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 목소리’가 앗아간 남편…5년 만에 돌아온 소식은

입력 2023.10.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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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미안해... 당신에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네"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2019년 10월, A 씨 눈앞에서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던 남편 고 모 씨는 20년 넘게 함께 살아온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80kg였던 남편은 반년 사이 50kg까지 살이 빠졌습니다. 평소 먹던 한 끼 식사량을 일주일 동안 겨우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고 씨는 사랑하는 부인과 아들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언은 '미안하다' 였습니다.

남편은, 보이스피싱 피해자였습니다.

A 씨 남편 고(故) 고 모 씨 생전 사진. 고 씨는 2018년 보이스피싱 범죄 직후 간암 3기 진단을 받고 이듬해인 201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A 씨 남편 고(故) 고 모 씨 생전 사진. 고 씨는 2018년 보이스피싱 범죄 직후 간암 3기 진단을 받고 이듬해인 201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사업 어려우시죠? 저금리 대출해드릴게요'

남편 고 씨는 자상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사업을 꾸렸습니다. 영업 수완으로 사업은 순풍을 탔습니다. 하지만 경기 상황이 나빠졌고 제1금융권에서 시작한 대출은 제2·제3 금융권으로 이어졌습니다. 높은 이자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보이스피싱범은 이 위기를 노렸습니다. 고 씨의 상황을 포착해 '악마의 제안'을 했습니다.

2018년 7월, 은행 직원을 사칭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기존 대출금을 지정한 계좌로 상환하면 저금리 대출을 해 주겠다'며 고 씨에게 가상자산 거래소 계좌와 연결된 은행 계좌로 이체를 요구했습니다.

고 씨는 '저금리'가 가능하단 말에,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즉시 사채로 마련한 1,620만 원을 보이스피싱범이 말한 계좌로 이체했습니다.

바로 사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돈을 찾기엔 늦었습니다.

사채 빚까지 떠안은 고 씨는 자책하며 연거푸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간암 3기 판정을 받았고, 이듬해 숨졌습니다.

남은 가족은 슬퍼할 새도 없이, '빚 청산'을 해야 했습니다. A 씨는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포함한 빚을 처분하기 위해 20년 넘게 살던 집을 경매에 넘겼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연고 없는 경기도 수원 단칸방에 몸을 누였습니다. '보이스피싱'은 남편과 재산, 희망까지 모두 앗아갔습니다.

심무송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계장이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에서 브리핑하는 모습. 경찰은 지난 4월부터 4개월에 걸쳐 약 2,500개에 달하는 계좌를 추적해 보이스피싱 등 피싱 범죄 피해자 503명, 피해금 약 122억 원을 특정했다.심무송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계장이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에서 브리핑하는 모습. 경찰은 지난 4월부터 4개월에 걸쳐 약 2,500개에 달하는 계좌를 추적해 보이스피싱 등 피싱 범죄 피해자 503명, 피해금 약 122억 원을 특정했다.

■ '가산자산 거래소'에 세탁한 피해금, 환급 어려워

고 씨가 '보이스피싱'인 걸 바로 알아차렸는데도, 돈을 못 찾은 이유는 이 돈이 가상자산 거래소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1년 시행된 '전기통신사기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은,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옮겨진 계좌 또는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은행 간에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때 신고만 되면, 돈이 들어간 계좌를 정지시키고 해당 정보를 공유해 신속하게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상자산 거래소는 해당 법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가 신고를 해도 ▲피해구제 신청과 정보제공, ▲지급정지 요청, ▲피해환급금 지급 등의 절차가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가상자산 거래소를 이용한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회복은 지금까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경찰, 피해자 503명·피해금 122억 환급 실시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이번에 고 씨처럼 가상자산 거래소에 묶여 있어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보이스피싱 피해금 122억 원을 확인했습니다.

경찰은 2017년 이후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5곳에서 보이스피싱 범죄로 동결한 계정 339개를 찾아냈습니다. 이를 역추적해, 피해자 503명을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피해자 정보를 거래소들과 공유해 이달부터 피해 회복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고 씨의 가족도 이번에 환급을 받게 됐습니다. '숨은 피해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았습니다.

2,000만 원을 잃은 뒤 가족에게 알리지 못하고 대리운전 등을 하며 피해 대출금을 갚아온 40대 가장, 식당 일을 하며 어렵게 모은 전 재산 8,000만 원을 잃은 50대 여성, 사기를 당한 뒤 대인기피 등 정신질환을 앓아온 50대 여성...몇년간 '자책'하며 살아온 피해자들은 환급을 받아 '지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 피해금 환급 절차 진행률은 지난 22일 기준 30%로, 피해자 100명에게 약 40억 원을 돌려준 상태"라며 "현재도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만나 환급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피싱 피해금이 가상자산으로 이전되는 과정. 서울경찰청 제공피싱 피해금이 가상자산으로 이전되는 과정. 서울경찰청 제공
■가상자산 거래소도 '정보 공유' '지급 정지' 필요...법 개정 시급

경찰이 이렇게 일일이 계좌를 찾아 조치하지 않는 이상, 현행법으로는 '가상자산'에 묶인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돌려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지난달 21일부터 5대 가상자산 거래소들과 피해금 환급에 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습니다. 비대면으로도 피해 환급이 가능하도록 절차도 개선하기로 했습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피싱 피해금 환급의 제도적 문제점을 조속히 보완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 가상자산 거래소와도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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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02 10: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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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미안해... 당신에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네"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2019년 10월, A 씨 눈앞에서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던 남편 고 모 씨는 20년 넘게 함께 살아온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80kg였던 남편은 반년 사이 50kg까지 살이 빠졌습니다. 평소 먹던 한 끼 식사량을 일주일 동안 겨우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고 씨는 사랑하는 부인과 아들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언은 '미안하다' 였습니다.

남편은, 보이스피싱 피해자였습니다.

A 씨 남편 고(故) 고 모 씨 생전 사진. 고 씨는 2018년 보이스피싱 범죄 직후 간암 3기 진단을 받고 이듬해인 201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사업 어려우시죠? 저금리 대출해드릴게요'

남편 고 씨는 자상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사업을 꾸렸습니다. 영업 수완으로 사업은 순풍을 탔습니다. 하지만 경기 상황이 나빠졌고 제1금융권에서 시작한 대출은 제2·제3 금융권으로 이어졌습니다. 높은 이자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보이스피싱범은 이 위기를 노렸습니다. 고 씨의 상황을 포착해 '악마의 제안'을 했습니다.

2018년 7월, 은행 직원을 사칭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기존 대출금을 지정한 계좌로 상환하면 저금리 대출을 해 주겠다'며 고 씨에게 가상자산 거래소 계좌와 연결된 은행 계좌로 이체를 요구했습니다.

고 씨는 '저금리'가 가능하단 말에,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즉시 사채로 마련한 1,620만 원을 보이스피싱범이 말한 계좌로 이체했습니다.

바로 사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돈을 찾기엔 늦었습니다.

사채 빚까지 떠안은 고 씨는 자책하며 연거푸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간암 3기 판정을 받았고, 이듬해 숨졌습니다.

남은 가족은 슬퍼할 새도 없이, '빚 청산'을 해야 했습니다. A 씨는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포함한 빚을 처분하기 위해 20년 넘게 살던 집을 경매에 넘겼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연고 없는 경기도 수원 단칸방에 몸을 누였습니다. '보이스피싱'은 남편과 재산, 희망까지 모두 앗아갔습니다.

심무송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계장이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에서 브리핑하는 모습. 경찰은 지난 4월부터 4개월에 걸쳐 약 2,500개에 달하는 계좌를 추적해 보이스피싱 등 피싱 범죄 피해자 503명, 피해금 약 122억 원을 특정했다.
■ '가산자산 거래소'에 세탁한 피해금, 환급 어려워

고 씨가 '보이스피싱'인 걸 바로 알아차렸는데도, 돈을 못 찾은 이유는 이 돈이 가상자산 거래소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1년 시행된 '전기통신사기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은,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옮겨진 계좌 또는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은행 간에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때 신고만 되면, 돈이 들어간 계좌를 정지시키고 해당 정보를 공유해 신속하게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상자산 거래소는 해당 법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가 신고를 해도 ▲피해구제 신청과 정보제공, ▲지급정지 요청, ▲피해환급금 지급 등의 절차가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가상자산 거래소를 이용한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회복은 지금까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경찰, 피해자 503명·피해금 122억 환급 실시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이번에 고 씨처럼 가상자산 거래소에 묶여 있어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보이스피싱 피해금 122억 원을 확인했습니다.

경찰은 2017년 이후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5곳에서 보이스피싱 범죄로 동결한 계정 339개를 찾아냈습니다. 이를 역추적해, 피해자 503명을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피해자 정보를 거래소들과 공유해 이달부터 피해 회복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고 씨의 가족도 이번에 환급을 받게 됐습니다. '숨은 피해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았습니다.

2,000만 원을 잃은 뒤 가족에게 알리지 못하고 대리운전 등을 하며 피해 대출금을 갚아온 40대 가장, 식당 일을 하며 어렵게 모은 전 재산 8,000만 원을 잃은 50대 여성, 사기를 당한 뒤 대인기피 등 정신질환을 앓아온 50대 여성...몇년간 '자책'하며 살아온 피해자들은 환급을 받아 '지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 피해금 환급 절차 진행률은 지난 22일 기준 30%로, 피해자 100명에게 약 40억 원을 돌려준 상태"라며 "현재도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만나 환급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피싱 피해금이 가상자산으로 이전되는 과정. 서울경찰청 제공 ■가상자산 거래소도 '정보 공유' '지급 정지' 필요...법 개정 시급

경찰이 이렇게 일일이 계좌를 찾아 조치하지 않는 이상, 현행법으로는 '가상자산'에 묶인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돌려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지난달 21일부터 5대 가상자산 거래소들과 피해금 환급에 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습니다. 비대면으로도 피해 환급이 가능하도록 절차도 개선하기로 했습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피싱 피해금 환급의 제도적 문제점을 조속히 보완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 가상자산 거래소와도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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