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중 ‘애국자’의 홍콩…‘온건한 저항’도 막는다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12.13 (07:00) 수정 2023.12.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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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 된 홍콩, 이제 '온건한 저항'도 원천봉쇄

말이 가진 힘은 때로 분명할 때보다 모호할 때 더 커집니다. 여기에 분명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면 이 둘의 결합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홍콩의 중국화가 가속화 되고 이른바 친중 '애국자'의 통치가 본격화되는 지금, 홍콩 정부가 반정부 행동을 단속하겠다며 강조하는 '온건한 저항(軟對抗)'이 바로 그렇습니다.

'온건한 저항'이라는 표현이 지금의 맥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지난 2021년 4월 홍콩이 국가보안법 발표 후 처음으로 맞이했던 '국가안보 교육의 날'입니다. 뤄후이닝 당시 홍콩 주재 중국 연락판공실 주임이 '온건한 저항'을 언급하며 법규에 따라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겁니다.

"국가 안보를 해치는 모든 행위는 '강경한 저항'에 속하면 법에 따라 단속하고, '온건한 저항'에 속하면 법규에 따라 통제해야 합니다"

뤄후이닝 당시 홍콩 주재 중국 연락판공실 주임(2021년 4월)


온건한 저항이 뭘까요? 참 모호합니다. 뤄후이닝 당시 주임의 첫 언급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건한 저항의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의는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현행 법률로 처벌하기 어려운 모든 반정부적 행동을 다 단속해 뿌리뽑겠다는 홍콩 행정 당국과 중국 정부의 의지입니다.

홍콩 행정부가 온건한 저항의 예시로 다음의 두 가지 사례를 든 적이 있습니다. 홍콩 보안국장이 직접 언급한 사례입니다.

사례 1) 장기기증 신청 철회 사건

-지난해 12월 홍콩 장기기증 등록 시스템에서 6000건에 가까운 철회 신청이 접수. 홍콩 정부가 중국 본토와의 상호 장기 이식 지원 프로그램 구축을 모색하겠다 밝힌 뒤 홍콩에서 신청 철회가 폭주한 것. 철회 신청 가운데 약 절반 가량은 애초에 장기 기증을 등록한 적이 없거나 이중 철회 신청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홍콩 당국은 온라인 상에서 장기 기증 수혜자의 신원을 조사해야 한다거나 기증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며 타인의 명의를 도용해 기증철회를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온건한 저항'의 사례로 제시.

사례 2) 위구르 학생 실종 유언비어

-중국 신장 위구르 출신 대학원생이 홍콩에 갔다가 실종됐다며 중국으로 압송된 것으로 보인다고 국제 인권단체 엠네스티가 올해 5월 밝혔지만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남.

홍콩 당국은 해당 학생이 애초에 홍콩에 들어온적이 없는데도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사실을 날조한 것이라며 역시 '온건한 저항'이라고 밝힘.


공식석상에서 언급된 사례이니만큼 홍콩 행정부 입장에서 저항 색채가 가장 강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을 골랐을테지만, 정말 의도성과 고의성이 명백히 밝혀진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부적절한 기소도 '온건한 저항'?

홍콩 시민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행정 당국 자의적으로 얼마든지 온건한 저항의 범주에 넣을수도, 뺄수도 있는만큼 위에 설명한 두 가지 사례보다 온건한 저항이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될 수 있다는게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철저한 단속에 나서겠다는 홍콩 행정 당국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혹은 내리지 않고 있는) 정의를 기자가 자의적으로 내릴수는 없겠지만, 매체 기고글 등에서 온건한 저항이 될 수 있는 예시로 언급된 것들을 보면 단속 대상의 범주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추측은 해볼 수 있겠습니다.

예시 1)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청년들을 지지하는 검사가 이들을 기소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일부러 부적절한 혐의로 기소해 법원에서 처벌받지 않게끔 유도하는 경우

예시 2)
민주 진영의 입법회 의원이 당선 후 홍콩의 기본법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문을 낭독할 때 불필요하게 중간중간 멈췄다가 읽는 등 절차를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 또, 현장의 책임자들이 이를 보고도 못본척 하는 것.

예시 3)
입법회 의원들이 입법회를 해산시키고 나아가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목적 하에 다른 의원들을 선동해 의회에 상정된 안건이 부결되도록 기권표를 던지게 하는 것.

명백한 의도가 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도, 타인의 행동을 묵인하기만 해도 온건한 저항이라는 꼬리표 하에 단속과 처벌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법기관의 판단도 예외가 아닙니다.

2년 전에는 신임 홍콩 해관(우리나라의 세관에 해당) 관장이 인터뷰를 통해 "책·잡지·생활용품 같은 '온건한 저항' 물품의 수입을 단속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온건한 저항에 속하는지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내용, 함의, 사회적인 상황 등을 따져서 종합적으로 고려하겠다고도 답했습니다.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도 불만과 비판이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홍콩 당국은 이조차 원천 봉쇄하려 하고 있습니다.

존 리 홍콩 행정장관은 지난 6일 홍콩 공영방송사 RTHK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적으로 일련의 온건한 저항이 나타나고 있는데, 정부가 국가안보만 중시하고 다른것들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는 등 정부가 특정 부분만 중시한다고 고의적으로 얘기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조차 온건한 저항이라는 얘깁니다.

홍콩 공영방송 RTHK와 인터뷰하는 존 리 홍콩 행정장관. 정부가 국가안보만 중시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온건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출처 : RTHK)홍콩 공영방송 RTHK와 인터뷰하는 존 리 홍콩 행정장관. 정부가 국가안보만 중시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온건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출처 : RTHK)

■홍콩판 새 국가보안법…법망 어디까지 퍼질까

어디까지가 온건한 저항인지,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질지 내년이면 윤곽이 드러날 전망입니다.

2020년 홍콩에서 국가 분열·국가 정권 전복·테러 활동·외국 세력과의 결탁이라는 4가지 범죄를 최고 무기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보안법이 발표됐습니다. 홍콩 내 반정부·반중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중국 정부가 추진해 제정한 법입니다.

이와 별도로 홍콩 기본법 23조는 분리 독립·폭동 선동·국가 전복·국가기밀 절도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제정할 것을 규정했는데, 홍콩 정부는 이 23조에 의거해 새로운 국가보안법을 준비중입니다.

홍콩 당국은 이 새로운 홍콩판 국가보안법이 내년에 제정될 예정이라면서 온건한 저항을 다루는 내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기존의 국가보안법으로는 다 다룰 수 없었던 곳까지 법망을 넓혀 일체의 반정부 행위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도 12일 "홍콩의 국가안보 수호와 범죄 시스템에서의 공백을 보완하고 동시에 불법적인 집회와 결사, 폭동, 선동 등의 범죄와 관련해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대해서 적절히 양형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이른바 '원거리 저항(遠對抗)'까지 법망이 더 촘촘하게 확장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홍콩 학생이 SNS에 일본어로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게시글을 써 타인을 선동한 혐의로 지난달 징역 2개월에 처해졌습니다. 이 학생은 홍콩에 돌아왔다가 체포됐습니다.

온건한 저항과 마찬가지로 해외에서의 원거리 저항도 함께 단속 및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홍콩에서 나오고 있는만큼, 이 부분 역시 더 강화될 여지가 있습니다.

허가없이 공공장소에서 악기를 연주한 혐의로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60대 홍콩 남성. ‘글로리 투 홍콩’을 연주해 온건한 저항으로 지목받았다. (출처 : THE WITNESS)허가없이 공공장소에서 악기를 연주한 혐의로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60대 홍콩 남성. ‘글로리 투 홍콩’을 연주해 온건한 저항으로 지목받았다. (출처 : THE WITNESS)

올해 10월 홍콩에서 60대 남성이 허가없이 공공장소에서 악기를 연주한 혐의로 법원에서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7차례에 걸쳐 당국의 허가 없이 거리에서 얼후를 연주하고 모금을 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은 겁니다.

이 남성이 연주했던 곡은 홍콩 민주화 시위대가 불렀던 '글로리 투 홍콩(Glory to Hong Kong)'이었습니다. 재판을 맡은 판사는 해당 남성이 '온건한 저항'으로 사회적 갈등을 조장했다며 더 엄중한 죄목으로 기소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당국의 허가없이 공공장소에서 악기를 연주했다는 것은 비교적 가벼운 범죄에 속합니다. 하지만 내년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에는 어떨까요? 똑같은 방식의 '온건한 저항'에 더 무거운 혐의와 처벌이 적용될지도 모릅니다.

지난 10일 치러진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역대 최저 투표율이 나왔다.지난 10일 치러진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역대 최저 투표율이 나왔다.

■애국자가 통치하는 홍콩, 떠나가는 사람들

'성채를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고,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다(攻城為下,攻心為上)'. 온건한 저항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 한 홍콩 현지 매체 평론에 인용된 구절입니다.
남만 정벌을 앞두고 마속이 제갈량에게 남만 병사들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홍콩 독립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단념시키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테니 친중진영 '애국자'들의 통치로 홍콩을 훌륭하게 이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맥락이었습니다.

민심을 논하면서 굳이 정벌을 앞둔 군사작전에서 비롯된 구절을 인용한 것이 적절한지도 의문이지만, 이러한 사고 방식에 홍콩 시민들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더더욱 의문입니다.

지난 10일 '애국자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면서 치러진 제 7회 홍콩 구의원 선거의 투표율이 27.5%라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민주화 운동 물결이 거셌던 4년전에 70%를 넘겼던 것과 극명히 대비됩니다.

선거제도 개편 후 처음 진행된 이번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의석이 기존 452석에서 88석으로 줄었습니다. 또, 친중 진영 인사들로 채워진 지역위원회 3곳의 위원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사전 자격 심사를 통과해야만 출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민주 진영 인사들의 출마가 차단되고 정치적 다양성이 실종되면서 시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도가 대폭 낮아졌다는 분석입니다.

홍콩 민주화 운동가 아그네스 차우. 최근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홍콩 민주화 운동가 아그네스 차우. 최근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치적 무관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홍콩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유학중이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가 아그네스 차우가 최근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그네스 차우는 '민주 여신'이라는 별칭을 지닌 운동가로, 2019년 반정부 시위 당시 불법 집회에 참가한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7개월간 복역하다 2021년 6월 석방된 전력이 있습니다. 또, 석방 후에도 정기적으로 경찰에 출석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캐나다로 유학을 올 당시 경찰 출석을 위해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미리 구매했지만, 돌아갈 경우 경찰에 의해 이동을 제한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캐나다에 남기로 했다는 것이 아그네스 차우의 설명입니다.

아그네스 차우는 그러면서 "최근 몇 년간 두려움 없는 자유의 가치를 깨달았다"며 "이제 더 이상 체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고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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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중 ‘애국자’의 홍콩…‘온건한 저항’도 막는다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12-13 07:00:36
    • 수정2023-12-13 09: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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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 된 홍콩, 이제 '온건한 저항'도 원천봉쇄

말이 가진 힘은 때로 분명할 때보다 모호할 때 더 커집니다. 여기에 분명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면 이 둘의 결합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홍콩의 중국화가 가속화 되고 이른바 친중 '애국자'의 통치가 본격화되는 지금, 홍콩 정부가 반정부 행동을 단속하겠다며 강조하는 '온건한 저항(軟對抗)'이 바로 그렇습니다.

'온건한 저항'이라는 표현이 지금의 맥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지난 2021년 4월 홍콩이 국가보안법 발표 후 처음으로 맞이했던 '국가안보 교육의 날'입니다. 뤄후이닝 당시 홍콩 주재 중국 연락판공실 주임이 '온건한 저항'을 언급하며 법규에 따라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겁니다.

"국가 안보를 해치는 모든 행위는 '강경한 저항'에 속하면 법에 따라 단속하고, '온건한 저항'에 속하면 법규에 따라 통제해야 합니다"

뤄후이닝 당시 홍콩 주재 중국 연락판공실 주임(2021년 4월)


온건한 저항이 뭘까요? 참 모호합니다. 뤄후이닝 당시 주임의 첫 언급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건한 저항의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의는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현행 법률로 처벌하기 어려운 모든 반정부적 행동을 다 단속해 뿌리뽑겠다는 홍콩 행정 당국과 중국 정부의 의지입니다.

홍콩 행정부가 온건한 저항의 예시로 다음의 두 가지 사례를 든 적이 있습니다. 홍콩 보안국장이 직접 언급한 사례입니다.

사례 1) 장기기증 신청 철회 사건

-지난해 12월 홍콩 장기기증 등록 시스템에서 6000건에 가까운 철회 신청이 접수. 홍콩 정부가 중국 본토와의 상호 장기 이식 지원 프로그램 구축을 모색하겠다 밝힌 뒤 홍콩에서 신청 철회가 폭주한 것. 철회 신청 가운데 약 절반 가량은 애초에 장기 기증을 등록한 적이 없거나 이중 철회 신청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홍콩 당국은 온라인 상에서 장기 기증 수혜자의 신원을 조사해야 한다거나 기증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며 타인의 명의를 도용해 기증철회를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온건한 저항'의 사례로 제시.

사례 2) 위구르 학생 실종 유언비어

-중국 신장 위구르 출신 대학원생이 홍콩에 갔다가 실종됐다며 중국으로 압송된 것으로 보인다고 국제 인권단체 엠네스티가 올해 5월 밝혔지만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남.

홍콩 당국은 해당 학생이 애초에 홍콩에 들어온적이 없는데도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사실을 날조한 것이라며 역시 '온건한 저항'이라고 밝힘.


공식석상에서 언급된 사례이니만큼 홍콩 행정부 입장에서 저항 색채가 가장 강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을 골랐을테지만, 정말 의도성과 고의성이 명백히 밝혀진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부적절한 기소도 '온건한 저항'?

홍콩 시민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행정 당국 자의적으로 얼마든지 온건한 저항의 범주에 넣을수도, 뺄수도 있는만큼 위에 설명한 두 가지 사례보다 온건한 저항이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될 수 있다는게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철저한 단속에 나서겠다는 홍콩 행정 당국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혹은 내리지 않고 있는) 정의를 기자가 자의적으로 내릴수는 없겠지만, 매체 기고글 등에서 온건한 저항이 될 수 있는 예시로 언급된 것들을 보면 단속 대상의 범주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추측은 해볼 수 있겠습니다.

예시 1)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청년들을 지지하는 검사가 이들을 기소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일부러 부적절한 혐의로 기소해 법원에서 처벌받지 않게끔 유도하는 경우

예시 2)
민주 진영의 입법회 의원이 당선 후 홍콩의 기본법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문을 낭독할 때 불필요하게 중간중간 멈췄다가 읽는 등 절차를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 또, 현장의 책임자들이 이를 보고도 못본척 하는 것.

예시 3)
입법회 의원들이 입법회를 해산시키고 나아가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목적 하에 다른 의원들을 선동해 의회에 상정된 안건이 부결되도록 기권표를 던지게 하는 것.

명백한 의도가 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도, 타인의 행동을 묵인하기만 해도 온건한 저항이라는 꼬리표 하에 단속과 처벌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법기관의 판단도 예외가 아닙니다.

2년 전에는 신임 홍콩 해관(우리나라의 세관에 해당) 관장이 인터뷰를 통해 "책·잡지·생활용품 같은 '온건한 저항' 물품의 수입을 단속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온건한 저항에 속하는지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내용, 함의, 사회적인 상황 등을 따져서 종합적으로 고려하겠다고도 답했습니다.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도 불만과 비판이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홍콩 당국은 이조차 원천 봉쇄하려 하고 있습니다.

존 리 홍콩 행정장관은 지난 6일 홍콩 공영방송사 RTHK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적으로 일련의 온건한 저항이 나타나고 있는데, 정부가 국가안보만 중시하고 다른것들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는 등 정부가 특정 부분만 중시한다고 고의적으로 얘기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조차 온건한 저항이라는 얘깁니다.

홍콩 공영방송 RTHK와 인터뷰하는 존 리 홍콩 행정장관. 정부가 국가안보만 중시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온건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출처 : RTHK)
■홍콩판 새 국가보안법…법망 어디까지 퍼질까

어디까지가 온건한 저항인지,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질지 내년이면 윤곽이 드러날 전망입니다.

2020년 홍콩에서 국가 분열·국가 정권 전복·테러 활동·외국 세력과의 결탁이라는 4가지 범죄를 최고 무기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보안법이 발표됐습니다. 홍콩 내 반정부·반중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중국 정부가 추진해 제정한 법입니다.

이와 별도로 홍콩 기본법 23조는 분리 독립·폭동 선동·국가 전복·국가기밀 절도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제정할 것을 규정했는데, 홍콩 정부는 이 23조에 의거해 새로운 국가보안법을 준비중입니다.

홍콩 당국은 이 새로운 홍콩판 국가보안법이 내년에 제정될 예정이라면서 온건한 저항을 다루는 내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기존의 국가보안법으로는 다 다룰 수 없었던 곳까지 법망을 넓혀 일체의 반정부 행위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도 12일 "홍콩의 국가안보 수호와 범죄 시스템에서의 공백을 보완하고 동시에 불법적인 집회와 결사, 폭동, 선동 등의 범죄와 관련해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대해서 적절히 양형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이른바 '원거리 저항(遠對抗)'까지 법망이 더 촘촘하게 확장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홍콩 학생이 SNS에 일본어로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게시글을 써 타인을 선동한 혐의로 지난달 징역 2개월에 처해졌습니다. 이 학생은 홍콩에 돌아왔다가 체포됐습니다.

온건한 저항과 마찬가지로 해외에서의 원거리 저항도 함께 단속 및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홍콩에서 나오고 있는만큼, 이 부분 역시 더 강화될 여지가 있습니다.

허가없이 공공장소에서 악기를 연주한 혐의로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60대 홍콩 남성. ‘글로리 투 홍콩’을 연주해 온건한 저항으로 지목받았다. (출처 : THE WITNESS)
올해 10월 홍콩에서 60대 남성이 허가없이 공공장소에서 악기를 연주한 혐의로 법원에서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7차례에 걸쳐 당국의 허가 없이 거리에서 얼후를 연주하고 모금을 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은 겁니다.

이 남성이 연주했던 곡은 홍콩 민주화 시위대가 불렀던 '글로리 투 홍콩(Glory to Hong Kong)'이었습니다. 재판을 맡은 판사는 해당 남성이 '온건한 저항'으로 사회적 갈등을 조장했다며 더 엄중한 죄목으로 기소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당국의 허가없이 공공장소에서 악기를 연주했다는 것은 비교적 가벼운 범죄에 속합니다. 하지만 내년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에는 어떨까요? 똑같은 방식의 '온건한 저항'에 더 무거운 혐의와 처벌이 적용될지도 모릅니다.

지난 10일 치러진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역대 최저 투표율이 나왔다.
■애국자가 통치하는 홍콩, 떠나가는 사람들

'성채를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고,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다(攻城為下,攻心為上)'. 온건한 저항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 한 홍콩 현지 매체 평론에 인용된 구절입니다.
남만 정벌을 앞두고 마속이 제갈량에게 남만 병사들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홍콩 독립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단념시키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테니 친중진영 '애국자'들의 통치로 홍콩을 훌륭하게 이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맥락이었습니다.

민심을 논하면서 굳이 정벌을 앞둔 군사작전에서 비롯된 구절을 인용한 것이 적절한지도 의문이지만, 이러한 사고 방식에 홍콩 시민들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더더욱 의문입니다.

지난 10일 '애국자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면서 치러진 제 7회 홍콩 구의원 선거의 투표율이 27.5%라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민주화 운동 물결이 거셌던 4년전에 70%를 넘겼던 것과 극명히 대비됩니다.

선거제도 개편 후 처음 진행된 이번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의석이 기존 452석에서 88석으로 줄었습니다. 또, 친중 진영 인사들로 채워진 지역위원회 3곳의 위원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사전 자격 심사를 통과해야만 출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민주 진영 인사들의 출마가 차단되고 정치적 다양성이 실종되면서 시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도가 대폭 낮아졌다는 분석입니다.

홍콩 민주화 운동가 아그네스 차우. 최근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치적 무관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홍콩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유학중이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가 아그네스 차우가 최근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그네스 차우는 '민주 여신'이라는 별칭을 지닌 운동가로, 2019년 반정부 시위 당시 불법 집회에 참가한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7개월간 복역하다 2021년 6월 석방된 전력이 있습니다. 또, 석방 후에도 정기적으로 경찰에 출석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캐나다로 유학을 올 당시 경찰 출석을 위해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미리 구매했지만, 돌아갈 경우 경찰에 의해 이동을 제한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캐나다에 남기로 했다는 것이 아그네스 차우의 설명입니다.

아그네스 차우는 그러면서 "최근 몇 년간 두려움 없는 자유의 가치를 깨달았다"며 "이제 더 이상 체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고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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