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 탁본은 어떻게 프랑스로 건너갔나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12.25 (08:01) 수정 2023.12.26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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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게 왜 여기에 있나 했는데 하나가 더 있다니 너무 놀라웠죠."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대재 교수가 프랑스에서 새로운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확인한 순간의 소감입니다.

프랑스 유명 고등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 내 아시아학회 도서관에서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 본이 발견됐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습니다. 높이가 6미터가 넘어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유리건판 사진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유리건판 사진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비석의 네 면에 1,775자의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가, 두 번째 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역사가 연도별로 자세히 기록돼 있고, 세 번째는 광개토대왕의 능묘를 지킬 수묘인에 관한 규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비문을 찍어낸 탁본은 지금까지 약 100종이 확인됐습니다. 대부분 동아시아 지역에 전해지고 그 외 지역에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게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하나가 추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 처음 발견부터 최종 확인까지

이 탁본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시아학회 도서관 책임 사서인 아미나 아부드레만 씨입니다. 지난해 말 학회 창립 200주년 기념 전시를 준비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서고에서 우연히 두 개의 작은 상자를 발견했고, 그 안에 이 탁본이 담겨 있었다는데요. 접혀 있었고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아미나 씨는 기억했습니다. 또 탁본을 펴 보니 크기가 상당히 커 매우 놀랐다고도 전했습니다.

아미나 씨는 탁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라' 등의 글자가 있어, 중국 자료는 아니라고 생각해 같은 기관 내 '한국도서관' 책임자인 노미숙 사서에게 전화했다고 합니다. 이어 탁본을 살펴본 노 사서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광개토대왕비 탁본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남은 퍼즐은 이 탁본이 그동안 프랑스에 있다고 알려진 그 탁본(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인지, 아니면 새로운 탁본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프랑스 내 아시아 학계에서도 탁본이 프랑스에 한 본 있다는 것은 알아도, 어느 기관에 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몰랐다고 합니다.

마침 올해 프랑스 파리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가 지난 9월 '콜레주 드 프랑스' 도서관을 찾아 에두아르 샤반이 남긴 자료를 찾던 중 아미나 사서를 만났고, 아미나 사서가 이 탁본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드디어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집니다.

탁본 최초 발견자인 아미나 사서와 최종 확인자인 박대재 교수가 탁본을 펼치고 있다.탁본 최초 발견자인 아미나 사서와 최종 확인자인 박대재 교수가 탁본을 펼치고 있다.

박 교수는 처음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어야 할 탁본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의아했지만 이내 그 탁본과는 다른,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탁본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백여 년 동안 프랑스 파리의 한 도서관 서고에서 잠자던 탁본은 현지인 사서의 우연한 발견, 한국인 사서와 한국인 교수와의 잇따른 운명적인 만남을 거쳐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됐습니다.

■ 어떻게 프랑스로 왔나

이 탁본이 어떻게 프랑스까지 건너오게 됐을까요. 다행히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17년 5월 11일 자 아시아학회 회의록에는 이 학회 회원이던 앨리스 게티(1865~1946년)라는 인물이 '414년에 제작된 고구려에 관한 고대 문서인 탁본들을 기증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 동양학자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이자 역시 아시아학회 회원인 에두아르 샤반(1865∼1918년)이 이 탁본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고 덧붙여져 있습니다.

에두아르 샤반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을 수집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을 따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은 '샤반본'으로 불립니다.

앨리스 게티가 기증한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 이른바 '게티본'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탁본을 소개했던 샤반이 이듬해인 1918년 1월 건강 악화로 숨지면서, 탁본에 관한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 발견된 프랑스 광개토대왕비 탁본(‘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 흰 부분은 비석 글자가 떨어져 나가거나 균열이 생겨 제대로 찍히지 않은 흔적이다.새로 발견된 프랑스 광개토대왕비 탁본(‘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 흰 부분은 비석 글자가 떨어져 나가거나 균열이 생겨 제대로 찍히지 않은 흔적이다.

앨리스 게티는 당시 아시아 불교 미술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했는데 1914년에는 중국과 티베트, 몽골, 일본 등 북방 불교의 불상과 도상에 관한 자료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게티 여사는 이 자료집을 내기 전 6년간 자료 조사를 위해 인도와 동아시아 지역을 세 차례 여행했는데, 이 무렵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수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대재 교수는 게티 여사가 중국 베이징에 있는 골동품 상가, 유리창에서 탁본을 사 오지 않았을까 추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유달리 프랑스에서 한국의 옛 문헌이나 자료들이 잘 발견되는 데 대해선 당시 프랑스 연구자들이 영국이나 독일 등 주변국 연구자들보다 한자 이해도가 높았던 영향 때문으로 박 교수는 분석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런 자료들을 알아보고 가져올 수 있었고, 그래서 프랑스에 흥미로운 자료가 많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그동안 왜 알려지지 않았나?

그렇다면 왜 106년 동안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걸까요. 1990년대 장 피에르 드레주 교수팀이 이 탁본 관련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한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아시아학회 소장본(이른바 '게티본')이 '샤반(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 수집자)'에 의해 수집됐다고 쓰고, 탁본 이미지도 '샤반본'으로 잘못 올린 겁니다. 또 보고서의 발간 연도도 1906년으로 잘못 표기했습니다.

이는 '샤반본(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과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이런 혼동으로 인해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결국 그 존재가 잊혀진 채 서고의 작은 상자 안에 오랜 시간 방치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사료적 가치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4개 면을 찍어 4개 장으로 돼 있는데, 새로 발견된 이 탁본은 3면이 없고, 2면이 두 장 중복된 게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100여 종의 탁본 가운데, 이렇게 같은 시기에 제작된 탁본이 두 장 중복된 건 이 탁본이 유일합니다.

박대재 교수는 처음에는 3면이 없는 점에 실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면이 중복된 게 오히려 탁본의 제작 방식과 연대 추정에는 새로운 근거가 될 수 있어, '샤반본'과는 다른 가치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탁본 중간중간 지워진 부분도 다른 탁본들과 비교해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탁본은 비석 면에 균열이 있거나 글자가 선명하지 않은 부분에 석회를 발라 조정한 후에 찍어낸 '석회 탁본'입니다.

현재 전해지는 탁본 가운데 80%가 '석회 탁본'에 속합니다. 반면 원래의 비석 면에 별도로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탁본한 건 '원석 탁본'이라 합니다. 비교적 더 이른 시기의 비석 모습을 담고 있고, 전해지는 본도 훨씬 적어 사료적 가치가 더 높습니다.

다만 석회 탁본은 비석의 글자가 떨어져 나간 부분들이 제작 시기마다 어떻게 변화됐는지는 볼 수 있고, 또 여러 석회 탁본들의 비교를 통해 원래 글자가 무엇인지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은 2면이 중복된 독특한 특징 때문에 그런 점을 추론하기에 상당히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이 탁본이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박대재 교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새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내용 면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다만 초기에는 비면에 석회를 바르는 그런 작업이 일본 군인들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설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이후 연구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중국인 탁공들이 글자가 잘 보이는 탁본을 만들기 위해서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뜬 것으로 연구돼 왔거든요.

물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임나일본부설이 학계에 매우 큰 이슈였죠. 그런데 80~90년대 연구를 거치면서 일본이 유리하게 조작한 건 아니고 중국인 탁공이 탁본을 비싸게 팔기 위해 석회를 바르는 석회 탁본을 만들었다는 게 그동안 연구에서 밝혀지게 된 거죠. 광개토왕 비문이 일본에 의해 조작됐다는 설은 이제는 학계에서도 사실상 구문이 됐습니다."

탁본 최초 발견자인 아미나 사서는 평소 도서관에 가서 잘 살펴보면 '한국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 이 탁본을 발견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박대재 교수는 프랑스에서만 탁본이 두 본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프랑스 내 여러 대학 도서관에서도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국 관련 옛 문헌이나 고서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 같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한국 자료 소장 기관조차 한국 자료를 담당하는 사서나 큐레이터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 자료 담당자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관련해 이번 탁본의 존재를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박 교수가 취재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렇습니다. "더 많은 새로운 한국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파리의 주요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한국 담당 사서나 큐레이터가 배치돼야 하는데 이런 부분은 민간 차원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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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어떻게 프랑스로 건너갔나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12-25 08:01:50
    • 수정2023-12-26 04: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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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게 왜 여기에 있나 했는데 하나가 더 있다니 너무 놀라웠죠."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대재 교수가 프랑스에서 새로운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확인한 순간의 소감입니다.

프랑스 유명 고등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 내 아시아학회 도서관에서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 본이 발견됐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습니다. 높이가 6미터가 넘어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유리건판 사진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비석의 네 면에 1,775자의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가, 두 번째 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역사가 연도별로 자세히 기록돼 있고, 세 번째는 광개토대왕의 능묘를 지킬 수묘인에 관한 규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비문을 찍어낸 탁본은 지금까지 약 100종이 확인됐습니다. 대부분 동아시아 지역에 전해지고 그 외 지역에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게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하나가 추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 처음 발견부터 최종 확인까지

이 탁본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시아학회 도서관 책임 사서인 아미나 아부드레만 씨입니다. 지난해 말 학회 창립 200주년 기념 전시를 준비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서고에서 우연히 두 개의 작은 상자를 발견했고, 그 안에 이 탁본이 담겨 있었다는데요. 접혀 있었고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아미나 씨는 기억했습니다. 또 탁본을 펴 보니 크기가 상당히 커 매우 놀랐다고도 전했습니다.

아미나 씨는 탁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라' 등의 글자가 있어, 중국 자료는 아니라고 생각해 같은 기관 내 '한국도서관' 책임자인 노미숙 사서에게 전화했다고 합니다. 이어 탁본을 살펴본 노 사서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광개토대왕비 탁본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남은 퍼즐은 이 탁본이 그동안 프랑스에 있다고 알려진 그 탁본(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인지, 아니면 새로운 탁본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프랑스 내 아시아 학계에서도 탁본이 프랑스에 한 본 있다는 것은 알아도, 어느 기관에 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몰랐다고 합니다.

마침 올해 프랑스 파리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가 지난 9월 '콜레주 드 프랑스' 도서관을 찾아 에두아르 샤반이 남긴 자료를 찾던 중 아미나 사서를 만났고, 아미나 사서가 이 탁본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드디어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집니다.

탁본 최초 발견자인 아미나 사서와 최종 확인자인 박대재 교수가 탁본을 펼치고 있다.
박 교수는 처음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어야 할 탁본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의아했지만 이내 그 탁본과는 다른,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탁본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백여 년 동안 프랑스 파리의 한 도서관 서고에서 잠자던 탁본은 현지인 사서의 우연한 발견, 한국인 사서와 한국인 교수와의 잇따른 운명적인 만남을 거쳐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됐습니다.

■ 어떻게 프랑스로 왔나

이 탁본이 어떻게 프랑스까지 건너오게 됐을까요. 다행히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17년 5월 11일 자 아시아학회 회의록에는 이 학회 회원이던 앨리스 게티(1865~1946년)라는 인물이 '414년에 제작된 고구려에 관한 고대 문서인 탁본들을 기증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 동양학자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이자 역시 아시아학회 회원인 에두아르 샤반(1865∼1918년)이 이 탁본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고 덧붙여져 있습니다.

에두아르 샤반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을 수집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을 따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은 '샤반본'으로 불립니다.

앨리스 게티가 기증한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 이른바 '게티본'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탁본을 소개했던 샤반이 이듬해인 1918년 1월 건강 악화로 숨지면서, 탁본에 관한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 발견된 프랑스 광개토대왕비 탁본(‘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 흰 부분은 비석 글자가 떨어져 나가거나 균열이 생겨 제대로 찍히지 않은 흔적이다.
앨리스 게티는 당시 아시아 불교 미술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했는데 1914년에는 중국과 티베트, 몽골, 일본 등 북방 불교의 불상과 도상에 관한 자료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게티 여사는 이 자료집을 내기 전 6년간 자료 조사를 위해 인도와 동아시아 지역을 세 차례 여행했는데, 이 무렵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수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대재 교수는 게티 여사가 중국 베이징에 있는 골동품 상가, 유리창에서 탁본을 사 오지 않았을까 추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유달리 프랑스에서 한국의 옛 문헌이나 자료들이 잘 발견되는 데 대해선 당시 프랑스 연구자들이 영국이나 독일 등 주변국 연구자들보다 한자 이해도가 높았던 영향 때문으로 박 교수는 분석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런 자료들을 알아보고 가져올 수 있었고, 그래서 프랑스에 흥미로운 자료가 많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그동안 왜 알려지지 않았나?

그렇다면 왜 106년 동안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걸까요. 1990년대 장 피에르 드레주 교수팀이 이 탁본 관련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한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아시아학회 소장본(이른바 '게티본')이 '샤반(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 수집자)'에 의해 수집됐다고 쓰고, 탁본 이미지도 '샤반본'으로 잘못 올린 겁니다. 또 보고서의 발간 연도도 1906년으로 잘못 표기했습니다.

이는 '샤반본(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과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이런 혼동으로 인해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결국 그 존재가 잊혀진 채 서고의 작은 상자 안에 오랜 시간 방치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사료적 가치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4개 면을 찍어 4개 장으로 돼 있는데, 새로 발견된 이 탁본은 3면이 없고, 2면이 두 장 중복된 게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100여 종의 탁본 가운데, 이렇게 같은 시기에 제작된 탁본이 두 장 중복된 건 이 탁본이 유일합니다.

박대재 교수는 처음에는 3면이 없는 점에 실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면이 중복된 게 오히려 탁본의 제작 방식과 연대 추정에는 새로운 근거가 될 수 있어, '샤반본'과는 다른 가치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탁본 중간중간 지워진 부분도 다른 탁본들과 비교해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탁본은 비석 면에 균열이 있거나 글자가 선명하지 않은 부분에 석회를 발라 조정한 후에 찍어낸 '석회 탁본'입니다.

현재 전해지는 탁본 가운데 80%가 '석회 탁본'에 속합니다. 반면 원래의 비석 면에 별도로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탁본한 건 '원석 탁본'이라 합니다. 비교적 더 이른 시기의 비석 모습을 담고 있고, 전해지는 본도 훨씬 적어 사료적 가치가 더 높습니다.

다만 석회 탁본은 비석의 글자가 떨어져 나간 부분들이 제작 시기마다 어떻게 변화됐는지는 볼 수 있고, 또 여러 석회 탁본들의 비교를 통해 원래 글자가 무엇인지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아시아학회 도서관 소장본'은 2면이 중복된 독특한 특징 때문에 그런 점을 추론하기에 상당히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이 탁본이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박대재 교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새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내용 면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다만 초기에는 비면에 석회를 바르는 그런 작업이 일본 군인들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설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이후 연구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중국인 탁공들이 글자가 잘 보이는 탁본을 만들기 위해서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뜬 것으로 연구돼 왔거든요.

물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임나일본부설이 학계에 매우 큰 이슈였죠. 그런데 80~90년대 연구를 거치면서 일본이 유리하게 조작한 건 아니고 중국인 탁공이 탁본을 비싸게 팔기 위해 석회를 바르는 석회 탁본을 만들었다는 게 그동안 연구에서 밝혀지게 된 거죠. 광개토왕 비문이 일본에 의해 조작됐다는 설은 이제는 학계에서도 사실상 구문이 됐습니다."

탁본 최초 발견자인 아미나 사서는 평소 도서관에 가서 잘 살펴보면 '한국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 이 탁본을 발견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박대재 교수는 프랑스에서만 탁본이 두 본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프랑스 내 여러 대학 도서관에서도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국 관련 옛 문헌이나 고서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 같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한국 자료 소장 기관조차 한국 자료를 담당하는 사서나 큐레이터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 자료 담당자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관련해 이번 탁본의 존재를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박 교수가 취재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렇습니다. "더 많은 새로운 한국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파리의 주요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한국 담당 사서나 큐레이터가 배치돼야 하는데 이런 부분은 민간 차원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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