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변호사’ 이기홍 “신군부가 광주가 어떤 곳이란 걸 몰랐어” [영상채록5·18]

입력 2023.11.29 (10:03) 수정 2023.11.2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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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6일 새벽 4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 농성역 광장으로 이동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시각 광주 시민사회 인사들로 구성된 수습위원들은 도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습니다.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수습위원들은 맨몸으로라도 탱크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수습위원 17명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됐습니다. 이기홍 변호사도 그 행진의 맨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기홍 변호사는 1963년부터 변호사 활동을 시작해 1976년 명동 민주구국사건 등 많은 시국사건에서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을 자청해왔습니다. 1980년 5.18 당시에는 광주변호사협회장을 맡으며 재야 수습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날의 행진은 이기홍 변호사의 기억 속에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완전히 무장한 계엄군과 비무장 상태로 탱크 앞에 섰던 순간이었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한 것이지. 그 누구든 거기서 전차로 밀어버리면 죽는 것이고 그러니까 생사의 길을 우리가 걷고 간 것이지"


그러나 도청 진입을 막으려던 수습위원들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계엄군의 광주 시내 진입은 기정사실로 됐습니다.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했습니다.

이날 도청에 투입된 병력만 공수부대원 8백 70여 명. 도청에는 죽음을 각오한 시민 2백여 명이 남아 있었고, 시민군 17명이 숨졌습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문재학 열사도 계엄군의 총칼에 잔혹하게 희생됐습니다. 젊은 학생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았습니다.

"기가 막히죠. 차마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잖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으니. 전부 내가 무료 변론하고 다 그런 학생들이지. 정말 마음이 아프지. 우리들이 살려내지 못하고…."

이기홍 변호사는 젊고 아까운 목숨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차오릅니다. 그래서 한 번씩 5.18 묘지를 찾으면, 학생들 묘역을 가장 먼저 둘러봅니다. 이 변호사는 "차라리 나이 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데 거꾸로 돼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기홍 변호사는 5.18 직후 구속돼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7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 변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구금돼 고문과 탄압에 시달렸지만, 광주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에 선 청년들은 뭐하러 재판을 하느냐며 "죽여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신군부에서 정권을 잡으려고 자기네들 시나리오대로 했지만, 착오를 저지른 게 한가지 있어. 이 광주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몰랐어. 여기는 누르면 누를수록 강하다는 것을 몰랐다고. 그러니까 여기 정신은 말이야. 강압하면 강압할수록 또 오히려 더 강해져."

이기홍 변호사는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보여줬던 '광주 정신'이 오늘날의 민주화를 일궈냈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의 독재도, 군사반란도 가능하지 않은 대한민국을 만든 건 수많은 시민의 희생 덕분이었다는 겁니다. 이 변호사에게 5.18은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믿게 해준 사건입니다. 이기홍 변호사는 여태 이 힘을 믿고 살아왔고, 앞으로 남은 생도 이 힘을 믿으며 살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광주가 없었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없었어. 여기서 그렇게 버텨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민주국가가 된 것이야.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민주 역량이 있어서 또 우리나라의 독재를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독재가 돼요. 국민들이 말이야. 아주 위대한 국민이야. 이제 해볼 수가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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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29 1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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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6일 새벽 4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 농성역 광장으로 이동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시각 광주 시민사회 인사들로 구성된 수습위원들은 도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습니다.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수습위원들은 맨몸으로라도 탱크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수습위원 17명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됐습니다. 이기홍 변호사도 그 행진의 맨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기홍 변호사는 1963년부터 변호사 활동을 시작해 1976년 명동 민주구국사건 등 많은 시국사건에서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을 자청해왔습니다. 1980년 5.18 당시에는 광주변호사협회장을 맡으며 재야 수습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날의 행진은 이기홍 변호사의 기억 속에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완전히 무장한 계엄군과 비무장 상태로 탱크 앞에 섰던 순간이었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한 것이지. 그 누구든 거기서 전차로 밀어버리면 죽는 것이고 그러니까 생사의 길을 우리가 걷고 간 것이지"


그러나 도청 진입을 막으려던 수습위원들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계엄군의 광주 시내 진입은 기정사실로 됐습니다.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했습니다.

이날 도청에 투입된 병력만 공수부대원 8백 70여 명. 도청에는 죽음을 각오한 시민 2백여 명이 남아 있었고, 시민군 17명이 숨졌습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문재학 열사도 계엄군의 총칼에 잔혹하게 희생됐습니다. 젊은 학생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았습니다.

"기가 막히죠. 차마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잖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으니. 전부 내가 무료 변론하고 다 그런 학생들이지. 정말 마음이 아프지. 우리들이 살려내지 못하고…."

이기홍 변호사는 젊고 아까운 목숨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차오릅니다. 그래서 한 번씩 5.18 묘지를 찾으면, 학생들 묘역을 가장 먼저 둘러봅니다. 이 변호사는 "차라리 나이 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데 거꾸로 돼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기홍 변호사는 5.18 직후 구속돼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7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 변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구금돼 고문과 탄압에 시달렸지만, 광주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에 선 청년들은 뭐하러 재판을 하느냐며 "죽여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신군부에서 정권을 잡으려고 자기네들 시나리오대로 했지만, 착오를 저지른 게 한가지 있어. 이 광주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몰랐어. 여기는 누르면 누를수록 강하다는 것을 몰랐다고. 그러니까 여기 정신은 말이야. 강압하면 강압할수록 또 오히려 더 강해져."

이기홍 변호사는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보여줬던 '광주 정신'이 오늘날의 민주화를 일궈냈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의 독재도, 군사반란도 가능하지 않은 대한민국을 만든 건 수많은 시민의 희생 덕분이었다는 겁니다. 이 변호사에게 5.18은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믿게 해준 사건입니다. 이기홍 변호사는 여태 이 힘을 믿고 살아왔고, 앞으로 남은 생도 이 힘을 믿으며 살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광주가 없었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없었어. 여기서 그렇게 버텨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민주국가가 된 것이야.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민주 역량이 있어서 또 우리나라의 독재를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독재가 돼요. 국민들이 말이야. 아주 위대한 국민이야. 이제 해볼 수가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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