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5·18]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대구 5·18기념행사위 원영민 간사

입력 2023.10.12 (15:02) 수정 2023.10.1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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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
"5·18 왜곡과 폄훼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싸움"
"민주·평화·인권 위한 실천이 오월정신 계승하는 일"

원영민(1975년생)
-대구5·18기념행사위 간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차장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사무차장

대구 5·18기념행사위원회 원영민 간사대구 5·18기념행사위원회 원영민 간사

원영민 씨는 대구가 고향으로, 초·중·고와 대학까지 모두 대구에서 다닌 '찐' 대구 사람입니다. 1994년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5·18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1995년에는 이른바 '5·18 학살자 전두환·노태우 처벌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 당시 영남 지역 대학생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때 활동이 계기가 됐을까요? 원 씨는 2016년부터 대구 지역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지금은 간사를 맡고 있습니다.


[영상채록5·18] 취재진이 원 씨를 만난 곳은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사무실입니다.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실도 겸하고 있는데, 두 단체의 사무차장을 맡고 있습니다.

■1980년 대구 '두레양서조합사건'

대구 ‘두레양서조합’ 사건 관련 구속자 명단대구 ‘두레양서조합’ 사건 관련 구속자 명단

'1980년 오월'은 대구에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두레양서조합' 사건입니다. 대구와 거창 지역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광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 고구마사건 진상보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5월 17일 광주를 찾았지만, 다음날 계엄령 확대로 행사가 무산됐습니다.

이후 대구로 돌아간 이들이 두레양서조합 회원 등에게 광주 상황을 전하면서 유인물을 만들고 시위를 계획한 겁니다. 하지만 27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진압되면서 이 또한 좌절됐습니다.

그런데 수사 당국이 9월에서야 사건화하면서 정상용 등 100여 명이 연행돼 불법 구금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한 달 동안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반국가단체로 해서 간첩단 사건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이후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 쪽에서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을 만나면서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는 빠지고 계엄법 위반 등으로 변경됐습니다. 이후 9명이 구속됐습니다.

2천 년대 들어서야 관련자 10여 분이 5·18 유공자로 등록됐습니다."

■대학 신입생이 처음 마주한 5·18


원영민 씨는 대학에 입학한 후 이른바 '광주 사진'을 접했습니다. 신체 일부가 훼손된 사진·시신이 수레에 실려 있는 장면 등입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인 대학생은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5·18을 잔인하게 진압한 국가에 대한 '분노'는 여러 사회 문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됩니다.

"입학했을 때 학생회실에서 광주 사진을 처음 보게 됐는데 그게 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처음 알게 되면서 느낀 감정은 분노였어요. 자국민을 군대가 이렇게 학살할 수 있는지, 이런 분노에서 출발해서 관련 책도 보고 여러 다양한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 알아갔던 것 같아요."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


1995년 대학가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하라는 시위로 들끓었습니다. 이른바 '전노 학살자 처벌 투쟁' 대학생들이 주도적으로 5·18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고,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원영민 씨도 당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대구 지역 대학생들은 '상경투쟁'도 했고, 광주를 찾기도 하며 '5·18 투쟁'에 함께 했습니다.

"그때 저도 명동성당에 올라가서 같이 단식도 며칠 했어요. 당시에 대구 지역에서는 이런 구호도 있었습니다.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지역의 대학생들이 광주를 찾아가고 진상규명 활동을 함께 했었습니다."

■대구에서 열리는 5·18 기념행사


대구 지역에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가 꾸려진 지도 이제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주로 5월에 한정되긴 하지만 광주·전남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5·18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건데, 대구에선 원 씨가 간사를 맡아 실무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올해 대구 경북 지역 518인 선언은 대구 경북 지역에 있는 민주동문회 회원들이 함께한 선언이고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항거한 광주의 5·18 정신을 계승하고, 그들과 함께 연대해서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데 있어서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작은 실천이라도 함께 해보자 하는 의미로 진행했습니다."

올해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5·18을 기념하는 518인 선언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원영민 간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에서 오월정신 계승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취지라고 설명합니다.

■대구에서 이어가는 '오월정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점점 심해지고, 왜곡과 폄훼가 심해지는 지역 중에 가장 심한 곳이 또 이곳이라서...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뭔가 조금이라도 같이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원 씨는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일도 하고 있습니다. 4·9는 1975년 4월 9일을 뜻하고, 인혁열사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된 이들입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바로 다음 날 8명의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이 때문에 훗날 4월 9일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됩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30여 년이 지나 재심에서 무죄가 됐는데, 당시 희생자 대부분은 대구 경북 지역 인사들이었습니다.

"대구에서는 1960년 2.28민주화운동이 있었고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수많은 조작과 고문으로 인한 사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4·9 인혁열사 분들일 것이고요. 그런 사건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 큰 몫을 차지한 게 5.18민주화운동이고요."

1960년에는 대구 2.28민주화운동이 발생했습니다. 3.15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였는데, 사실상 민주화운동의 시작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원 씨는 또 다른 '민주화의 성지' 대구에서 오월정신 계승을 강조하며, 지금도 '민주화운동'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평화·인권을 위해서 작은 실천을 같이하는 것,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지금에 있어서 5·18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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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br />"5·18 왜곡과 폄훼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싸움"<br />"민주·평화·인권 위한 실천이 오월정신 계승하는 일"<br /><br />원영민(1975년생)<br />-대구5·18기념행사위 간사<br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차장<br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사무차장
대구 5·18기념행사위원회 원영민 간사
원영민 씨는 대구가 고향으로, 초·중·고와 대학까지 모두 대구에서 다닌 '찐' 대구 사람입니다. 1994년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5·18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1995년에는 이른바 '5·18 학살자 전두환·노태우 처벌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 당시 영남 지역 대학생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때 활동이 계기가 됐을까요? 원 씨는 2016년부터 대구 지역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지금은 간사를 맡고 있습니다.


[영상채록5·18] 취재진이 원 씨를 만난 곳은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사무실입니다.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실도 겸하고 있는데, 두 단체의 사무차장을 맡고 있습니다.

■1980년 대구 '두레양서조합사건'

대구 ‘두레양서조합’ 사건 관련 구속자 명단
'1980년 오월'은 대구에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두레양서조합' 사건입니다. 대구와 거창 지역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광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 고구마사건 진상보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5월 17일 광주를 찾았지만, 다음날 계엄령 확대로 행사가 무산됐습니다.

이후 대구로 돌아간 이들이 두레양서조합 회원 등에게 광주 상황을 전하면서 유인물을 만들고 시위를 계획한 겁니다. 하지만 27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진압되면서 이 또한 좌절됐습니다.

그런데 수사 당국이 9월에서야 사건화하면서 정상용 등 100여 명이 연행돼 불법 구금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한 달 동안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반국가단체로 해서 간첩단 사건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이후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 쪽에서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을 만나면서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는 빠지고 계엄법 위반 등으로 변경됐습니다. 이후 9명이 구속됐습니다.

2천 년대 들어서야 관련자 10여 분이 5·18 유공자로 등록됐습니다."

■대학 신입생이 처음 마주한 5·18


원영민 씨는 대학에 입학한 후 이른바 '광주 사진'을 접했습니다. 신체 일부가 훼손된 사진·시신이 수레에 실려 있는 장면 등입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인 대학생은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5·18을 잔인하게 진압한 국가에 대한 '분노'는 여러 사회 문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됩니다.

"입학했을 때 학생회실에서 광주 사진을 처음 보게 됐는데 그게 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처음 알게 되면서 느낀 감정은 분노였어요. 자국민을 군대가 이렇게 학살할 수 있는지, 이런 분노에서 출발해서 관련 책도 보고 여러 다양한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 알아갔던 것 같아요."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


1995년 대학가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하라는 시위로 들끓었습니다. 이른바 '전노 학살자 처벌 투쟁' 대학생들이 주도적으로 5·18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고,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원영민 씨도 당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대구 지역 대학생들은 '상경투쟁'도 했고, 광주를 찾기도 하며 '5·18 투쟁'에 함께 했습니다.

"그때 저도 명동성당에 올라가서 같이 단식도 며칠 했어요. 당시에 대구 지역에서는 이런 구호도 있었습니다. '학살자의 고향에서 학살자를 처벌하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지역의 대학생들이 광주를 찾아가고 진상규명 활동을 함께 했었습니다."

■대구에서 열리는 5·18 기념행사


대구 지역에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가 꾸려진 지도 이제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주로 5월에 한정되긴 하지만 광주·전남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5·18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건데, 대구에선 원 씨가 간사를 맡아 실무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올해 대구 경북 지역 518인 선언은 대구 경북 지역에 있는 민주동문회 회원들이 함께한 선언이고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항거한 광주의 5·18 정신을 계승하고, 그들과 함께 연대해서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데 있어서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작은 실천이라도 함께 해보자 하는 의미로 진행했습니다."

올해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5·18을 기념하는 518인 선언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원영민 간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에서 오월정신 계승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취지라고 설명합니다.

■대구에서 이어가는 '오월정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점점 심해지고, 왜곡과 폄훼가 심해지는 지역 중에 가장 심한 곳이 또 이곳이라서...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뭔가 조금이라도 같이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원 씨는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일도 하고 있습니다. 4·9는 1975년 4월 9일을 뜻하고, 인혁열사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된 이들입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바로 다음 날 8명의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이 때문에 훗날 4월 9일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됩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30여 년이 지나 재심에서 무죄가 됐는데, 당시 희생자 대부분은 대구 경북 지역 인사들이었습니다.

"대구에서는 1960년 2.28민주화운동이 있었고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수많은 조작과 고문으로 인한 사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4·9 인혁열사 분들일 것이고요. 그런 사건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 큰 몫을 차지한 게 5.18민주화운동이고요."

1960년에는 대구 2.28민주화운동이 발생했습니다. 3.15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였는데, 사실상 민주화운동의 시작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원 씨는 또 다른 '민주화의 성지' 대구에서 오월정신 계승을 강조하며, 지금도 '민주화운동'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평화·인권을 위해서 작은 실천을 같이하는 것,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지금에 있어서 5·18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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