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공동체로 이어가는 오월정신…들불열사기념사업회 김상호 이사 [영상채록5·18]

입력 2023.10.30 (09:59) 수정 2023.10.3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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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5·18이 준 정신을 소통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임무다"
시위대 따라 다니다 부상 입은 고등학생
군 복무 중 뒤늦게 보안대 끌려가 고문 피해

# 김상호(1965년생) 5·18 당시 고등학생 부상자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오월의 숲' 운영자


김상호 씨는 1980년 5·18 당시 총격을 받아 부상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일입니다.

김 씨는 당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공동체'를 꼽습니다. 그리고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 등 평범한 시민들의 힘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제가 직접 겪었던 가장 큰 기억이 뭐냐면요. 대단히 놀라울 정도로 스스로 자치를 이뤘던 기억이거든요. (나중에 알았지만) 수많은 무기가 돌아다녔는데도 강도 사건 한 건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저는 위기에 공동체 정신이 놀랍게 모아졌고 그걸 지키고자 서로가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보거든요.

김 씨는 오래전부터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윤상원과 김영철 등 5·18민주화운동의 주요 인사 가운데 당시 노동야학인 '들불야학'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기리는 게 들불열사기념사업회입니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공간인 '오월의 숲'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두 5·18과 연결된 일입니다.

5·18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김상호 씨. 43년이 흐른 지금 '오월정신'을 실천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김상호 씨를 만났습니다.

■"철없는 아이였다."

1980년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김상호 씨. 5·18에 참여한 동기를 묻자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친구들과 시위를 구경하고 다녔고, 뜻하지 않게 부상했지만 항쟁에 의식을 갖고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수업을 안 해도 되고, 친구들하고 "시내 재밌는 일 났다는 데 구경하러 가자"해서 다녔어요. 행진하고 노래 부르고 구호 외치고 재밌더라고요. 구경하며 따라다니다가 지금 문화전당 자리 예전 노동청까지 갔습니다. 바리케이드가 쳐 있어서 뭔가 불안하긴 했어요. 갑자기 장갑차가 나타나고 군인들이. 경찰하고는 다르잖아요.

총소리를 듣고 도망가다 골목 어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 씨는 군인들이 총을 드는 모습을 본 이후 기억을 잃었습니다. 머리 위로 강한 굉음이 지난 뒤 쓰러진 겁니다. 깨어나 목격한 건 쓰러진 시민들을 군인들이 바로 앞에서 끌고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다


김상호 씨가 총격을 당한 곳은 옛 전남도청과 노동청 부근. 친구들과 함께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구경하던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총탄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목숨을 구했는데, 주변 시민들의 도움으로 계엄군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얼른 도망가야 살겠구나라는 생각은 드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잠깐 몸을 일으켰던 기억이 나는데 또 기억이 없어요. 깨어나 보니 골목에 있는 어느 가정집 방안이었어요. 모르는 집인데 여러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던 기억이 나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김상호 씨는 치료를 받고 가족들을 만난 뒤에도 한동안 기억이 오락가락했습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피난 가야 한다"라는 말을 계속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군인들이 와서 총을 쏘고 하니까 그걸 전쟁으로 받아들였는가 봐요"

■시민군과 함께 한 김상호

턱 밑, 입술 밑 꿰매고 붕대 감고 있는데 사람들이 "도청으로 갑시다 도청으로, 군인들이 우리 시민들 다 쏴 죽인다. 도청으로 가자."고 해요. 거기를 제가 따라갔는가 봐요.

총격까지 당한 김상호 씨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시민군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던 전남도청 쪽으로 향합니다. 본인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며 총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다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총을 쥐여 줄 리는 없었을 겁니다.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이 있던 상무관. 김 씨는 시신 닦는 일을 돕는 등 시민군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계엄군의 최후 진압이 예고됐던 5월 26일 밤. 김 씨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밤, 소금 가지러 집에 들어간 사이...

26일 밤이죠. 한 어른이 '니가 집이 가까우니 집에 가서 소금을 좀 가져와라'고 심부름을 시켰어요. 그래서 제가 집에 들어갔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심부름을 보낸 분도 좋게 가라고 하면 안 갈 것 같아서 그런 식으로 저를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그날 밤 소금을 갖고 나가겠다는 아들을 가족들이 그냥 두진 않았습니다. 그날 밤 집 근처 동명교회 3층 기도실에 김 씨를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김 씨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그곳에서 밤을 지샜습니다. 김 씨는 총소리와 헬리콥터 소리가 이어지던 밤사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시민 여러분 나와 주세요"라고 방송하는 소리가 들렸죠. 하여간 울었던 기억이 워낙 남아 있어요. 실은 그때 대학생 형들이랑 어른들이 나가자 해서 몇 분들은 나갔던 걸로 기억이 나거든요. 저는 못 나갔거든요. 울고만 있었죠.

■"전두환과 한 하늘에 살 수 없다"


"전두환하고는 내가 한 하늘에 살 수 없어" 5·18 이후 김상호 씨는 군대가 시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분개하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 치하 전두환 정권 아래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31사단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됐고, 뒤늦게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합니다. 5년이 지난 1985년도의 일입니다. 5·18이 진압된 직후 주요 인사들이 끌려가 갖은 고문을 겪은 것은 악명 높은 그 505보안대였습니다.

■"군인에 총 쏜 시민군, 간첩단"

보름간 온갖 폭력과 고문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나중에 보니까 제가 간첩한테 교육을 받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같이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 누구냐", "총을 숨겨놓은 것을 말해라" 그래요. 저는 도청에 있으면서도 총 한 번 만져보지도 못했거든요.

고문을 이기긴 어려웠습니다. 특히 교회 목사님 등 다른 지인이 고문받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환경은 더 상황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몰래 요구르트병에 소주를 담아서 건넸던 사병 군인도 '쓰라는 대로 쓰는 게 살 길이다'고 조언했습니다. 결국, 불러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상호 씨는 당시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잘 안 난다고 말합니다.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던 당국이 전국적으로 각종 시국 사건을 만들었는데, 광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다행히 김 씨는 풀려났고 정식 재판에 회부되거나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보안대에 그때 특별승진을 걸었던 시기래요. 사건을 만들어내면 특진이 됐다고 그래요. 그런 케이스에 저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될 뻔했죠. 저는 그것보다 '5·18 때 군인들을 향해 총을 쐈다. 총을 숨겨뒀다' 이런 진술을 받기 원했던 것 같아요.

김상호 씨는 당시 왜 끌려갔는지 이유를 지금껏 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제가 충격적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고문받고 풀려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마치 제가 어디 파견 나갔다 온 것처럼 맞이했던 겁니다. 부대에 복귀를 했더니요.

독재 정권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특히 군부 독재는 이런 거구나. 이렇게만 해서는 책임자를 제대로 처벌 못 하겠구나. 우리의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생활 속 민주주의, 지역 공동체 '오월의 숲'


김상호 씨는 이후 야학 등의 활동을 하며 노동운동에도 뛰어 들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주역 가운데 노동야학인 '들불야학' 출신들을 떠올린 겁니다. 이를 계기로 들불열사기념사업회 활동도 하게 됐습니다. 지역 공동체 활동을 위한 공간 '오월의 숲'을 만든 것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5·18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 정신을 대표하는 공동체적인 활동들, 함께하는 나눔들 그런 일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5·18에 대해서 접근하게 만드는 그런 일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이 공간을 만들었어요.

김상호 씨는 청소년들에게 오월정신을 알리는 캠프를 전국 각지 학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데 힘을 쏟고 있기도 합니다. 올해로 10년이 됐습니다. 또, 일본과 홍콩, 미얀마 등 해외 단체 활동가 등을 대상으로 한 5·18평화 연수도 10년 차를 맞았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철 없는 아이' 고등학생 김상호. 43년 이 흘렀지만 누구보다 '오월정신'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5·18이 우리에게 준 이 정신을, 유산을 나누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임무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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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strong>"5·18이 준 정신을 소통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임무다"</strong></em><br />시위대 따라 다니다 부상 입은 고등학생<br />군 복무 중 뒤늦게 보안대 끌려가 고문 피해<br /><br /><strong># 김상호</strong>(1965년생) 5·18 당시 고등학생 부상자<br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오월의 숲' 운영자

김상호 씨는 1980년 5·18 당시 총격을 받아 부상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일입니다.

김 씨는 당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공동체'를 꼽습니다. 그리고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 등 평범한 시민들의 힘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제가 직접 겪었던 가장 큰 기억이 뭐냐면요. 대단히 놀라울 정도로 스스로 자치를 이뤘던 기억이거든요. (나중에 알았지만) 수많은 무기가 돌아다녔는데도 강도 사건 한 건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저는 위기에 공동체 정신이 놀랍게 모아졌고 그걸 지키고자 서로가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보거든요.

김 씨는 오래전부터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윤상원과 김영철 등 5·18민주화운동의 주요 인사 가운데 당시 노동야학인 '들불야학'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기리는 게 들불열사기념사업회입니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공간인 '오월의 숲'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두 5·18과 연결된 일입니다.

5·18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김상호 씨. 43년이 흐른 지금 '오월정신'을 실천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김상호 씨를 만났습니다.

■"철없는 아이였다."

1980년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김상호 씨. 5·18에 참여한 동기를 묻자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친구들과 시위를 구경하고 다녔고, 뜻하지 않게 부상했지만 항쟁에 의식을 갖고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수업을 안 해도 되고, 친구들하고 "시내 재밌는 일 났다는 데 구경하러 가자"해서 다녔어요. 행진하고 노래 부르고 구호 외치고 재밌더라고요. 구경하며 따라다니다가 지금 문화전당 자리 예전 노동청까지 갔습니다. 바리케이드가 쳐 있어서 뭔가 불안하긴 했어요. 갑자기 장갑차가 나타나고 군인들이. 경찰하고는 다르잖아요.

총소리를 듣고 도망가다 골목 어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 씨는 군인들이 총을 드는 모습을 본 이후 기억을 잃었습니다. 머리 위로 강한 굉음이 지난 뒤 쓰러진 겁니다. 깨어나 목격한 건 쓰러진 시민들을 군인들이 바로 앞에서 끌고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다


김상호 씨가 총격을 당한 곳은 옛 전남도청과 노동청 부근. 친구들과 함께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구경하던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총탄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목숨을 구했는데, 주변 시민들의 도움으로 계엄군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얼른 도망가야 살겠구나라는 생각은 드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잠깐 몸을 일으켰던 기억이 나는데 또 기억이 없어요. 깨어나 보니 골목에 있는 어느 가정집 방안이었어요. 모르는 집인데 여러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던 기억이 나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김상호 씨는 치료를 받고 가족들을 만난 뒤에도 한동안 기억이 오락가락했습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피난 가야 한다"라는 말을 계속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군인들이 와서 총을 쏘고 하니까 그걸 전쟁으로 받아들였는가 봐요"

■시민군과 함께 한 김상호

턱 밑, 입술 밑 꿰매고 붕대 감고 있는데 사람들이 "도청으로 갑시다 도청으로, 군인들이 우리 시민들 다 쏴 죽인다. 도청으로 가자."고 해요. 거기를 제가 따라갔는가 봐요.

총격까지 당한 김상호 씨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시민군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던 전남도청 쪽으로 향합니다. 본인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며 총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다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총을 쥐여 줄 리는 없었을 겁니다.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이 있던 상무관. 김 씨는 시신 닦는 일을 돕는 등 시민군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계엄군의 최후 진압이 예고됐던 5월 26일 밤. 김 씨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밤, 소금 가지러 집에 들어간 사이...

26일 밤이죠. 한 어른이 '니가 집이 가까우니 집에 가서 소금을 좀 가져와라'고 심부름을 시켰어요. 그래서 제가 집에 들어갔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심부름을 보낸 분도 좋게 가라고 하면 안 갈 것 같아서 그런 식으로 저를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그날 밤 소금을 갖고 나가겠다는 아들을 가족들이 그냥 두진 않았습니다. 그날 밤 집 근처 동명교회 3층 기도실에 김 씨를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김 씨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그곳에서 밤을 지샜습니다. 김 씨는 총소리와 헬리콥터 소리가 이어지던 밤사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시민 여러분 나와 주세요"라고 방송하는 소리가 들렸죠. 하여간 울었던 기억이 워낙 남아 있어요. 실은 그때 대학생 형들이랑 어른들이 나가자 해서 몇 분들은 나갔던 걸로 기억이 나거든요. 저는 못 나갔거든요. 울고만 있었죠.

■"전두환과 한 하늘에 살 수 없다"


"전두환하고는 내가 한 하늘에 살 수 없어" 5·18 이후 김상호 씨는 군대가 시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분개하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 치하 전두환 정권 아래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31사단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됐고, 뒤늦게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합니다. 5년이 지난 1985년도의 일입니다. 5·18이 진압된 직후 주요 인사들이 끌려가 갖은 고문을 겪은 것은 악명 높은 그 505보안대였습니다.

■"군인에 총 쏜 시민군, 간첩단"

보름간 온갖 폭력과 고문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나중에 보니까 제가 간첩한테 교육을 받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같이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 누구냐", "총을 숨겨놓은 것을 말해라" 그래요. 저는 도청에 있으면서도 총 한 번 만져보지도 못했거든요.

고문을 이기긴 어려웠습니다. 특히 교회 목사님 등 다른 지인이 고문받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환경은 더 상황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몰래 요구르트병에 소주를 담아서 건넸던 사병 군인도 '쓰라는 대로 쓰는 게 살 길이다'고 조언했습니다. 결국, 불러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상호 씨는 당시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잘 안 난다고 말합니다.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던 당국이 전국적으로 각종 시국 사건을 만들었는데, 광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다행히 김 씨는 풀려났고 정식 재판에 회부되거나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보안대에 그때 특별승진을 걸었던 시기래요. 사건을 만들어내면 특진이 됐다고 그래요. 그런 케이스에 저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될 뻔했죠. 저는 그것보다 '5·18 때 군인들을 향해 총을 쐈다. 총을 숨겨뒀다' 이런 진술을 받기 원했던 것 같아요.

김상호 씨는 당시 왜 끌려갔는지 이유를 지금껏 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제가 충격적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고문받고 풀려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마치 제가 어디 파견 나갔다 온 것처럼 맞이했던 겁니다. 부대에 복귀를 했더니요.

독재 정권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특히 군부 독재는 이런 거구나. 이렇게만 해서는 책임자를 제대로 처벌 못 하겠구나. 우리의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생활 속 민주주의, 지역 공동체 '오월의 숲'


김상호 씨는 이후 야학 등의 활동을 하며 노동운동에도 뛰어 들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주역 가운데 노동야학인 '들불야학' 출신들을 떠올린 겁니다. 이를 계기로 들불열사기념사업회 활동도 하게 됐습니다. 지역 공동체 활동을 위한 공간 '오월의 숲'을 만든 것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5·18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 정신을 대표하는 공동체적인 활동들, 함께하는 나눔들 그런 일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5·18에 대해서 접근하게 만드는 그런 일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이 공간을 만들었어요.

김상호 씨는 청소년들에게 오월정신을 알리는 캠프를 전국 각지 학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데 힘을 쏟고 있기도 합니다. 올해로 10년이 됐습니다. 또, 일본과 홍콩, 미얀마 등 해외 단체 활동가 등을 대상으로 한 5·18평화 연수도 10년 차를 맞았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철 없는 아이' 고등학생 김상호. 43년 이 흘렀지만 누구보다 '오월정신'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5·18이 우리에게 준 이 정신을, 유산을 나누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임무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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