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협약은 장식? ‘정리해고 반대=불법파업’ 공식 그대로 [일터엔]

입력 2023.06.17 (12:01) 수정 2023.06.1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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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쌍용차 파업’ 손해배상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14년 만입니다. 대법원은 노조가 내야 할 배상금 33억 원이 과도하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습니다.

이번 판결은 배상액 산정이 잘못됐다는 것이지 배상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은 ‘정리해고 반대=불법 파업’이란 종전의 판례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앞으로 배상액이 깎이더라도 금속노조는 수십억 원을 지급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효된 국제노동기구 ILO 협약 87호는 ‘합법 파업의 범위’를 대법원보다 넓게 보고 있습니다. 정리해고 반대 등 경제적 정치파업도 허용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 협약은 단순 참고사항이 아니고,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한국이 ILO 협약 87호를 비준한 이상,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도록 기존 판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 당시 모습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 당시 모습
■ ‘정리해고 반대=불법 파업’ 재확인

2009년 5월 쌍용차 노동자들은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두 달 넘게 파업했습니다. 파업의 목적은 ‘정리해고 반대’였습니다. 당시 쌍용차는 희망퇴직 등 구조조정을 하며 976명을 정리해고 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사측은 조업 중단으로 손실이 발생했다며, 쌍용차 파업을 지원한 금속노조를 상대로 100억 원을 청구했습니다. 그리고 14년 만에 대법원 판단이 나왔습니다.

재판 쟁점 중 하나는 쌍용차 파업이 정당한 쟁의행위인지 였습니다.

법원이 파업의 정당성을 우선 따지는 이유는 정당한 파업에 대해선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이 허용된다면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노동조합법 제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1심과 2심에선 파업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대법원도 그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금속노조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배상금 산정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파업이 정당하려면 그 목적과 수단, 절차가 모두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법원은 특히 정리해고 반대는 파업의 정당한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이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입니다.

대법원 판례는 “구조조정 실시 여부는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으로 원칙적으로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실시로 인해 근로자 지위나 근로조건의 변경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하더라도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정리해고 반대 파업=불법’은 거의 공식처럼 적용됩니다. 2016년에도 법원은 철도노조가 구조조정을 반대하며 벌인 2009년 파업에 대해 불법이라며, 사측에 배상을 명령한 적이 있습니다. 합법 파업은 임금이나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 파업으로 사실상 국한되는 게 현실입니다.

■ ‘국내법 효력’ ILO 협약과 충돌?

그런데 이러한 대법원 판례가 지난해 4월 발효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ILO 핵심협약 87호와 충돌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부는 2021년 국회 동의를 거쳐 협약 87호를 비준했습니다. 87호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으로 협약문 자체는 다소 추상적입니다.

협약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준국들이 협약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감독하는 기구,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가 내린 결정들입니다. 결사의 자유위원회가 개별 진정 사건에 내린 결정은 협약 87호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 인정됩니다.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는 대법원보다 합법 파업의 범위를 훨씬 더 넓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조합원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사회적 사항에 관해선 파업이 전면적으로 허용돼야 한다고 봅니다.

“파업권은 단체협약 체결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노동분쟁으로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와 그 단체는 필요하다면 조합원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사항과 사회적 사항에 관한 자신의 불만을 더 넓은 맥락에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결사의 자유 위원회 판정례집[2018], 766항).

여기에는 정리해고에 관한 파업도 포함된다고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실제 ILO는 과거 우리나라에 관한 사건에서 구조조정을 반대한 철도노조의 파업은 허용돼야 한다고 본 바 있습니다. 국제노동기준과 대법원의 법 해석이 충돌하는 상황인 겁니다.


■ “대법원 시각 수정할 필요 있어”

문제는 ILO 협약 87호가 단순한 참고 사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헌법 제6조 1항은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돼 있습니다. 즉, 협약 87호의 법적 지위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률과 같습니다.

따라서 행정부는 협약을 이행해야 할뿐더러 협약이 준수되지 않을 땐 노동자나 사용자 단체가 ILO에 진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사법부 역시 노동관계 법률을 해석할 때 협약 87호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은 연구보고서에서 기존 판례 입장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국제노동기준과 현행 노동법 체계를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법 해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ILO의 기본 입장은 우리 대법원이 쟁의행위의 목적에 대한 기본적 시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ILO는 순수 정치파업 및 권리분쟁 파업은 결사의 자유 원칙의 보호 범위 내에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ILO는 경제적·사회적 쟁점에 대한 정치파업과 동정(연대)파업 등이 결사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다고 보고 있으며, 주로 정치파업과 동정파업을 계기로 하는 총파업의 정당성도 긍정한다. (사법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결사의 자유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 비준과 노동법의 쟁점’ 중에서)

정부는 2021년 ILO 핵심 협약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며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을 통해 국격 및 국가 신인도 제고에 기여하게 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EUFTA 등 노동 조항이 담긴 자유무역협정 관련 분쟁 소지를 줄여 통상 리스크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도 밝혔습니다.

정부는 협약 이행 상황과 협약 이행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고서를 작성해 3년마다 ILO에 제출해야 합니다. 올해는 비준 3년 차로 그 첫번째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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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LO협약은 장식? ‘정리해고 반대=불법파업’ 공식 그대로 [일터엔]
    • 입력 2023-06-17 12:01:09
    • 수정2023-06-17 16:12:58
    주말엔

지난 15일 ‘쌍용차 파업’ 손해배상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14년 만입니다. 대법원은 노조가 내야 할 배상금 33억 원이 과도하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습니다.

이번 판결은 배상액 산정이 잘못됐다는 것이지 배상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은 ‘정리해고 반대=불법 파업’이란 종전의 판례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앞으로 배상액이 깎이더라도 금속노조는 수십억 원을 지급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효된 국제노동기구 ILO 협약 87호는 ‘합법 파업의 범위’를 대법원보다 넓게 보고 있습니다. 정리해고 반대 등 경제적 정치파업도 허용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 협약은 단순 참고사항이 아니고,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한국이 ILO 협약 87호를 비준한 이상,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도록 기존 판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 당시 모습 ■ ‘정리해고 반대=불법 파업’ 재확인

2009년 5월 쌍용차 노동자들은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두 달 넘게 파업했습니다. 파업의 목적은 ‘정리해고 반대’였습니다. 당시 쌍용차는 희망퇴직 등 구조조정을 하며 976명을 정리해고 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사측은 조업 중단으로 손실이 발생했다며, 쌍용차 파업을 지원한 금속노조를 상대로 100억 원을 청구했습니다. 그리고 14년 만에 대법원 판단이 나왔습니다.

재판 쟁점 중 하나는 쌍용차 파업이 정당한 쟁의행위인지 였습니다.

법원이 파업의 정당성을 우선 따지는 이유는 정당한 파업에 대해선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이 허용된다면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노동조합법 제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1심과 2심에선 파업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대법원도 그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금속노조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배상금 산정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파업이 정당하려면 그 목적과 수단, 절차가 모두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법원은 특히 정리해고 반대는 파업의 정당한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이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입니다.

대법원 판례는 “구조조정 실시 여부는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으로 원칙적으로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실시로 인해 근로자 지위나 근로조건의 변경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하더라도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정리해고 반대 파업=불법’은 거의 공식처럼 적용됩니다. 2016년에도 법원은 철도노조가 구조조정을 반대하며 벌인 2009년 파업에 대해 불법이라며, 사측에 배상을 명령한 적이 있습니다. 합법 파업은 임금이나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 파업으로 사실상 국한되는 게 현실입니다.

■ ‘국내법 효력’ ILO 협약과 충돌?

그런데 이러한 대법원 판례가 지난해 4월 발효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ILO 핵심협약 87호와 충돌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부는 2021년 국회 동의를 거쳐 협약 87호를 비준했습니다. 87호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으로 협약문 자체는 다소 추상적입니다.

협약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준국들이 협약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감독하는 기구,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가 내린 결정들입니다. 결사의 자유위원회가 개별 진정 사건에 내린 결정은 협약 87호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 인정됩니다.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는 대법원보다 합법 파업의 범위를 훨씬 더 넓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조합원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사회적 사항에 관해선 파업이 전면적으로 허용돼야 한다고 봅니다.

“파업권은 단체협약 체결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노동분쟁으로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와 그 단체는 필요하다면 조합원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사항과 사회적 사항에 관한 자신의 불만을 더 넓은 맥락에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결사의 자유 위원회 판정례집[2018], 766항).

여기에는 정리해고에 관한 파업도 포함된다고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실제 ILO는 과거 우리나라에 관한 사건에서 구조조정을 반대한 철도노조의 파업은 허용돼야 한다고 본 바 있습니다. 국제노동기준과 대법원의 법 해석이 충돌하는 상황인 겁니다.


■ “대법원 시각 수정할 필요 있어”

문제는 ILO 협약 87호가 단순한 참고 사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헌법 제6조 1항은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돼 있습니다. 즉, 협약 87호의 법적 지위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률과 같습니다.

따라서 행정부는 협약을 이행해야 할뿐더러 협약이 준수되지 않을 땐 노동자나 사용자 단체가 ILO에 진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사법부 역시 노동관계 법률을 해석할 때 협약 87호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은 연구보고서에서 기존 판례 입장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국제노동기준과 현행 노동법 체계를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법 해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ILO의 기본 입장은 우리 대법원이 쟁의행위의 목적에 대한 기본적 시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ILO는 순수 정치파업 및 권리분쟁 파업은 결사의 자유 원칙의 보호 범위 내에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ILO는 경제적·사회적 쟁점에 대한 정치파업과 동정(연대)파업 등이 결사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다고 보고 있으며, 주로 정치파업과 동정파업을 계기로 하는 총파업의 정당성도 긍정한다. (사법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결사의 자유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 비준과 노동법의 쟁점’ 중에서)

정부는 2021년 ILO 핵심 협약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며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을 통해 국격 및 국가 신인도 제고에 기여하게 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EUFTA 등 노동 조항이 담긴 자유무역협정 관련 분쟁 소지를 줄여 통상 리스크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도 밝혔습니다.

정부는 협약 이행 상황과 협약 이행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고서를 작성해 3년마다 ILO에 제출해야 합니다. 올해는 비준 3년 차로 그 첫번째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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