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법률 만드는데 단 하루?…‘새벽배송’보다 빠른 법제처의 비밀

입력 2023.10.1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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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법률안을 제정·개정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법제처의 법률심사입니다.

새로운 법률이 국회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게이트키핑'을 하는 절차로 법률안 초안을 만드는 공무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절차지만, 때로는 시일이 많이 걸리는 탓에 정부 입법의 걸림돌로 지목되기도 하죠.

하지만 KBS가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2023년 법제처 법률 심사 처리 현황에 따르면 법제처는 23년 현재까지 133건의 법률안을 심사하는데 평균 7.98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심사 기간이 단 하루에 불과했던 적도 43건이나 있었습니다. 전체의 삼 분의 일에 가깝습니다. 이틀이 걸린 건도 30건입니다. 절반 이상의 법률 심사가 접수 바로 다음 날까지 결재가 이뤄진 셈입니다.

그야말로 '새벽배송'에 준하는 처리 속도인데, 현실도 그럴까요?

■"이메일로 깜깜이 심사…실제로는 200일 넘게 걸린 적도"

어떻게 하루 만에 심사가 완료될 수 있었을까.

올해 1월 4일 접수돼 같은날 처리 완료된 해외농업·산림자원 개발협력법 개정안을 취재했습니다.

알고 보니 관계부처의 실무 설명은 22년 11월 10일에 시작됐습니다. 최소한 54일이 소요된 셈입니다.

올해 3월 20일에 접수돼 이튿날 심사가 완료된 농어촌 정비법의 경우엔 더 심합니다.

이 법안, 법제처에 제출된 시점은 22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211일이 걸린 건데 법제처의 시스템에는 단 이틀 만에 처리됐다고 기록됐습니다.

이메일로 주고 받는 '예비심사'가 숨어있었던 겁니다.

"사전 검토의 취지로 법제처 담당과 이메일로 의견을 교환하게 된다. 이 과정서 모든 심사를 완료하고 시스템에 올리면 바로 결재가 되는 방식"

"공식 업무 시스템을 만들어놓고도 '깜깜이 심사'가 성행…법률 심사가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전·현직 담당 공무원-

법을 다루는 국가기관이 공식적인 시스템이나 공문을 이용하지 않고 이메일로 업무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당사자 외에는 어떤 의사 결정으로 법률안 관련 검토가 이뤄졌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통계가 왜곡되니 법률안 심사에 어느 정도 기간이 소요될지 예측도 불가능합니다.

담당 공무원들이 시급을 요하거나 중요한 사안일 경우 오히려 법제처 심사를 꺼리게 되는 주요 원인입니다.

■규제심사는 45일·입법예고는 40일…법제처 심사는?

정부 입법의 절차는 복잡합니다.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심사도 받아야 하고, 입법예고 기간도 가져야 합니다. 이후 차관회의 국무회의 대통령 서명까지 거쳐야 비로소 국회에 제출할 수 있습니다. 시일이 오래 걸리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처리 기간이나 시일에 대한 규정이나 내부 지침이 없는 검토 과정은 사실상 법제처 심사가 유일합니다.

<법제업무 운영규정 시행규칙>

제13조의2(국무회의 등 상정을 위한 조치) ① 법제처장은 법률안 및 대통령령안의 심사를 마쳤을 때에는 지체 없이 차관회의 및 국무회의 상정안을 작성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처리기간 규정 별도 없음

규제개혁위원회는 중요규제의 경우 45일 이내 처리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입법 예고 기간은 40일입니다.

법제처의 심사가 '정부입법'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 핵심 사업인데 '정부입법' 포기…여당에 의뢰하는 '청부입법' 성행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정부는 여당에 '청부 입법'을 의뢰하게 됩니다.

꼼꼼하게 검토하도록 다양한 규제를 둔 '정부입법'을 피해 동료 의원 10명의 동의만 있으면 발의가 가능한 '의원입법' 형식으로 선회하는 겁니다. 사실상 꼼수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한 이른바 '제1기 신도시 특별법'이 대표적입니다. 노후화된 계획도시를 '특별정비구역'으로 지정해 특례를 주는 정부의 역점사업인데, 정부는 '의원입법'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정부 입법으로 하게 되면 법제처 절차나 입법예고 등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의원 입법 방식 선택"

-원희룡 국토부 장관(지난 3월)-

최근 잇따른 교사들의 안타까운 소식으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교권강화' 관련 법률도 정부와 여당은 '신속한 처리'를 위해 의원입법 형식으로 발의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이나 중대재해처벌법, 공정경쟁 3법(상법개정안·공정거래법 개정안·금융그룹 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안) 등 굵직한 법률들도 모두 '의원입법' 형식으로 통과됐습니다.

■전체 발의 법률 중 97%는 의원입법…꼼수 남용의 피해는 국민 몫

16대 국회서 1,651건에 불과했던 의원입법은 20대 국회 들어서 2만 1,594건으로 12배 넘게 늘었습니다.

21대 국회서는 23년 10월 현재 이미 2만 2,524건으로 이미 20대 국회 기록을 깼습니다. 전체 발의 법률 중 97%가 의원입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의원입법도 현행법이 규정한 정당한 입법 방식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역점사업까지 법제처 검토 과정 등을 생략한다면 '정부입법'의 취지 자체가 몰각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은 "법제처의 심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단축해 정부입법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인포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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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 법률 만드는데 단 하루?…‘새벽배송’보다 빠른 법제처의 비밀
    • 입력 2023-10-19 10:10:02
    단독

정부가 법률안을 제정·개정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법제처의 법률심사입니다.

새로운 법률이 국회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게이트키핑'을 하는 절차로 법률안 초안을 만드는 공무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절차지만, 때로는 시일이 많이 걸리는 탓에 정부 입법의 걸림돌로 지목되기도 하죠.

하지만 KBS가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2023년 법제처 법률 심사 처리 현황에 따르면 법제처는 23년 현재까지 133건의 법률안을 심사하는데 평균 7.98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심사 기간이 단 하루에 불과했던 적도 43건이나 있었습니다. 전체의 삼 분의 일에 가깝습니다. 이틀이 걸린 건도 30건입니다. 절반 이상의 법률 심사가 접수 바로 다음 날까지 결재가 이뤄진 셈입니다.

그야말로 '새벽배송'에 준하는 처리 속도인데, 현실도 그럴까요?

■"이메일로 깜깜이 심사…실제로는 200일 넘게 걸린 적도"

어떻게 하루 만에 심사가 완료될 수 있었을까.

올해 1월 4일 접수돼 같은날 처리 완료된 해외농업·산림자원 개발협력법 개정안을 취재했습니다.

알고 보니 관계부처의 실무 설명은 22년 11월 10일에 시작됐습니다. 최소한 54일이 소요된 셈입니다.

올해 3월 20일에 접수돼 이튿날 심사가 완료된 농어촌 정비법의 경우엔 더 심합니다.

이 법안, 법제처에 제출된 시점은 22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211일이 걸린 건데 법제처의 시스템에는 단 이틀 만에 처리됐다고 기록됐습니다.

이메일로 주고 받는 '예비심사'가 숨어있었던 겁니다.

"사전 검토의 취지로 법제처 담당과 이메일로 의견을 교환하게 된다. 이 과정서 모든 심사를 완료하고 시스템에 올리면 바로 결재가 되는 방식"

"공식 업무 시스템을 만들어놓고도 '깜깜이 심사'가 성행…법률 심사가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전·현직 담당 공무원-

법을 다루는 국가기관이 공식적인 시스템이나 공문을 이용하지 않고 이메일로 업무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당사자 외에는 어떤 의사 결정으로 법률안 관련 검토가 이뤄졌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통계가 왜곡되니 법률안 심사에 어느 정도 기간이 소요될지 예측도 불가능합니다.

담당 공무원들이 시급을 요하거나 중요한 사안일 경우 오히려 법제처 심사를 꺼리게 되는 주요 원인입니다.

■규제심사는 45일·입법예고는 40일…법제처 심사는?

정부 입법의 절차는 복잡합니다.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심사도 받아야 하고, 입법예고 기간도 가져야 합니다. 이후 차관회의 국무회의 대통령 서명까지 거쳐야 비로소 국회에 제출할 수 있습니다. 시일이 오래 걸리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처리 기간이나 시일에 대한 규정이나 내부 지침이 없는 검토 과정은 사실상 법제처 심사가 유일합니다.

<법제업무 운영규정 시행규칙>

제13조의2(국무회의 등 상정을 위한 조치) ① 법제처장은 법률안 및 대통령령안의 심사를 마쳤을 때에는 지체 없이 차관회의 및 국무회의 상정안을 작성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처리기간 규정 별도 없음

규제개혁위원회는 중요규제의 경우 45일 이내 처리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입법 예고 기간은 40일입니다.

법제처의 심사가 '정부입법'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 핵심 사업인데 '정부입법' 포기…여당에 의뢰하는 '청부입법' 성행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정부는 여당에 '청부 입법'을 의뢰하게 됩니다.

꼼꼼하게 검토하도록 다양한 규제를 둔 '정부입법'을 피해 동료 의원 10명의 동의만 있으면 발의가 가능한 '의원입법' 형식으로 선회하는 겁니다. 사실상 꼼수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한 이른바 '제1기 신도시 특별법'이 대표적입니다. 노후화된 계획도시를 '특별정비구역'으로 지정해 특례를 주는 정부의 역점사업인데, 정부는 '의원입법'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정부 입법으로 하게 되면 법제처 절차나 입법예고 등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의원 입법 방식 선택"

-원희룡 국토부 장관(지난 3월)-

최근 잇따른 교사들의 안타까운 소식으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교권강화' 관련 법률도 정부와 여당은 '신속한 처리'를 위해 의원입법 형식으로 발의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이나 중대재해처벌법, 공정경쟁 3법(상법개정안·공정거래법 개정안·금융그룹 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안) 등 굵직한 법률들도 모두 '의원입법' 형식으로 통과됐습니다.

■전체 발의 법률 중 97%는 의원입법…꼼수 남용의 피해는 국민 몫

16대 국회서 1,651건에 불과했던 의원입법은 20대 국회 들어서 2만 1,594건으로 12배 넘게 늘었습니다.

21대 국회서는 23년 10월 현재 이미 2만 2,524건으로 이미 20대 국회 기록을 깼습니다. 전체 발의 법률 중 97%가 의원입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의원입법도 현행법이 규정한 정당한 입법 방식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역점사업까지 법제처 검토 과정 등을 생략한다면 '정부입법'의 취지 자체가 몰각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은 "법제처의 심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단축해 정부입법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인포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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