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뉴스K] ‘봉오동 전투 영웅’ 홍범도 장군…“공산주의 경력” 뭐길래?

입력 2023.08.29 (12:42) 수정 2023.08.30 (11:4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에 대한 파장이 갈수록 커지는 모양샙니다.

국방부는 독립운동 당시 홍 장군의 공산주의 활동 경력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봐야 할까요?

친절한뉴스, 오승목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홍범도 일지'의 한 구절입니다.

양순, 홍범도 장군의 장남이죠.

당시 열여섯 살 양순은 1908년 함경도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순국했습니다.

같은 해, 장군의 부인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습니다.

이후 1920년, 봉오동 전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 1차 대승리'로 기념했죠.

이 전투를 이끈 지휘관이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홍범도 장군입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대첩에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했고요.

이렇게, 가족 모두 평생 힘써온 독립, 홍 장군까지 1943년 사망하면서, 결국, 못 봤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순국 78년 만인 2021년에서야 우리나라로 봉환됐습니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돼있죠.

역대 정부마다 홍 장군을 기념했는데요.

이례적으로 건국훈장을 두 번 받았습니다.

첫 번째 대통령장은 196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두 번째 대한민국장은 문재인 대통령 때였습니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도 유해 봉환을 위해 노력했고요.

박근혜 정부 땐 해군의 1,800톤급 잠수함에 '홍범도함' 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8월이죠.

윤석열 정부는 홍 장군이 국내 호적이 없다면서, 천안 독립기념관의 주소죠, '독립기념관로 1'을 본적 주소로 선물하고, 가족관계등록부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어느 부분에서 논란이 된 걸까요?

먼저, 영상 보시죠.

9척 장신이란 말에 걸맞은 큰 키에 특유의 콧수염.

독립기념관에 공개된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입니다.

당시 나이 54살인데, 봉오동 전투 2년 뒤인 1922년 1월, 우리나라와 같은 아시아 식민지 대표들과 독립투쟁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장면입니다.

여운형 등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도 보이죠.

홍 장군은 특별히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지도자였던 레닌과 면담하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이 영상 반년 전쯤이죠.

1921년 6월, 지금의 중국 하얼빈에서 훨씬 북쪽인 러시아 스보보드니에서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 참변'이 벌어집니다.

당시 소련의 위성국가인 극동공화국 아무르주의 도시인 스보보드니는 러시아어로 자유를 뜻해 '자유시 참변'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독립군인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이 모여 통합을 논의하는데, 조건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 치안유지 등을 핑계로 독립군을 강제로 무장해제 시키려다 대한의용군과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상당수 사망자도 나왔죠.

이때 고려혁명군 계열이 극동공화국을 도왔고, 홍 장군도 함께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온 겁니다.

이 얘기는 2년 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할 때 보수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제기됐고, 학계에선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료는 없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국방부는 홍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 의회 중심의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자유시 참변 재판에서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하되, 이후 소련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달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는데요.

홍범도 장군,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 입당해 활동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약소민족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소련과 항일투쟁 공조는 불가피했다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홍 장군은 1937년 소련의 결정으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죠.

6.25 전쟁이나 북한 공산당과는 시기적으로 관련이 없고, 그보다 훨씬 전 시기 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학계 목소리도 나옵니다.

KBS 뉴스 오승목입니다.

영상편집:강지은/그래픽:민세홍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친절한 뉴스K] ‘봉오동 전투 영웅’ 홍범도 장군…“공산주의 경력” 뭐길래?
    • 입력 2023-08-29 12:42:17
    • 수정2023-08-30 11:41:03
    뉴스 12
[앵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에 대한 파장이 갈수록 커지는 모양샙니다.

국방부는 독립운동 당시 홍 장군의 공산주의 활동 경력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봐야 할까요?

친절한뉴스, 오승목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홍범도 일지'의 한 구절입니다.

양순, 홍범도 장군의 장남이죠.

당시 열여섯 살 양순은 1908년 함경도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순국했습니다.

같은 해, 장군의 부인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습니다.

이후 1920년, 봉오동 전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 1차 대승리'로 기념했죠.

이 전투를 이끈 지휘관이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홍범도 장군입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대첩에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했고요.

이렇게, 가족 모두 평생 힘써온 독립, 홍 장군까지 1943년 사망하면서, 결국, 못 봤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순국 78년 만인 2021년에서야 우리나라로 봉환됐습니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돼있죠.

역대 정부마다 홍 장군을 기념했는데요.

이례적으로 건국훈장을 두 번 받았습니다.

첫 번째 대통령장은 196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두 번째 대한민국장은 문재인 대통령 때였습니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도 유해 봉환을 위해 노력했고요.

박근혜 정부 땐 해군의 1,800톤급 잠수함에 '홍범도함' 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8월이죠.

윤석열 정부는 홍 장군이 국내 호적이 없다면서, 천안 독립기념관의 주소죠, '독립기념관로 1'을 본적 주소로 선물하고, 가족관계등록부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어느 부분에서 논란이 된 걸까요?

먼저, 영상 보시죠.

9척 장신이란 말에 걸맞은 큰 키에 특유의 콧수염.

독립기념관에 공개된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입니다.

당시 나이 54살인데, 봉오동 전투 2년 뒤인 1922년 1월, 우리나라와 같은 아시아 식민지 대표들과 독립투쟁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장면입니다.

여운형 등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도 보이죠.

홍 장군은 특별히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지도자였던 레닌과 면담하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이 영상 반년 전쯤이죠.

1921년 6월, 지금의 중국 하얼빈에서 훨씬 북쪽인 러시아 스보보드니에서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 참변'이 벌어집니다.

당시 소련의 위성국가인 극동공화국 아무르주의 도시인 스보보드니는 러시아어로 자유를 뜻해 '자유시 참변'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독립군인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이 모여 통합을 논의하는데, 조건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 치안유지 등을 핑계로 독립군을 강제로 무장해제 시키려다 대한의용군과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상당수 사망자도 나왔죠.

이때 고려혁명군 계열이 극동공화국을 도왔고, 홍 장군도 함께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온 겁니다.

이 얘기는 2년 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할 때 보수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제기됐고, 학계에선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료는 없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국방부는 홍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 의회 중심의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자유시 참변 재판에서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하되, 이후 소련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달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는데요.

홍범도 장군,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 입당해 활동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약소민족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소련과 항일투쟁 공조는 불가피했다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홍 장군은 1937년 소련의 결정으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죠.

6.25 전쟁이나 북한 공산당과는 시기적으로 관련이 없고, 그보다 훨씬 전 시기 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학계 목소리도 나옵니다.

KBS 뉴스 오승목입니다.

영상편집:강지은/그래픽:민세홍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2024 파리 올림픽 배너 이미지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