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100여 곳에 의문의 낙서…범인 잡고 보니 [주말엔]

입력 2023.11.26 (09:04) 수정 2023.11.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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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한남동, 이태원동 일대에 그려진 ‘이갈이’ 낙서들용산 한남동, 이태원동 일대에 그려진 ‘이갈이’ 낙서들

■ 용산 인근에 생기기 시작한 의문의 낙서들

서울 용산구에는 지난해부터 '이갈이' 'Broxism' 이라는 정체 불명의 낙서가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낙서가 그려진 곳도 종잡을 수 없어서,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 건물의 외벽이나, 출입문, 전봇대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의문의 낙서가 그려진 곳은 점점 늘어나 어느덧 백여 곳에 이르렀고,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동기를 알 수 없는 낙서가 늘어가자 불안감을 느끼는 주민들도 생겼고, 심지어 '테러 징후가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습니다. 결국 경찰은 낙서를 한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 테러 징후?…잡고 보니 30대 미국인

경찰은 CCTV를 통해 국내에 입국한 미국 국적의 30대 남성 A 씨를 낙서 작성자로 특정해 조사했습니다.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낙서를 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다만 자신은 공공장소 벽면 등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로 그리는 그림인 이른바 '그래피티'를 남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갈이'라는 한글 문구를 적은 이유로는 "평소 이갈이 방지 장치를 물고 자야 할 정도로 이갈이가 심하다"며 "이갈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질병이니,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A 씨가 전국 155곳에 낙서를 남기는 방식으로 재물을 손괴하고 공용물건을 손상시켰다며 출국을 금지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구속영장심사에 출석한 A 씨는 "지금까지 약 50건의 그래피티를 특수 약품을 이용해 깨끗하게 지웠다"면서 "지워지지 않는 다른 그래피티들의 경우 페인트 전문가와 함께 제대로 된 색상을 덧칠하거나 지우는 등의 방법을 통해 피해를 전부 회복하려 한다"며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A 씨와 함께 지내던 한국인 친구가 신원을 보증했고, 미국에 살던 A 씨의 가족들도 한국으로 입국해 관대한 처분을 구했습니다.

A 씨의 변호를 맡은 이예지 변호사는 "실제로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중이고, 수사기관에 모든 사실을 자백한 점을 들어 선처를 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공범도 없고 자기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있어,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결국 서울서부지법은 A 씨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박모 씨 등이 2010년 10월 G20 홍보 게시물에 그린 풍자 그림.박모 씨 등이 2010년 10월 G20 홍보 게시물에 그린 풍자 그림.

■ 2010년 'G20' 포스터 풍자 그림 2명에 구속 시도

통상 경찰이 이런 '그래피티'를 그린 이에게 재물손괴죄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재판에 넘겨진다 해도 벌금형으로 처리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경찰이 낙서를 한 사람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10년 10월 G20 홍보물에 '쥐'그림을 그린 대학강사 박모 씨 등 2명에게 공용물건손상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박모 씨 등은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주변 가판대에 붙어 있던 G20 홍보 포스터 등 13장의 홍보물에 검은색 스프레이를 이용해 풍자 그림을 그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풍자 그림의 내용은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청사초롱이 그려진 G20 공식 포스터 오른쪽에 쥐가 등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G20에 매몰된 상황을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이라며, "G20의 'G'가 쥐라서 쥐를 그린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중앙지검 공안1부의 지휘를 받아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며 기각했습니다. 당시 온라인에는 풍자 그림이 널리 퍼졌고, 경찰이 재물손괴 혐의에 무리하게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는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다만 법원은 "홍보물을 직접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홍보물과 같은 내용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그래피티를 그려 전시하는 등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그래피티 작업을 할 수도 있었다"면서, "홍보물에 직접 쥐 그림을 그려 홍보물을 훼손하는 것은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벗어난 행위"라며 이들에게 벌금형을 선고했고, 그대로 대법원에서 확정됐습니다.

백인성 변호사·법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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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26 09:04:24
    • 수정2023-11-26 12:00:06
    주말엔
용산 한남동, 이태원동 일대에 그려진 ‘이갈이’ 낙서들
■ 용산 인근에 생기기 시작한 의문의 낙서들

서울 용산구에는 지난해부터 '이갈이' 'Broxism' 이라는 정체 불명의 낙서가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낙서가 그려진 곳도 종잡을 수 없어서,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 건물의 외벽이나, 출입문, 전봇대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의문의 낙서가 그려진 곳은 점점 늘어나 어느덧 백여 곳에 이르렀고,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동기를 알 수 없는 낙서가 늘어가자 불안감을 느끼는 주민들도 생겼고, 심지어 '테러 징후가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습니다. 결국 경찰은 낙서를 한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 테러 징후?…잡고 보니 30대 미국인

경찰은 CCTV를 통해 국내에 입국한 미국 국적의 30대 남성 A 씨를 낙서 작성자로 특정해 조사했습니다.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낙서를 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다만 자신은 공공장소 벽면 등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로 그리는 그림인 이른바 '그래피티'를 남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갈이'라는 한글 문구를 적은 이유로는 "평소 이갈이 방지 장치를 물고 자야 할 정도로 이갈이가 심하다"며 "이갈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질병이니,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A 씨가 전국 155곳에 낙서를 남기는 방식으로 재물을 손괴하고 공용물건을 손상시켰다며 출국을 금지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구속영장심사에 출석한 A 씨는 "지금까지 약 50건의 그래피티를 특수 약품을 이용해 깨끗하게 지웠다"면서 "지워지지 않는 다른 그래피티들의 경우 페인트 전문가와 함께 제대로 된 색상을 덧칠하거나 지우는 등의 방법을 통해 피해를 전부 회복하려 한다"며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A 씨와 함께 지내던 한국인 친구가 신원을 보증했고, 미국에 살던 A 씨의 가족들도 한국으로 입국해 관대한 처분을 구했습니다.

A 씨의 변호를 맡은 이예지 변호사는 "실제로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중이고, 수사기관에 모든 사실을 자백한 점을 들어 선처를 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공범도 없고 자기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있어,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결국 서울서부지법은 A 씨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박모 씨 등이 2010년 10월 G20 홍보 게시물에 그린 풍자 그림.
■ 2010년 'G20' 포스터 풍자 그림 2명에 구속 시도

통상 경찰이 이런 '그래피티'를 그린 이에게 재물손괴죄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재판에 넘겨진다 해도 벌금형으로 처리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경찰이 낙서를 한 사람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10년 10월 G20 홍보물에 '쥐'그림을 그린 대학강사 박모 씨 등 2명에게 공용물건손상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박모 씨 등은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주변 가판대에 붙어 있던 G20 홍보 포스터 등 13장의 홍보물에 검은색 스프레이를 이용해 풍자 그림을 그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풍자 그림의 내용은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청사초롱이 그려진 G20 공식 포스터 오른쪽에 쥐가 등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G20에 매몰된 상황을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이라며, "G20의 'G'가 쥐라서 쥐를 그린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중앙지검 공안1부의 지휘를 받아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며 기각했습니다. 당시 온라인에는 풍자 그림이 널리 퍼졌고, 경찰이 재물손괴 혐의에 무리하게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는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다만 법원은 "홍보물을 직접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홍보물과 같은 내용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그래피티를 그려 전시하는 등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그래피티 작업을 할 수도 있었다"면서, "홍보물에 직접 쥐 그림을 그려 홍보물을 훼손하는 것은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벗어난 행위"라며 이들에게 벌금형을 선고했고, 그대로 대법원에서 확정됐습니다.

백인성 변호사·법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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