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950달러 미만을 훔치면 잡혀가지 않는다고?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10.16 (08:02) 수정 2023.10.16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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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물건을 훔쳐서 계산하지 않고 나가는 절도범. CNN 7월 보도)

■방송중에도 그냥 훔쳐가는 도둑들

미국에서는 좀도둑이 극성입니다. 점원이 멀쩡히 보고 있는데 그냥 물건을 훔쳐서 나가는 사례가 CNN에 보도될 정도입니다. 좀도둑뿐 아니라 떼강도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나타나 명품숍에 있는 진열제품을 쓸어갑니다. 지난 8월 4일에는 LA 센추리시티몰 구찌 매장에 떼강도가 든 데 이어 나흘 뒤인 8일에는 아메리카나 복합쇼핑몰에서 30~40명의 강도가 몰려와 입생로랑 매장을 털고 달아났습니다. 이 때문에 LA 경찰국 등은 떼강도 전담 합동수사단을 발족시켰는데요. 하지만 경찰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대형 쇼핑몰이나 상점들은 무장 경비원 배치를 늘리고 있습니다. 한국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LA 그로브 몰에도 무장 경비원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철수하는 기업과 상점들

그럼 도대체 얼마나 강절도가 늘었을까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 통계 자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LA지역 백화점에서만 3,361건의 범죄 신고가 접수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3%나 급증했습니다. LA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2019년 대비 2022년 상점 절도가 2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강절도가 늘자,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매장과 지점을 철수시킨 건데요. 고급 슈퍼마켓 체인점인 '홀푸드'가 노동자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부 매장을 폐쇄했습니다. 또, 대형 소매 체인점인 '타깃'과 약국 체인점인 '월그린'도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서 매장을 철수했습니다. '타깃'은 철수를 알리는 공지문에서 “근무와 쇼핑 환경이 모든 사람에게 안전할 때에만 우리 매장이 지역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폐쇄 이유가 도난 등 범죄 때문임을 우회적으로 암시했습니다.

(사진설명: LA 그로브 몰에서 무장 경비원이 근무 중이다)

■처벌이 안 돼서라고?

기업이 이윤을 포기하고 매장을 포기할 정도로 범죄가 활개를 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팬데믹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노숙자의 급증과 관계가 있다는 설명이 많은데요.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범죄가 늘었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법적인 문제를 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이 발의해 2014년에 캘리포니아 주민투표를 통과한 '건의안 47호'가 문제라는 겁니다. '건의안 47호'는 그전에 400달러(54만 원)이던 중범죄 기준선을 950달러(128만 원)로 높인 건데요. 상점 절도나 좀도둑, 가벼운 마약범죄를 중죄(felony)가 아니라 경범죄(misdemeanor)로 처벌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경범죄로 분류되면 6개월 미만의 형을 받거나 1,000달러(135만 원) 미만의 벌금을 물기 때문에 경찰이 잡으려 하지도 않고 그 때문에 신고자들도 신고를 포기한다는 겁니다. 그럼 이게 사실일까요?

■건의안 47호 왜 나왔나?

그전에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왜 건의안 47호가 나온걸까요? 건의안 47호가 등장한 배경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주의회가 내놓은 근거는 물가인상률을 반영했고 대부분의 상점 절도가 400달러를 넘지 않는다는 통계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이유일뿐 실질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주의 범죄율이 고민거리였습니다. 텍사스에 이어 중범죄율이 2위를 기록했고 그로 인해 교도소가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주 대법원은 교도소 정원을 33,000명 이하로 관리해야 한다며 중범죄자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카리스 쿠브린 범죄학 교수는 "건의안 47호의 목적은 재소자 수를 줄이는 것이었고 그 법안은 범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그의 '건의안이 범죄율에 미친 효과'에 관한 보고서에서 밝혔습니다.

(사진설명: 약국 체인 ‘월그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부 지점을 폐쇄했다.)

■결국, 불편은 시민 몫

결론적으로, 950달러 미만을 훔쳐도 처벌은 됩니다. 다만 경범죄입니다. 문제는 경찰과 검찰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범죄 처벌을 위해 경찰이 출동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지역과 신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설명입니다.
건의안 47호가 발효된 직후 그리고 그즈음에서는 범죄율 상승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게 관련 학계와 주 검찰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하 수상해지고 노숙자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범죄피해를 우려하는 상인이나 평범한 시민 입장에서도 피해를 감수해야할 액수로 950달러를 떠올리니까요. 그리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 유튜버 중에는 민주당을 공격하는 논리로 경범죄 기준 950달러 때문에 좀도둑들이 당당하게 상점을 걸어 나간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문에 다시 경범죄 기준을 낮춰야 한다고 입법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미국에서는 좀도둑 때문에 가게를 닫는다는 기업의 움직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업의 이익도 아니고 수감능력도 아닙니다. 소비자들이 약국을 찾아 더 먼 거리를 가야 하고 원하는 식자재 구입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좀도둑이 기업과 상인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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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서 950달러 미만을 훔치면 잡혀가지 않는다고?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10-16 08:02:05
    • 수정2023-10-16 08: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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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물건을 훔쳐서 계산하지 않고 나가는 절도범. CNN 7월 보도)

■방송중에도 그냥 훔쳐가는 도둑들

미국에서는 좀도둑이 극성입니다. 점원이 멀쩡히 보고 있는데 그냥 물건을 훔쳐서 나가는 사례가 CNN에 보도될 정도입니다. 좀도둑뿐 아니라 떼강도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나타나 명품숍에 있는 진열제품을 쓸어갑니다. 지난 8월 4일에는 LA 센추리시티몰 구찌 매장에 떼강도가 든 데 이어 나흘 뒤인 8일에는 아메리카나 복합쇼핑몰에서 30~40명의 강도가 몰려와 입생로랑 매장을 털고 달아났습니다. 이 때문에 LA 경찰국 등은 떼강도 전담 합동수사단을 발족시켰는데요. 하지만 경찰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대형 쇼핑몰이나 상점들은 무장 경비원 배치를 늘리고 있습니다. 한국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LA 그로브 몰에도 무장 경비원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철수하는 기업과 상점들

그럼 도대체 얼마나 강절도가 늘었을까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 통계 자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LA지역 백화점에서만 3,361건의 범죄 신고가 접수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3%나 급증했습니다. LA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2019년 대비 2022년 상점 절도가 2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강절도가 늘자,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매장과 지점을 철수시킨 건데요. 고급 슈퍼마켓 체인점인 '홀푸드'가 노동자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부 매장을 폐쇄했습니다. 또, 대형 소매 체인점인 '타깃'과 약국 체인점인 '월그린'도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서 매장을 철수했습니다. '타깃'은 철수를 알리는 공지문에서 “근무와 쇼핑 환경이 모든 사람에게 안전할 때에만 우리 매장이 지역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폐쇄 이유가 도난 등 범죄 때문임을 우회적으로 암시했습니다.

(사진설명: LA 그로브 몰에서 무장 경비원이 근무 중이다)

■처벌이 안 돼서라고?

기업이 이윤을 포기하고 매장을 포기할 정도로 범죄가 활개를 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팬데믹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노숙자의 급증과 관계가 있다는 설명이 많은데요.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범죄가 늘었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법적인 문제를 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이 발의해 2014년에 캘리포니아 주민투표를 통과한 '건의안 47호'가 문제라는 겁니다. '건의안 47호'는 그전에 400달러(54만 원)이던 중범죄 기준선을 950달러(128만 원)로 높인 건데요. 상점 절도나 좀도둑, 가벼운 마약범죄를 중죄(felony)가 아니라 경범죄(misdemeanor)로 처벌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경범죄로 분류되면 6개월 미만의 형을 받거나 1,000달러(135만 원) 미만의 벌금을 물기 때문에 경찰이 잡으려 하지도 않고 그 때문에 신고자들도 신고를 포기한다는 겁니다. 그럼 이게 사실일까요?

■건의안 47호 왜 나왔나?

그전에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왜 건의안 47호가 나온걸까요? 건의안 47호가 등장한 배경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주의회가 내놓은 근거는 물가인상률을 반영했고 대부분의 상점 절도가 400달러를 넘지 않는다는 통계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이유일뿐 실질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주의 범죄율이 고민거리였습니다. 텍사스에 이어 중범죄율이 2위를 기록했고 그로 인해 교도소가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주 대법원은 교도소 정원을 33,000명 이하로 관리해야 한다며 중범죄자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카리스 쿠브린 범죄학 교수는 "건의안 47호의 목적은 재소자 수를 줄이는 것이었고 그 법안은 범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그의 '건의안이 범죄율에 미친 효과'에 관한 보고서에서 밝혔습니다.

(사진설명: 약국 체인 ‘월그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부 지점을 폐쇄했다.)

■결국, 불편은 시민 몫

결론적으로, 950달러 미만을 훔쳐도 처벌은 됩니다. 다만 경범죄입니다. 문제는 경찰과 검찰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범죄 처벌을 위해 경찰이 출동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지역과 신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설명입니다.
건의안 47호가 발효된 직후 그리고 그즈음에서는 범죄율 상승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게 관련 학계와 주 검찰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하 수상해지고 노숙자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범죄피해를 우려하는 상인이나 평범한 시민 입장에서도 피해를 감수해야할 액수로 950달러를 떠올리니까요. 그리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 유튜버 중에는 민주당을 공격하는 논리로 경범죄 기준 950달러 때문에 좀도둑들이 당당하게 상점을 걸어 나간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문에 다시 경범죄 기준을 낮춰야 한다고 입법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미국에서는 좀도둑 때문에 가게를 닫는다는 기업의 움직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업의 이익도 아니고 수감능력도 아닙니다. 소비자들이 약국을 찾아 더 먼 거리를 가야 하고 원하는 식자재 구입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좀도둑이 기업과 상인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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