된 어린아이 400명의 울음소리가 낭자하여 비극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금번 학기에 그 학교에 입학하려고 지원서를 제출했다가 학교의 수용 능력 부족으로 입학을 못 하게 되자 돌아가게 되는 어린아이들이 우는 곳이라더라.

그러니까 100년 전의 기사인데 당시 교육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기사이지만 "참, 교육 환경이 열악했구나" 이런 것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윤주성: 전일빌딩 앞 정도 위치였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학교가 언제 현재 위치인 서석동으로 옮겨졌나요?
◆ 노성태: 전일빌딩 앞으로 옮긴 20년 후인 1927년 지금의 서석초등학교와 서석동 14-1번지인데요. 이쪽으로 옮기게 됩니다. 읍성 앞 전일빌딩 앞에 위치했던 보통학교가 서석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금남로 건설과 관계가 있습니다. 1927년 금남로가 만들어지면서 학교 부지의 상당수가 도로로 편입됐고 그리고 도로의 소음 때문에 옮겨가게 된 것이지요.
◇ 윤주성: 서석초등학교의 이름이 많이 바뀌었다는데 이름을 통해서도 당시 시대상을 살필 수 있다고요?
◆ 노성태: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에서 출발해서 공립광주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리고 1938년에는 광주서석공립신상소학교, 서석공립국민학교그리고 지금의 서석초등학교로 1996년 이름을 바꾸게 되는 것이지요. 1941년 신상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뀌게 되는데 국민학교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을 쓰잖아요. 이때 국민학교라고 하는 이름에는 따라서 35년 제국주의 망령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서 일제 잔재 청산을 기치로 내건 김영삼 정부에 와서야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아무튼 부끄럽게도 일제 잔재를 1995년까지 달고 온 셈이지요.
◇ 윤주성: 광주 근대 교육의 출발이 된 서석초등학교가 한때 1만여 명이 넘는 학생이 다녔다고 하던데 지금 모습은 어떨까요?
◆ 노성태: 학교 운동장에 가면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그 기념비 받침돌에 보면 1896년 1996년 이렇게 새겨져 있는데 아무튼 1960년대 한때 학생 수가 1만 명이 넘는 학교였는데 지금은 200여 명의 초미니 학교가 되어 있습니다. 도심이 텅 빈 공동화 현상의 결과라고 생각을 합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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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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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광주를 교육 도시라고 합니다. 지금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서는 교육도시 광주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광주가 교육 도시가 될 수 있었던 출발이, 1896년 사마재에서 출발했던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입니다. 지금 서석초등학교인데요. 오늘은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이야기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윤주성: 1896년에 광주에 근대학교가 세워졌다니까 놀라운데요. 120년도 훨씬 지난 것 아닌가 싶은데 1896년에 근대학교가 세워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 노성태: 갑오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졌던 날인데요. 그 이전의 교육은 서당이라든가 향교, 서원, 성균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로 유교 이념이 주된 교육의 내용이었고 또 유교 경전이 주요 교과서였는데요. 고종은 1895년 2월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덕·체·지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는 그래서 교육으로 나라를 튼튼히 세워 나가자는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 윤주성: 덕·체·지, 세 가지를 기르자는 교육 강령이 교육입국조서에 담긴 내용인데 그 발표 이후 상황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 노성태: 교육입국조서 이후에 고종이 칙령 145호로 소학교령이라고 하는 법률이 반포가 됐고요. 이 법령에 의거해서 1895년 서울의 한성 사범학교가 설립되고 그리고 본과와 속성과를 두었는데 선생님을 양성하는 본과는 수업 연한은 2년 그리고 속성과는 6개월이었다고 합니다. 6개월 속성과 졸업생들이 한성부를 비롯한 전국 13개 도의 도청 소재지에 파견이 되었고 그래서 1896년 도청 소재지였던 광주에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서두에 말씀드린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지금의 서석초등학교였습니다.
◇ 윤주성: 1896년 설립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이 학교가 지금 서석초등학교라고 하셨는데요. 현재 장소와 건물은 물론 아니겠지요?
◆ 노성태: 남도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가 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 1896년 11월 말씀드렸던 것처럼 처음에는 교사를 짓지 못하고 향교에 딸린 사마재라고 하는 건물을 빌려서 개교를 하게 됩니다.

교장은 전라남도 관찰사가 겸임했고요. 교사는 한성사범학교 아까 속성과 출신 조한설이라고 하는 분이셨습니다. 지금 광주공원 입구에서 향교 쪽으로 올라가면 어린이놀이터가 있고 또 어린이헌장 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장소에 있었던 건물이 아까 사마재 건물이었는데요. 지금은 없습니다. 사마재라고 하는 건물은 과거 1차 시험이었던 생원진사시 합격했던 유생들이 모여서 2차 대과를 준비하는 학교였습니다.
◇ 윤주성: 사마재에서 시작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의 초기 모습은 어땠을까요?
◆ 노성태: 학교 운영을 맡은 전라남도 관찰부조차 독립 건물이 아닌 광주목 하나를 빌려 쓰고 있었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새 학교를 지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교에 딸렸던 사마재를 임시 교사로 사용을 했는데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학비, 학용품 전부 국가에서 지급하는 공짜였지만 2년이 지난 1898년 말까지 한 명의 학생도 모집이 안 되고 있었습니다.
◇ 윤주성: 사마재를 빌려 개교한 이후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학생이 없었다는데 궁금하네요.
◆ 노성태: 초기에는 학생 모집이 어려웠지만 10여 년 후가 되면 불어난 학생 수를 감당할 수 없어서 1907년이 되면 옛날 읍성이 있었고 지금은 전일빌딩 앞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새 교사를 짓고 옮겨가게 됩니다.

이때 학교는 1906년에 보통학교령에 의해서 학교 이름이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에서 광주 공립보통학교 줄여서 광주 보통학교로 이렇게 이름을 바꾸게 되고 그리고 수업 기간도 공립소학교 시절에 3년제에서 4년제로 늘어나게 됩니다. 새로운 학교가 만들어지면서 학생 수가 이제 넘쳐나게 됐고 교육 도시 광주의 힘찬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 윤주성: 당시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보도까지 됐다고 하던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1922년 4월 24일 자 보도인데요.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하염없이 우는 비극이 연출됐다는 기사입니다. 살펴보면 이런 것이거든요. 광주 공립보통학교 너른 마당에서 6~7세가량 된 어린아이 400명의 울음소리가 낭자하여 비극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금번 학기에 그 학교에 입학하려고 지원서를 제출했다가 학교의 수용 능력 부족으로 입학을 못 하게 되자 돌아가게 되는 어린아이들이 우는 곳이라더라.

그러니까 100년 전의 기사인데 당시 교육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기사이지만 "참, 교육 환경이 열악했구나" 이런 것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윤주성: 전일빌딩 앞 정도 위치였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학교가 언제 현재 위치인 서석동으로 옮겨졌나요?
◆ 노성태: 전일빌딩 앞으로 옮긴 20년 후인 1927년 지금의 서석초등학교와 서석동 14-1번지인데요. 이쪽으로 옮기게 됩니다. 읍성 앞 전일빌딩 앞에 위치했던 보통학교가 서석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금남로 건설과 관계가 있습니다. 1927년 금남로가 만들어지면서 학교 부지의 상당수가 도로로 편입됐고 그리고 도로의 소음 때문에 옮겨가게 된 것이지요.
◇ 윤주성: 서석초등학교의 이름이 많이 바뀌었다는데 이름을 통해서도 당시 시대상을 살필 수 있다고요?
◆ 노성태: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에서 출발해서 공립광주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리고 1938년에는 광주서석공립신상소학교, 서석공립국민학교그리고 지금의 서석초등학교로 1996년 이름을 바꾸게 되는 것이지요. 1941년 신상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뀌게 되는데 국민학교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을 쓰잖아요. 이때 국민학교라고 하는 이름에는 따라서 35년 제국주의 망령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서 일제 잔재 청산을 기치로 내건 김영삼 정부에 와서야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아무튼 부끄럽게도 일제 잔재를 1995년까지 달고 온 셈이지요.
◇ 윤주성: 광주 근대 교육의 출발이 된 서석초등학교가 한때 1만여 명이 넘는 학생이 다녔다고 하던데 지금 모습은 어떨까요?
◆ 노성태: 학교 운동장에 가면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그 기념비 받침돌에 보면 1896년 1996년 이렇게 새겨져 있는데 아무튼 1960년대 한때 학생 수가 1만 명이 넘는 학교였는데 지금은 200여 명의 초미니 학교가 되어 있습니다. 도심이 텅 빈 공동화 현상의 결과라고 생각을 합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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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성 기자 y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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