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인천상륙작전, 역전의 그날

입력 2023.09.16 (08:19) 수정 2023.09.1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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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50 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 인민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두 달 만에 낙동강 이남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을 점령했죠.

개전 초기부터 속절없이 밀리던 국군이 마침내, 반격의 기회를 잡은 건, 바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6.25 전쟁의 판세를 뒤바꾼 인천 상륙작전은 1950 년 9 월 15 일에 전격적으로 감행됐는데요.

바로 어제가 73 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주 무대였던 월미도 지역 곳곳을 최효은 리포터가 돌아보며 그 의미를 짚어봤습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팔미도 근해로 출항한 함정이 거침없이 바다를 가르고, 상륙돌격장갑차는 연막탄을 터뜨리며 해안가로 향합니다.

6.25 전쟁,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전세를 단숨에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이 재연된 것입니다.

독도함에 승선해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당시 작전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김태인 : "인천상륙작전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면 되살린 작전이라고 볼 수 있다보니깐 더욱더 한 번 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해병대, 해군, 군인분들 생각도 나는 것 같습니다."]

6.25 전쟁사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그날의 흔적은 인천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된 기념관입니다. 73년 전 사용됐던 그날의 무기들은 말없이 그날의 상황을 증언하는 듯한데요.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던 한 노병은 6.25 전쟁 당시 가장 길었을 법한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해병대 2기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아흔네 살의 6.25 전쟁 영웅에게 당시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인천 상륙할 적에 이거(상륙장갑차) 타고 상륙했어. (그때 기억하세요?) 그럼."]

1950년 9월 12일 약관의 나이로 부산에서 전함을 탔었고 그리고 사흘 뒤인 9월 15일.

북한군에게 점령된 고향 땅, 인천에 상륙하게 됐는데 그때까지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고 합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부산에서 미군 배 타고 말이지 배에서 내다 보니까 말이야 팔미도야. 그래서 인천에 왔구나 하고서 인천 상륙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한거지."]

국군과 유엔군은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을 하루 만에 탈환하고 수도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입니다.

허영철 옹은 서울 진입로인 연희 104고지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북한군이 구축한 서울 사수 최후 방어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9월 28일 서울 수복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이제 내 나라를 찾았구나’ 중앙청에 태극기 올릴 적에 그 기분이야 말할 수 없었어."]

암호명 ‘크로마이트’로 계획된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이 등 여러 가지 불리한 요소 때문에 성공 확률 5천분의 1일에 불과하다며 반대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미 합동참모본부의 최종 승인을 얻고 대규모 병력을 구성하게 됩니다.

[박미자/인천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 : "유엔군과 우리나라 군 합해서 7만 5천 명이고요. 부산에서 출항하고 일본에서 출항해서 총 261척이 덕적도로 집결합니다."]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투입된 장사 상륙작전의 학도병들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빼놓을 수 없는 주역들입니다.

이곳은 월미도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작전이 개시된 후 유엔군이 가장 처음 상륙한 지점이기도 한데요.

이곳에서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이 해안을 통해 마침내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또 다른 지점에서 교두보를 확보해 전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요.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전투의 역사적 현장을 함께 만나보실까요?

수로가 좁고 갯벌이 넓어 인천은 대규모 함대가 이동하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그래서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 당일 새벽, 3시간의 만조를 이용해 세 갈래로 작전을 개시합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인천상륙작전 지점은 총 3곳이 있는데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월미도 녹색해안이라고 하고요. 암호명으로 그린비치라고 합니다. 또 한 곳은 적색 해안이라고 하고요. 레드 비치라고 합니다. 마지막 한 곳은 청색 해안 블루 비리라고 합니다."]

오전 6시 33분, 첫 번째 지점인 월미도 녹색 해안에 상륙한 군인들은 약 한 시간 반 만인 오전 8시에 월미도를 장악합니다.

이 기세를 몰아 오후 5시 30분엔 적색 해안과 청색 해안에서 상륙전이 벌어집니다.

이중 적색 해안에서의 전투는 가장 어려운 임무로 꼽혔습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이곳은 북성포구고요. 레드비치라는 의미는 상륙 당시에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서 모든 함선에서 함포 사격을 집중적으로 하라는 의미의 암호명입니다. 이곳은 인천상륙작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죠. 사다리를 타고 상륙하는 장면."]

높은 방파제를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오르는 모습은 인천상륙작전의 상징적인 장면이 됐습니다.

상륙 지점을 알리는 현재의 표지석들은 개발 등으로 인해 실제 지점 인근의 길가나 거리에 세워져 있었는데요.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상륙 당시의 지형과 지금의 지형이 많이 변했습니다. 매립을 하다 보니까 적색해안 같은 경우도 상륙은 저쪽 북성포구고 저쪽으로 상륙을 했습니다."]

맥아더 길을 따라, 인천의 시가지로 향합니다.

인천역 철도길 너머로 보이는 장소는 서울 수복의 발판을 다진 기념적인 장소라고 합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인천 시가전을 통해서 또 인천 내륙 진출을 통해서 서울 수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됩니다."]

북한은 이 인천상륙작전을 월미도 방어 전투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패한 전투였지만 오히려 상륙군을 상대로 결사 항전을 벌였다며 이를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 선동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북한에서는) 낙동강 전선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의 주력 부대가 완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그런 작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6.25 전쟁이라는 비극에서 희망의 불씨가 됐던 인천상륙작전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희생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평화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평화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 노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성공 확률 5천분의 1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붙잡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었을 그 젊은 희생의 숨결은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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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인천상륙작전, 역전의 그날
    • 입력 2023-09-16 08:19:06
    • 수정2023-09-16 09: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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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 인민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두 달 만에 낙동강 이남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을 점령했죠.

개전 초기부터 속절없이 밀리던 국군이 마침내, 반격의 기회를 잡은 건, 바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6.25 전쟁의 판세를 뒤바꾼 인천 상륙작전은 1950 년 9 월 15 일에 전격적으로 감행됐는데요.

바로 어제가 73 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주 무대였던 월미도 지역 곳곳을 최효은 리포터가 돌아보며 그 의미를 짚어봤습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팔미도 근해로 출항한 함정이 거침없이 바다를 가르고, 상륙돌격장갑차는 연막탄을 터뜨리며 해안가로 향합니다.

6.25 전쟁,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전세를 단숨에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이 재연된 것입니다.

독도함에 승선해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당시 작전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김태인 : "인천상륙작전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면 되살린 작전이라고 볼 수 있다보니깐 더욱더 한 번 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해병대, 해군, 군인분들 생각도 나는 것 같습니다."]

6.25 전쟁사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그날의 흔적은 인천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된 기념관입니다. 73년 전 사용됐던 그날의 무기들은 말없이 그날의 상황을 증언하는 듯한데요.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던 한 노병은 6.25 전쟁 당시 가장 길었을 법한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해병대 2기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아흔네 살의 6.25 전쟁 영웅에게 당시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인천 상륙할 적에 이거(상륙장갑차) 타고 상륙했어. (그때 기억하세요?) 그럼."]

1950년 9월 12일 약관의 나이로 부산에서 전함을 탔었고 그리고 사흘 뒤인 9월 15일.

북한군에게 점령된 고향 땅, 인천에 상륙하게 됐는데 그때까지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고 합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부산에서 미군 배 타고 말이지 배에서 내다 보니까 말이야 팔미도야. 그래서 인천에 왔구나 하고서 인천 상륙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한거지."]

국군과 유엔군은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을 하루 만에 탈환하고 수도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입니다.

허영철 옹은 서울 진입로인 연희 104고지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북한군이 구축한 서울 사수 최후 방어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9월 28일 서울 수복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이제 내 나라를 찾았구나’ 중앙청에 태극기 올릴 적에 그 기분이야 말할 수 없었어."]

암호명 ‘크로마이트’로 계획된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이 등 여러 가지 불리한 요소 때문에 성공 확률 5천분의 1일에 불과하다며 반대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미 합동참모본부의 최종 승인을 얻고 대규모 병력을 구성하게 됩니다.

[박미자/인천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 : "유엔군과 우리나라 군 합해서 7만 5천 명이고요. 부산에서 출항하고 일본에서 출항해서 총 261척이 덕적도로 집결합니다."]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투입된 장사 상륙작전의 학도병들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빼놓을 수 없는 주역들입니다.

이곳은 월미도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작전이 개시된 후 유엔군이 가장 처음 상륙한 지점이기도 한데요.

이곳에서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이 해안을 통해 마침내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또 다른 지점에서 교두보를 확보해 전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요.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전투의 역사적 현장을 함께 만나보실까요?

수로가 좁고 갯벌이 넓어 인천은 대규모 함대가 이동하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그래서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 당일 새벽, 3시간의 만조를 이용해 세 갈래로 작전을 개시합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인천상륙작전 지점은 총 3곳이 있는데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월미도 녹색해안이라고 하고요. 암호명으로 그린비치라고 합니다. 또 한 곳은 적색 해안이라고 하고요. 레드 비치라고 합니다. 마지막 한 곳은 청색 해안 블루 비리라고 합니다."]

오전 6시 33분, 첫 번째 지점인 월미도 녹색 해안에 상륙한 군인들은 약 한 시간 반 만인 오전 8시에 월미도를 장악합니다.

이 기세를 몰아 오후 5시 30분엔 적색 해안과 청색 해안에서 상륙전이 벌어집니다.

이중 적색 해안에서의 전투는 가장 어려운 임무로 꼽혔습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이곳은 북성포구고요. 레드비치라는 의미는 상륙 당시에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서 모든 함선에서 함포 사격을 집중적으로 하라는 의미의 암호명입니다. 이곳은 인천상륙작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죠. 사다리를 타고 상륙하는 장면."]

높은 방파제를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오르는 모습은 인천상륙작전의 상징적인 장면이 됐습니다.

상륙 지점을 알리는 현재의 표지석들은 개발 등으로 인해 실제 지점 인근의 길가나 거리에 세워져 있었는데요.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상륙 당시의 지형과 지금의 지형이 많이 변했습니다. 매립을 하다 보니까 적색해안 같은 경우도 상륙은 저쪽 북성포구고 저쪽으로 상륙을 했습니다."]

맥아더 길을 따라, 인천의 시가지로 향합니다.

인천역 철도길 너머로 보이는 장소는 서울 수복의 발판을 다진 기념적인 장소라고 합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인천 시가전을 통해서 또 인천 내륙 진출을 통해서 서울 수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됩니다."]

북한은 이 인천상륙작전을 월미도 방어 전투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패한 전투였지만 오히려 상륙군을 상대로 결사 항전을 벌였다며 이를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 선동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북한에서는) 낙동강 전선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의 주력 부대가 완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그런 작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6.25 전쟁이라는 비극에서 희망의 불씨가 됐던 인천상륙작전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남근우/박사/인천연구원 연구위원 : "희생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평화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평화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영철/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 노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성공 확률 5천분의 1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붙잡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었을 그 젊은 희생의 숨결은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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