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 속에서 그림으로 위로받은 사람들

입력 2023.10.0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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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판 레인 ‘63세의 자화상’, 1669, 캔버스에 유채, 86×70.5cm, 내셔널갤러리 런던렘브란트 판 레인 ‘63세의 자화상’, 1669, 캔버스에 유채, 86×70.5cm, 내셔널갤러리 런던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 런던. 독일군의 공습으로 도시 곳곳이 파괴된 런던의 한 박물관에 그림 한 점이 걸립니다. 저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의 자화상이었죠.

생전에 그 누구보다 자화상을 많이 그렸던 화가 렘브란트. 젊은 날 이미 부와 영예를 모두 거머쥔 성공한 화가였지만, 그것도 한때뿐. 렘브란트의 말년은 초라하고 쓸쓸했습니다. 화가가 세상을 떠나던 그해 완성한 자화상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뒤로하고 서서히 저물어가는 생을,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묵묵히 캔버스에 새긴 화가. 그렇게 완성한 그림 앞에서 화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의 후반부는 몹시도 스산했지만, 화가는 기품을 잃지 않았습니다. 얼굴만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그 명백한 증거죠. 렘브란트가 '빛의 화가'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과거의 영화는 온데간데없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자화상 덕분에 앞으로도 영원히 화가 렘브란트는 '빛' 속에서 오래오래 남을 겁니다.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를 런던의 미술관에 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오직 이 그림 한 점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말이죠.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일이 과연 목숨까지 걸만한 일일까. 도대체 그림이 뭐기에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모았을까.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미술관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을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아홉 차례나 폭격을 당해 건물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죠. 미술관은 임시로 문을 닫았고, 미술품은 광산으로 피란했습니다. 텅 빈 미술관을 채운 건 음악가들의 연주회였고, 이후에는 현대미술 전시회도 열립니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를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예술을 갈구했습니다. 예술이야말로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고, 그 모든 고통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나리란 희망을 품게 해주었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미술관을 찾은 수많은 사람이 그 증거였죠. 내셔널갤러리는 한 가지 묘안을 냅니다. 명화를 한 점씩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내셔널갤러리의 '한 점 전시회'였습니다. 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은 전쟁이라는 암울했던 시기에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63살의 렘브란트는 관람객들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살다 보면 좋은 시절도, 힘든 시절도 있는 법이죠. 좌절하거나 상심해선 안 된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비추는 '빛'을 잃지 마세요.'

바로 그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림 한 점에 전쟁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면 그 위험은 기꺼이 감수할 만한 것이 아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내셔널갤러리의 한 점 전시회에 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끔찍한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렘브란트의 그림은 더없이 큰 위로를 건넵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고 나면 그림을 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단순히 '명화이니까, 국내에서 다시 보기 힘든 내셔널갤러리 소장품이니까'가 아니라, 어려운 시절에도 감사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죠. 우리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유물도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고마운 사람들이 지켜낸 소중한 유산이라는 점을 알고 보면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처럼요.

피에로 델 플라이우올로 ‘아폴로와 다프네’, 1470-80년경, 목판에 유채, 29.5×20cm, 내셔널갤러리 런던피에로 델 플라이우올로 ‘아폴로와 다프네’, 1470-80년경, 목판에 유채, 29.5×20cm, 내셔널갤러리 런던

클로드 로랭 ‘성 우르술라의 출항’, 1641, 캔버스에 유채, 112.9×149cm, 내셔널갤러리 런던클로드 로랭 ‘성 우르술라의 출항’, 1641, 캔버스에 유채, 112.9×149cm, 내셔널갤러리 런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이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넘어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카라바조의 걸작 <도마뱀에 물린 소년>을 비롯해 내셔널갤러리가 자랑하는 명화 52점을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죠. 이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내셔널갤러리의 '한 점 미술관'에 전시됐던 작품 3점이 왔습니다.

미술관, 박물관은 '모두를 위한 공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내셔널갤러리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같은 지향점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예술의 가치를 나눕니다.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을 다시 찬찬히 돌아보면서, 우리의 일상에 '빛'을 던져주는 예술의 소중함에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전시 정보
제목: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기간: 2023년 10월 9일(월)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작품: 카라바조 <도마뱀에 물린 소년> 등 5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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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화 속에서 그림으로 위로받은 사람들
    • 입력 2023-10-04 07: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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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판 레인 ‘63세의 자화상’, 1669, 캔버스에 유채, 86×70.5cm, 내셔널갤러리 런던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 런던. 독일군의 공습으로 도시 곳곳이 파괴된 런던의 한 박물관에 그림 한 점이 걸립니다. 저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의 자화상이었죠.

생전에 그 누구보다 자화상을 많이 그렸던 화가 렘브란트. 젊은 날 이미 부와 영예를 모두 거머쥔 성공한 화가였지만, 그것도 한때뿐. 렘브란트의 말년은 초라하고 쓸쓸했습니다. 화가가 세상을 떠나던 그해 완성한 자화상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뒤로하고 서서히 저물어가는 생을,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묵묵히 캔버스에 새긴 화가. 그렇게 완성한 그림 앞에서 화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의 후반부는 몹시도 스산했지만, 화가는 기품을 잃지 않았습니다. 얼굴만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그 명백한 증거죠. 렘브란트가 '빛의 화가'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과거의 영화는 온데간데없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자화상 덕분에 앞으로도 영원히 화가 렘브란트는 '빛' 속에서 오래오래 남을 겁니다.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를 런던의 미술관에 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오직 이 그림 한 점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말이죠.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일이 과연 목숨까지 걸만한 일일까. 도대체 그림이 뭐기에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모았을까.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미술관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을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아홉 차례나 폭격을 당해 건물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죠. 미술관은 임시로 문을 닫았고, 미술품은 광산으로 피란했습니다. 텅 빈 미술관을 채운 건 음악가들의 연주회였고, 이후에는 현대미술 전시회도 열립니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를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예술을 갈구했습니다. 예술이야말로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고, 그 모든 고통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나리란 희망을 품게 해주었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미술관을 찾은 수많은 사람이 그 증거였죠. 내셔널갤러리는 한 가지 묘안을 냅니다. 명화를 한 점씩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내셔널갤러리의 '한 점 전시회'였습니다. 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은 전쟁이라는 암울했던 시기에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63살의 렘브란트는 관람객들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살다 보면 좋은 시절도, 힘든 시절도 있는 법이죠. 좌절하거나 상심해선 안 된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비추는 '빛'을 잃지 마세요.'

바로 그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림 한 점에 전쟁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면 그 위험은 기꺼이 감수할 만한 것이 아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내셔널갤러리의 한 점 전시회에 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끔찍한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렘브란트의 그림은 더없이 큰 위로를 건넵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고 나면 그림을 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단순히 '명화이니까, 국내에서 다시 보기 힘든 내셔널갤러리 소장품이니까'가 아니라, 어려운 시절에도 감사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죠. 우리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유물도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고마운 사람들이 지켜낸 소중한 유산이라는 점을 알고 보면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처럼요.

피에로 델 플라이우올로 ‘아폴로와 다프네’, 1470-80년경, 목판에 유채, 29.5×20cm, 내셔널갤러리 런던
클로드 로랭 ‘성 우르술라의 출항’, 1641, 캔버스에 유채, 112.9×149cm, 내셔널갤러리 런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이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넘어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카라바조의 걸작 <도마뱀에 물린 소년>을 비롯해 내셔널갤러리가 자랑하는 명화 52점을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죠. 이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내셔널갤러리의 '한 점 미술관'에 전시됐던 작품 3점이 왔습니다.

미술관, 박물관은 '모두를 위한 공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내셔널갤러리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같은 지향점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예술의 가치를 나눕니다.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을 다시 찬찬히 돌아보면서, 우리의 일상에 '빛'을 던져주는 예술의 소중함에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전시 정보
제목: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기간: 2023년 10월 9일(월)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작품: 카라바조 <도마뱀에 물린 소년> 등 5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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