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고순행 할머니의 기억

입력 2023.09.14 (19:38) 수정 2023.09.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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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고순행 할머니는 4·3 당시 가족들을 모두 잃고 자신도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어린 나이에 홀로서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어머니, 아버지하고 위에 오빠, 언니, 동생 그러니까 4남매(같이 살았죠.) 공회당이란 곳에서 간이학교, 거기 열한 살까지 다니다 열한 살에 해방이 됐어. 3학년 때 해방되니까 또, 한글을 배우다 4·3사건 나니까 학교 다닐 수 있었어요?"]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열네 살에는 집도 다 불태워버리고 멍석 같은 것 안 타면 그것을 쳐서 의지하면서 살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계엄령이 내려졌어. 하루는 동서남북으로 싹 포위해서 군인들이 들어왔어요. 그냥 다 쏘아 죽인거야. 여섯 살난 동생이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아가' 소리도 못하고 '악'하는 소리 그치니까 죽어버린 거고, 동생은 '아가'하니까, 그 소리 그치니까 죽어버린 거예요. 나는 우리 가족들 죽을 때 죽지 않았어요. 총을 12방을 나한테 쏘아도 총을 안 맞았다고 이렇게 아까운 동생도 죽었는데 나도 동생하고 같이 죽어야죠. 쏘아달라고 해도 도무지 안 쏘는 거예요."]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9연대 함덕(에 주둔한) 군인들 지독한 군인들이었어요. 함덕 데려가니 날이 어두운 거예요. 밤에는 학교에, 초등학교 그 마루에 하룻밤 자고 함덕초등학교 조금 동쪽으로 가면 평사동, 거기하고 학교 사이에 데려갔어요. 14명이었어요. 총을 먼 곳에서 쏘는 것은 '팡팡' 소리가 나는데, 나무에 딱딱 때리는 소리처럼 그 소리만 귀에 들려오는데 (기절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다음에는 몰라요. (깨어나 보니)여기로 피가 난 것이, 눈을 한쪽 못 떴는데 그 피가 내려와서 눈에 들어가서 눈동자를 막은 거예요. 그런데 추우니까 그게 굳었어. 너무 추워서 살 수가 없으니까. (같이 잡혀간)우리 동네 아주머니가 아기 업고 갔는데 아기 위에 씌운 것을 그것을 내가 벗긴 거라. 그것이 가장 큰 죄를 지었어요. 그 아기 덮었던 것을, 엄마는 엎어지고 아기는 위에 있는데, 아기 위의 것을 가져다 머리에다 뒤집어 써서, 송장 틈으로 막 들어간 거예요. (추위에)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이틀 밤 지나고 군인이 와서)이 아이는 산에서도 총을 12방을 쏘아도 안 죽었는데, 또 살았네. 조그만한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았는데 저 아이를 죽입니까 어떡합니까. 물으니 그 대장이 "천명이야, 그 아이 데려와 봐라." (군인들이 의사한테 데려가서)여기를 째서 나왔다 하면서 총알을 뺀 거예요."]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내가 살아있다는 얘기 듣고) 우리 고모가 왔어요. 대장한테 내가 고모니까 집에 데려가면 안 됩니까. 오촌 고모하고도 살아보고 함덕에서. 살아봐도 못 살겠어. 너무 서러운 거에요. 이야, 우리 식구 죽고 나 혼자 살았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살았으면 절대로 이렇게 구박은 안 할 건데, 그때 살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만. 다섯 살 위 오빠는 그때 저 동척회사, 술공장 했던데 잡아놓았다가 배로 실어갈 때 인천소년형무소에 가서 행방불명이고."]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20년 전에)용강에 가족묘지 사서 거기에 (가족들) 잘 모셨어요. 오빠도 옷 한 벌 해놓고 비석 하나 세우고 사람 죽는 것도 참 어려운 거라. 나 살아난 것 생각하면, 왜 송장 틈에 가서 산 게 무섭지 않겠어요? 나 살아온 것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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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증언]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고순행 할머니의 기억
    • 입력 2023-09-14 19:38:56
    • 수정2023-09-15 16:44:13
    뉴스7(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고순행 할머니는 4·3 당시 가족들을 모두 잃고 자신도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어린 나이에 홀로서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어머니, 아버지하고 위에 오빠, 언니, 동생 그러니까 4남매(같이 살았죠.) 공회당이란 곳에서 간이학교, 거기 열한 살까지 다니다 열한 살에 해방이 됐어. 3학년 때 해방되니까 또, 한글을 배우다 4·3사건 나니까 학교 다닐 수 있었어요?"]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열네 살에는 집도 다 불태워버리고 멍석 같은 것 안 타면 그것을 쳐서 의지하면서 살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계엄령이 내려졌어. 하루는 동서남북으로 싹 포위해서 군인들이 들어왔어요. 그냥 다 쏘아 죽인거야. 여섯 살난 동생이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아가' 소리도 못하고 '악'하는 소리 그치니까 죽어버린 거고, 동생은 '아가'하니까, 그 소리 그치니까 죽어버린 거예요. 나는 우리 가족들 죽을 때 죽지 않았어요. 총을 12방을 나한테 쏘아도 총을 안 맞았다고 이렇게 아까운 동생도 죽었는데 나도 동생하고 같이 죽어야죠. 쏘아달라고 해도 도무지 안 쏘는 거예요."]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9연대 함덕(에 주둔한) 군인들 지독한 군인들이었어요. 함덕 데려가니 날이 어두운 거예요. 밤에는 학교에, 초등학교 그 마루에 하룻밤 자고 함덕초등학교 조금 동쪽으로 가면 평사동, 거기하고 학교 사이에 데려갔어요. 14명이었어요. 총을 먼 곳에서 쏘는 것은 '팡팡' 소리가 나는데, 나무에 딱딱 때리는 소리처럼 그 소리만 귀에 들려오는데 (기절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다음에는 몰라요. (깨어나 보니)여기로 피가 난 것이, 눈을 한쪽 못 떴는데 그 피가 내려와서 눈에 들어가서 눈동자를 막은 거예요. 그런데 추우니까 그게 굳었어. 너무 추워서 살 수가 없으니까. (같이 잡혀간)우리 동네 아주머니가 아기 업고 갔는데 아기 위에 씌운 것을 그것을 내가 벗긴 거라. 그것이 가장 큰 죄를 지었어요. 그 아기 덮었던 것을, 엄마는 엎어지고 아기는 위에 있는데, 아기 위의 것을 가져다 머리에다 뒤집어 써서, 송장 틈으로 막 들어간 거예요. (추위에)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이틀 밤 지나고 군인이 와서)이 아이는 산에서도 총을 12방을 쏘아도 안 죽었는데, 또 살았네. 조그만한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았는데 저 아이를 죽입니까 어떡합니까. 물으니 그 대장이 "천명이야, 그 아이 데려와 봐라." (군인들이 의사한테 데려가서)여기를 째서 나왔다 하면서 총알을 뺀 거예요."]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내가 살아있다는 얘기 듣고) 우리 고모가 왔어요. 대장한테 내가 고모니까 집에 데려가면 안 됩니까. 오촌 고모하고도 살아보고 함덕에서. 살아봐도 못 살겠어. 너무 서러운 거에요. 이야, 우리 식구 죽고 나 혼자 살았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살았으면 절대로 이렇게 구박은 안 할 건데, 그때 살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만. 다섯 살 위 오빠는 그때 저 동척회사, 술공장 했던데 잡아놓았다가 배로 실어갈 때 인천소년형무소에 가서 행방불명이고."]

[고순행/4·3 후유장애인 : "(20년 전에)용강에 가족묘지 사서 거기에 (가족들) 잘 모셨어요. 오빠도 옷 한 벌 해놓고 비석 하나 세우고 사람 죽는 것도 참 어려운 거라. 나 살아난 것 생각하면, 왜 송장 틈에 가서 산 게 무섭지 않겠어요? 나 살아온 것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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