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의 영웅, 역사 논쟁의 중심에 서다 [창+]

입력 2023.12.09 (09:06) 수정 2023.12.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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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홍범도와 홍범도' 중에서>

1920년 12월 25일 발간된 독립신문 제88호, 6개월 전인 6월 7일의 승전보를 뒤늦게 전합니다.

두만강에서 10km 가량 떨어진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벌어진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였습니다.

높은 지형을 이용한 매복 작전으로 일본 측 인명피해는 전사 157명과 부상 300여명,

이에 반해 독립군의 인명피해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독립신문은 보도 했습니다.

최정주/최운산 장군 손녀
“(봉오동이) 군사지역이라서가 아니고 수자원 보호구역이라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돼서 우리가 잘 못 가고 봉오동 입구에 있는 봉오 저수지라는 대문에서만 기념 촬영을 하고 오고 그러거든요. 저희는 거기에서 봉오동 전투 현장을 한 10km 안으로 들어 들어가야지 있는 곳이고 그리고 그 길이 쭉 한 10km 정도가 봉오동을 아주 요새로 만든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쭉 들어가서 산으로 둘러 싸여져 있어요, 봉오동 현장은. 그래서 그 산에 가보면 독립군들이 팠던 참호도 있고 우리 독립군이 썼던 멧돌도 남아 있고 그런, 지금은 비어 있는 곳이죠, 그러니까. 너무 안타까운 곳입니다.”

봉오동 승리의 주역은 2개 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던 홍범도 장군.

머슴 집안에서 태어나 포수와 군인, 노동자를 거쳐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한 그는 독립군 가운데서도
특출난 유독 사랑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
"항상 자기가 위험할 때 먼저 나가서 싸우는 어떤 그런 솔선수범하는 그런 모습들 그런 모습들이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지식적으로 지식이 높지 않았던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랑 그러니까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 못지않게, 오히려 이 사람은 소외되고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그냥 사회로부터 오히려 소외당하고 착취를 받던 사람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에 대해서 그 땅 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서 자기의 어떤 가족을 몽땅 헌신했던 그런 사람이죠. 자기 부인 자기 아들 둘 다 독립운동 전선에서 희생됐던 사람이죠.”

봉오동 전투 직후 일본 측 기록에는 독립군이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돼 있다고 구체적으로 묘사됐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홍범도 장군의 명성에 가려진 또 다른 영웅 덕분이었습니다.

1910년부터 봉오동 일대에서 치밀하게 전투를 준비했고 봉오동 전투에서는 홍범도 장군보다 높은 계급인 참모장으로 활약했던 최운산 장군입니다.

최정주/최운산 장군 손녀
“봉오동 전투의 승전이 가능했던 부분은 충분한 군자금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운산 장군은 1910년 이전부터 그 일대를 소유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충분한 농산물과 그리고 러시아군에 식량을 납품하셨던 분이에요.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분이 봉오동 일대를 소유한 지주였었고 또 넓은 토지를 이용한 산업 공장을 많이 지으셨었거든요. 성냥공장, 비누공장,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등등. 많은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벌었던 돈을 다 군자금에 투여하셨기 때문에 우리 수천 명의 독립군들이 총을 메고 총알을 사고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이 정성과 노력과 희생이 모여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으로부터 거둔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됐고,

이 승리의 경험은 불과 4개월 뒤인 1920년 10월 독립군 최대의 전과인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연이은 승전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벌어집니다.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상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일명 ‘자유시 참변’입니다.

당시 간도와 연해주, 사할린 등지에서 활약하던 여러 독립군들은 1921년 6월, 원동 공화국의 도시
자유시에 집결합니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
적게 잡으면 한 2,300명, 많게 잡으면 3,300명 정도의 어떤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집결했었는데, 독립군들을 어떻게 통합할 것이냐의 문제, 누가 그거를 지휘 그거를 지휘 형성해 가지고 지휘, 지도를 할 것인가. 통할권에 관한 문제죠. 이거를 가지고 갈등이 있었단 말이에요. 크게는 우리 당시에 공산주의 쪽을 지지하고 있었던 두 고려공산당의 두 양 파벌이 있었단 말이에요.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있었는데 물론 아직은 형성되기 전이지만 두 파벌이 우리 내부적으로 우리 한국, 우리 독립운동 세력인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고 또 저쪽에 러시아 볼셰비키들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노선 차이가 있었어요.

독립군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극동 공화국이 개입해 상하이파로 분류된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독립군 백여 명이 희생됐습니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당시 어떤 입장이었을까.

홍범도 장군이 역사전쟁에 휘말린 것은 원동 공화국의 독립군 무장해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논란 때문입니다.

원동 공화국의 무장해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신원식/현 국방부 장관(2022년 10월)
“비록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하나 그 뒤 내용은 자유시 거기에서 1,500명 되는 우리 독립군의 씨가 마르는 데 주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레닌에게 가서 레닌의 권총도 받고 소위 소련군이 된 이분을 굳이 흉상을 세우고 육사에 만들라고 했는지. 왜 육사 교과 과정에서 저런 걸 했는지”

자유시 참변 직후 열린 대한의용군에 대한 재판 과정에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전력도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김근태/국방포럼 대표
“홍범도 장군은 1921년 독립군을 자유시로 이끌고 가서 소련군의 공격에 의해 약 600여 명이 희생되도록 했고, 포로 860여 명에 대해서는 자신이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하였으며, 그 결과 연해주의 조선독립군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본인은 소련 정부로부터 죽을 때까지 볼셰비키 공산 당원으로서 연금혜택 등 각종 특혜를 받았다.”


#홍범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카자흐스탄 #알마티 #크즐오르다 #고려인 #자유시참변
#공산당 #레닌 #스탈린 #육군사관학교 #국방부 #이승만 #이승만기념관 #역사전쟁

방송일시: 2023년 12월 5일(화) 22시 KBS1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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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25일 발간된 독립신문 제88호, 6개월 전인 6월 7일의 승전보를 뒤늦게 전합니다.

두만강에서 10km 가량 떨어진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벌어진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였습니다.

높은 지형을 이용한 매복 작전으로 일본 측 인명피해는 전사 157명과 부상 300여명,

이에 반해 독립군의 인명피해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독립신문은 보도 했습니다.

최정주/최운산 장군 손녀
“(봉오동이) 군사지역이라서가 아니고 수자원 보호구역이라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돼서 우리가 잘 못 가고 봉오동 입구에 있는 봉오 저수지라는 대문에서만 기념 촬영을 하고 오고 그러거든요. 저희는 거기에서 봉오동 전투 현장을 한 10km 안으로 들어 들어가야지 있는 곳이고 그리고 그 길이 쭉 한 10km 정도가 봉오동을 아주 요새로 만든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쭉 들어가서 산으로 둘러 싸여져 있어요, 봉오동 현장은. 그래서 그 산에 가보면 독립군들이 팠던 참호도 있고 우리 독립군이 썼던 멧돌도 남아 있고 그런, 지금은 비어 있는 곳이죠, 그러니까. 너무 안타까운 곳입니다.”

봉오동 승리의 주역은 2개 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던 홍범도 장군.

머슴 집안에서 태어나 포수와 군인, 노동자를 거쳐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한 그는 독립군 가운데서도
특출난 유독 사랑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
"항상 자기가 위험할 때 먼저 나가서 싸우는 어떤 그런 솔선수범하는 그런 모습들 그런 모습들이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지식적으로 지식이 높지 않았던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랑 그러니까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 못지않게, 오히려 이 사람은 소외되고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그냥 사회로부터 오히려 소외당하고 착취를 받던 사람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에 대해서 그 땅 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서 자기의 어떤 가족을 몽땅 헌신했던 그런 사람이죠. 자기 부인 자기 아들 둘 다 독립운동 전선에서 희생됐던 사람이죠.”

봉오동 전투 직후 일본 측 기록에는 독립군이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돼 있다고 구체적으로 묘사됐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홍범도 장군의 명성에 가려진 또 다른 영웅 덕분이었습니다.

1910년부터 봉오동 일대에서 치밀하게 전투를 준비했고 봉오동 전투에서는 홍범도 장군보다 높은 계급인 참모장으로 활약했던 최운산 장군입니다.

최정주/최운산 장군 손녀
“봉오동 전투의 승전이 가능했던 부분은 충분한 군자금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운산 장군은 1910년 이전부터 그 일대를 소유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충분한 농산물과 그리고 러시아군에 식량을 납품하셨던 분이에요.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분이 봉오동 일대를 소유한 지주였었고 또 넓은 토지를 이용한 산업 공장을 많이 지으셨었거든요. 성냥공장, 비누공장,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등등. 많은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벌었던 돈을 다 군자금에 투여하셨기 때문에 우리 수천 명의 독립군들이 총을 메고 총알을 사고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이 정성과 노력과 희생이 모여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으로부터 거둔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됐고,

이 승리의 경험은 불과 4개월 뒤인 1920년 10월 독립군 최대의 전과인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연이은 승전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벌어집니다.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상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일명 ‘자유시 참변’입니다.

당시 간도와 연해주, 사할린 등지에서 활약하던 여러 독립군들은 1921년 6월, 원동 공화국의 도시
자유시에 집결합니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
적게 잡으면 한 2,300명, 많게 잡으면 3,300명 정도의 어떤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집결했었는데, 독립군들을 어떻게 통합할 것이냐의 문제, 누가 그거를 지휘 그거를 지휘 형성해 가지고 지휘, 지도를 할 것인가. 통할권에 관한 문제죠. 이거를 가지고 갈등이 있었단 말이에요. 크게는 우리 당시에 공산주의 쪽을 지지하고 있었던 두 고려공산당의 두 양 파벌이 있었단 말이에요.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있었는데 물론 아직은 형성되기 전이지만 두 파벌이 우리 내부적으로 우리 한국, 우리 독립운동 세력인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고 또 저쪽에 러시아 볼셰비키들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노선 차이가 있었어요.

독립군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극동 공화국이 개입해 상하이파로 분류된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독립군 백여 명이 희생됐습니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당시 어떤 입장이었을까.

홍범도 장군이 역사전쟁에 휘말린 것은 원동 공화국의 독립군 무장해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논란 때문입니다.

원동 공화국의 무장해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신원식/현 국방부 장관(2022년 10월)
“비록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하나 그 뒤 내용은 자유시 거기에서 1,500명 되는 우리 독립군의 씨가 마르는 데 주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레닌에게 가서 레닌의 권총도 받고 소위 소련군이 된 이분을 굳이 흉상을 세우고 육사에 만들라고 했는지. 왜 육사 교과 과정에서 저런 걸 했는지”

자유시 참변 직후 열린 대한의용군에 대한 재판 과정에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전력도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김근태/국방포럼 대표
“홍범도 장군은 1921년 독립군을 자유시로 이끌고 가서 소련군의 공격에 의해 약 600여 명이 희생되도록 했고, 포로 860여 명에 대해서는 자신이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하였으며, 그 결과 연해주의 조선독립군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본인은 소련 정부로부터 죽을 때까지 볼셰비키 공산 당원으로서 연금혜택 등 각종 특혜를 받았다.”


#홍범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카자흐스탄 #알마티 #크즐오르다 #고려인 #자유시참변
#공산당 #레닌 #스탈린 #육군사관학교 #국방부 #이승만 #이승만기념관 #역사전쟁

방송일시: 2023년 12월 5일(화) 22시 KBS1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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