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실 없다고 제보했더니 해고”…건설현장 단속 1년, 현장은?

입력 2024.01.11 (16:43) 수정 2024.01.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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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경기도 고양시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채 모 씨는 더운 날씨에도 땡볕을 피할 휴게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직 5월이었지만 낮 최고 기온은 27도를 넘어갔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가득한 건설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현장의 안내 표지판엔 휴게시설이 5곳 있다고 표시돼있었지만, 실제론 없었습니다. 채 씨는 더위를 피할 휴게실과 에어컨 설치를 요청했는데, 곧바로 현장소장으로부터 퇴사를 강요하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채 씨는 "더운 날씨에 일하고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며 넘어갔지만, 한낮 기온이 32도를 넘어서는 등 폭염이 시작된 6월에도 변화는 없었습니다. 다시 민원을 제기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언론사 제보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회사는 기사가 나간 뒤 사흘 만에 채 씨에게 해고를 통지했습니다.

형틀목수 노동자 채 모 씨가 지난해 6월 언론에 제보한 사진들.형틀목수 노동자 채 모 씨가 지난해 6월 언론에 제보한 사진들.

■ "문제 제기하면 나만 손해"…공익신고했더니 수사받았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오늘(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노조 탄압이 건설현장 노동안전보건에 끼치는 영향' 토론회를 열고 현장 노동자들의 현장 증언을 소개했습니다.

형틀목수 노동자 이영춘 씨는 오늘 토론회에서 채 씨 사례를 전하며 "이렇게 건설 현장은 점점 산업안전을 지킬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던 분들은 생계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블랙리스트가 된다. 오히려 나만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침묵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형틀목수 노동자 채 모 씨는 언론사에 휴게실이 없다는 내용의 제보를 한 뒤 해고 통보를 받았다.형틀목수 노동자 채 모 씨는 언론사에 휴게실이 없다는 내용의 제보를 한 뒤 해고 통보를 받았다.

또 다른 사례도 있었습니다. 타설 노동자 김용기 씨는 '조금 더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현장에 CPB(콘크리트 플레이싱 붐)를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2022년부터 부산·울산·경남건설지부 타설분회를 돌며 홍보 활동을 했고, 공사 관계자들에게 CPB 설치를 약속하는 협약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CPB 설치를 요구한 것과 관련해 여러 차례 협박·강요 혐의로 경찰·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힘들게 협약서를 받아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는 현장이 80%에 달했습니다.

김 씨는 "이야기하면 말 많은 노동자가 되고 시키는 대로 안 하는 노동자가 되어 현장 퇴출까지도 거론된다"며 "그러니 누가 안전을 이야기 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습니다.


손익찬 일과사람 변호사는 '건설노조 조합원' 신분을 밝히고 건설 현장에서 일어난 불법행위를 공익신고한 노동자들이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불법행위를 신고했다가 되레 건조물침입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거나, 원청사에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 민원 내용이 그대로 넘어간 일도 있었습니다.

손 변호사는 "건설현장에서 이뤄지는 불법행위를 보고 민원을 제기했을 뿐이지만, 돌아오는 것은 피의자로 수사받는 것, 신상정보가 공개된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이어 "이는 결국 건설노조 조합원 신분을 밝힌 민원 전체에 관해서는 민원 내용의 진설성을 떠나서 민원인을 법률적으로 괴롭히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며 "안전하고 깨끗한 건설현장을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기업을 귀찮게 하는 조합원을 벌주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경찰·검찰 조사받은 건설 노동자들, 스트레스 고위험군이 57%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건설노조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이에 따라 노동조합 활동이 위축되고 안전·보건 활동이 경시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건설노조를 비판하고 있는 만큼,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더 힘들어졌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 고 양회동 씨가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분신해 숨진 직후, 경찰·검찰·법원 등에 출석한 경험이 있는 건설 노동자들의 스트레스 수준을 조사한 결과 고위험군이 절반을 넘어선 거로 나타났습니다.

조사 결과를 분석한 장경희 심리치유단체 두리공감 상임활동가는 "앞으로 돌아갈 곳이 없고 내 생계가 심각하게 변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크기 때문에 사회심리 스트레스 고위험군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우울감 역시 심했습니다. '우울 고위험군'에 속하는 노동자는 46.7%에 달했는데, 이는 일반 사업장(11%), 노조파괴 사업장(43.3%),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28.6%), 지역 장기투쟁 사업장(23.1%) 등과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한 노동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장경희 활동가는 "400명 중 21명이 거의 매일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다. 대한민국 자살률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심각한 지표"라며 "긴급한 심리지원과 함께 조직 차원에서 조합원의 불안감을 덜기 위한 안전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 노동조합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류현철 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다단계 하청업체의 건설 일용직 노동자나 불안정한 특수형태근로자로서의 건설기계 기사들이 과연 혈혈단신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향후 생계를 걸고 현장의 위험을 제기하고 작업을 중지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건설업 안전보건에서는 조직된 노동조합의 요구가 실제로 현장의 재해예방에 기여해온 바가 크다"며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사 간의 현저한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거나 노동조합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는, 현장의 위험을 드러내는 일은 입바른 소리로 치부되고 결국 중대 재해로 이어져야만 현장의 위험이 드러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2022년 12월 건설 현장 불법 행위에 대한 집중 단속, 이른바 '건폭과의 전쟁'에 나선 지 이제 1년이 지났습니다. 경찰은 지난해 8월까지 4,829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이 가운데 11월 초까지 1심 선고가 내려진 사람은 144명으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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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4-01-11 17:5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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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경기도 고양시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채 모 씨는 더운 날씨에도 땡볕을 피할 휴게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직 5월이었지만 낮 최고 기온은 27도를 넘어갔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가득한 건설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현장의 안내 표지판엔 휴게시설이 5곳 있다고 표시돼있었지만, 실제론 없었습니다. 채 씨는 더위를 피할 휴게실과 에어컨 설치를 요청했는데, 곧바로 현장소장으로부터 퇴사를 강요하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채 씨는 "더운 날씨에 일하고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며 넘어갔지만, 한낮 기온이 32도를 넘어서는 등 폭염이 시작된 6월에도 변화는 없었습니다. 다시 민원을 제기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언론사 제보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회사는 기사가 나간 뒤 사흘 만에 채 씨에게 해고를 통지했습니다.

형틀목수 노동자 채 모 씨가 지난해 6월 언론에 제보한 사진들.
■ "문제 제기하면 나만 손해"…공익신고했더니 수사받았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오늘(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노조 탄압이 건설현장 노동안전보건에 끼치는 영향' 토론회를 열고 현장 노동자들의 현장 증언을 소개했습니다.

형틀목수 노동자 이영춘 씨는 오늘 토론회에서 채 씨 사례를 전하며 "이렇게 건설 현장은 점점 산업안전을 지킬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던 분들은 생계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블랙리스트가 된다. 오히려 나만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침묵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형틀목수 노동자 채 모 씨는 언론사에 휴게실이 없다는 내용의 제보를 한 뒤 해고 통보를 받았다.
또 다른 사례도 있었습니다. 타설 노동자 김용기 씨는 '조금 더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현장에 CPB(콘크리트 플레이싱 붐)를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2022년부터 부산·울산·경남건설지부 타설분회를 돌며 홍보 활동을 했고, 공사 관계자들에게 CPB 설치를 약속하는 협약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CPB 설치를 요구한 것과 관련해 여러 차례 협박·강요 혐의로 경찰·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힘들게 협약서를 받아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는 현장이 80%에 달했습니다.

김 씨는 "이야기하면 말 많은 노동자가 되고 시키는 대로 안 하는 노동자가 되어 현장 퇴출까지도 거론된다"며 "그러니 누가 안전을 이야기 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습니다.


손익찬 일과사람 변호사는 '건설노조 조합원' 신분을 밝히고 건설 현장에서 일어난 불법행위를 공익신고한 노동자들이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불법행위를 신고했다가 되레 건조물침입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거나, 원청사에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 민원 내용이 그대로 넘어간 일도 있었습니다.

손 변호사는 "건설현장에서 이뤄지는 불법행위를 보고 민원을 제기했을 뿐이지만, 돌아오는 것은 피의자로 수사받는 것, 신상정보가 공개된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이어 "이는 결국 건설노조 조합원 신분을 밝힌 민원 전체에 관해서는 민원 내용의 진설성을 떠나서 민원인을 법률적으로 괴롭히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며 "안전하고 깨끗한 건설현장을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기업을 귀찮게 하는 조합원을 벌주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경찰·검찰 조사받은 건설 노동자들, 스트레스 고위험군이 57%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건설노조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이에 따라 노동조합 활동이 위축되고 안전·보건 활동이 경시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건설노조를 비판하고 있는 만큼,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더 힘들어졌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 고 양회동 씨가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분신해 숨진 직후, 경찰·검찰·법원 등에 출석한 경험이 있는 건설 노동자들의 스트레스 수준을 조사한 결과 고위험군이 절반을 넘어선 거로 나타났습니다.

조사 결과를 분석한 장경희 심리치유단체 두리공감 상임활동가는 "앞으로 돌아갈 곳이 없고 내 생계가 심각하게 변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크기 때문에 사회심리 스트레스 고위험군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우울감 역시 심했습니다. '우울 고위험군'에 속하는 노동자는 46.7%에 달했는데, 이는 일반 사업장(11%), 노조파괴 사업장(43.3%),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28.6%), 지역 장기투쟁 사업장(23.1%) 등과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한 노동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장경희 활동가는 "400명 중 21명이 거의 매일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다. 대한민국 자살률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심각한 지표"라며 "긴급한 심리지원과 함께 조직 차원에서 조합원의 불안감을 덜기 위한 안전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 노동조합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류현철 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다단계 하청업체의 건설 일용직 노동자나 불안정한 특수형태근로자로서의 건설기계 기사들이 과연 혈혈단신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향후 생계를 걸고 현장의 위험을 제기하고 작업을 중지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건설업 안전보건에서는 조직된 노동조합의 요구가 실제로 현장의 재해예방에 기여해온 바가 크다"며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사 간의 현저한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거나 노동조합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는, 현장의 위험을 드러내는 일은 입바른 소리로 치부되고 결국 중대 재해로 이어져야만 현장의 위험이 드러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2022년 12월 건설 현장 불법 행위에 대한 집중 단속, 이른바 '건폭과의 전쟁'에 나선 지 이제 1년이 지났습니다. 경찰은 지난해 8월까지 4,829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이 가운데 11월 초까지 1심 선고가 내려진 사람은 144명으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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