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이민자를 아프리카로”…영 ‘르완다 정책’ 운명은?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12.0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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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선박에 몸을 의지한 채 프랑스 북부 칼레와 영국 남부 도버 사이 영불해협을 건너는 사람들. 지난해 4만 5천 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건 이주에 나서면서 난파로 인한 익사 사고도 이따금씩 발생하고 있습니다.

각종 이주 억제 정책에도 영불해협을 통해 건너오는 불법 이민자들이 끊이지 않자 영국 정부는 칼을 빼 들었습니다.

지난해 4월 당시 보수당 소속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영불해협을 건너오는 불법 이민자를 줄이기 위해 '르완다 이송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집권한 리시 수낵 영국 총리도 해당 정책을 계승해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 '르완다 정책'…불법 이민자를 6,400km 떨어진 곳으로

'르완다 정책'은 영국에 입국한 불법 이민자들을 영국 도착 28일 이내에 자국에서 6,400km 떨어진 아프리카 르완다로 추방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신 르완다엔 이들의 생활비와 주거비 등을 5년간 지급한다는 게 영국 정부의 계획입니다.

영불해협을 통해 영국에 무단 상륙한 보트 난민, 해협 아래 해저터널을 지나는 화물차에 숨어 밀입국한 사람 등이 대상인데, 불법 이민자들의 망명 신청을 막고 무작정 쫓아냈다가는 국제사회로부터 비인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에 도출한 일종의 고육지책입니다.

르완다로 이송된 이들은 이후 심사를 거쳐 일부 난민은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 수는 극히 제한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르완다 정부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아프가니스탄과 예멘, 시리아 출신 난민들의 망명 신청을 100% 기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영국은 르완다에 지원금 형식으로 1억 4천만 파운드(약 2,300억 원)를 내고도 정작 단 한 명의 난민 신청자도 내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국 법원이 난민 신청자들이 안전하지 않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될 위험이 있다며 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대법원은 지난달 르완다가 안전한 제3국이 아니라며, 난민 신청자를 르완다로 보내는 정부 계획은 위법이라는 항소심 판결을 만장일치로 인정했습니다.

제임스 클레벌리 영국 내무부 장관이 현지 시간 5일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문해 망명 신청자 수용과 관련해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제임스 클레벌리 영국 내무부 장관이 현지 시간 5일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문해 망명 신청자 수용과 관련해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

■ 대법원 제동에 '르완다 정책' 꼼수 강행 영국

하지만 대법원 판결에도 영국 정부는 난민 신청자들을 아프리카 르완다로 이송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제임스 클레벌리 영국 내무부 장관은 현지 시간 5일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문해 난민 신청자 수용과 관련한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영국에서 르완다로 보낸 난민 신청자들이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국가로 송환될 위험을 배제한다는 내용이 추가됐습니다.

아울러 법원 판결을 우회하는 새 법안도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의회 차원에서 르완다가 망명을 보내기에 '안전한 국가'라는 것을 법으로 못 박음으로써, 사법부가 르완다가 안전하지 않은 국가라고 판시하는 것을 금지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법원이 다시 제동을 걸지 못하도록 일종의 꼼수 장치를 두겠다는 건데, 실제 해당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지는 불투명합니다. 당장 국제 난민 협약과 인권법을 무시하는 법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지난 10월 의회에서 연설하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지난 10월 의회에서 연설하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

■ "새 르완다 정책 효과 없을 것" 이민부 장관 사임

정작 집권당인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새 르완다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낵 총리의 오랜 지지자이자 이민 정책 주무 부처 수장인 로버트 젠릭 이민부 장관은 현지 시간 6일 새 법안이 "충분하지 않다"며 장관직을 사임했습니다.

젠릭 장관은 수낵 총리에게 보낸 사직서를 통해 "현재 정부가 제안한 법안이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수 없다"며 "영국 국민에게 이민에 대해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는 또 다른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수엘라 브레이버만 전 내무부 장관을 포함한 일부 보수당 인사들은 인권법과 유럽인권협약, 난민협약 등 난민과 관련된 국제법을 무효화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가 개별 사건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르완다 정책을 중단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릴 경우 불법 이민자들의 르완다행이 번번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 지난해 6월 유럽인권재판소가 난민 신청자를 르완다로 이송하지 말라고 결정하면서, 난민 신청자 7명을 태우고 르완다로 가려던 항공편은 이륙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0명 이상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는 보수당 내 중도파 모임인 '원 네이션 그룹'은 유럽인권협약을 무력화시키는 데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한 보다 강화된 법안을 냈다가는 법안 처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년으로 예상되는 총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수낵 총리로서는 진퇴양난에 처한 셈입니다.

영국 노동당 예비내각의 이베트 쿠퍼 내무장관은 "새 르완다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란 이유로 이민부 장관이 사임한다는 건 보수당의 총체적 혼란과 수낵 총리의 리더십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신호"라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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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법이민자를 아프리카로”…영 ‘르완다 정책’ 운명은?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12-08 0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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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선박에 몸을 의지한 채 프랑스 북부 칼레와 영국 남부 도버 사이 영불해협을 건너는 사람들. 지난해 4만 5천 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건 이주에 나서면서 난파로 인한 익사 사고도 이따금씩 발생하고 있습니다.

각종 이주 억제 정책에도 영불해협을 통해 건너오는 불법 이민자들이 끊이지 않자 영국 정부는 칼을 빼 들었습니다.

지난해 4월 당시 보수당 소속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영불해협을 건너오는 불법 이민자를 줄이기 위해 '르완다 이송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집권한 리시 수낵 영국 총리도 해당 정책을 계승해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 '르완다 정책'…불법 이민자를 6,400km 떨어진 곳으로

'르완다 정책'은 영국에 입국한 불법 이민자들을 영국 도착 28일 이내에 자국에서 6,400km 떨어진 아프리카 르완다로 추방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신 르완다엔 이들의 생활비와 주거비 등을 5년간 지급한다는 게 영국 정부의 계획입니다.

영불해협을 통해 영국에 무단 상륙한 보트 난민, 해협 아래 해저터널을 지나는 화물차에 숨어 밀입국한 사람 등이 대상인데, 불법 이민자들의 망명 신청을 막고 무작정 쫓아냈다가는 국제사회로부터 비인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에 도출한 일종의 고육지책입니다.

르완다로 이송된 이들은 이후 심사를 거쳐 일부 난민은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 수는 극히 제한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르완다 정부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아프가니스탄과 예멘, 시리아 출신 난민들의 망명 신청을 100% 기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영국은 르완다에 지원금 형식으로 1억 4천만 파운드(약 2,300억 원)를 내고도 정작 단 한 명의 난민 신청자도 내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국 법원이 난민 신청자들이 안전하지 않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될 위험이 있다며 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대법원은 지난달 르완다가 안전한 제3국이 아니라며, 난민 신청자를 르완다로 보내는 정부 계획은 위법이라는 항소심 판결을 만장일치로 인정했습니다.

제임스 클레벌리 영국 내무부 장관이 현지 시간 5일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문해 망명 신청자 수용과 관련해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
■ 대법원 제동에 '르완다 정책' 꼼수 강행 영국

하지만 대법원 판결에도 영국 정부는 난민 신청자들을 아프리카 르완다로 이송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제임스 클레벌리 영국 내무부 장관은 현지 시간 5일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문해 난민 신청자 수용과 관련한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영국에서 르완다로 보낸 난민 신청자들이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국가로 송환될 위험을 배제한다는 내용이 추가됐습니다.

아울러 법원 판결을 우회하는 새 법안도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의회 차원에서 르완다가 망명을 보내기에 '안전한 국가'라는 것을 법으로 못 박음으로써, 사법부가 르완다가 안전하지 않은 국가라고 판시하는 것을 금지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법원이 다시 제동을 걸지 못하도록 일종의 꼼수 장치를 두겠다는 건데, 실제 해당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지는 불투명합니다. 당장 국제 난민 협약과 인권법을 무시하는 법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지난 10월 의회에서 연설하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
■ "새 르완다 정책 효과 없을 것" 이민부 장관 사임

정작 집권당인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새 르완다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낵 총리의 오랜 지지자이자 이민 정책 주무 부처 수장인 로버트 젠릭 이민부 장관은 현지 시간 6일 새 법안이 "충분하지 않다"며 장관직을 사임했습니다.

젠릭 장관은 수낵 총리에게 보낸 사직서를 통해 "현재 정부가 제안한 법안이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수 없다"며 "영국 국민에게 이민에 대해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는 또 다른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수엘라 브레이버만 전 내무부 장관을 포함한 일부 보수당 인사들은 인권법과 유럽인권협약, 난민협약 등 난민과 관련된 국제법을 무효화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가 개별 사건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르완다 정책을 중단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릴 경우 불법 이민자들의 르완다행이 번번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 지난해 6월 유럽인권재판소가 난민 신청자를 르완다로 이송하지 말라고 결정하면서, 난민 신청자 7명을 태우고 르완다로 가려던 항공편은 이륙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0명 이상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는 보수당 내 중도파 모임인 '원 네이션 그룹'은 유럽인권협약을 무력화시키는 데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한 보다 강화된 법안을 냈다가는 법안 처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년으로 예상되는 총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수낵 총리로서는 진퇴양난에 처한 셈입니다.

영국 노동당 예비내각의 이베트 쿠퍼 내무장관은 "새 르완다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란 이유로 이민부 장관이 사임한다는 건 보수당의 총체적 혼란과 수낵 총리의 리더십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신호"라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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