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5병 마시고 아내 둔기로 살해…‘심신미약’ 주장한 남편

입력 2024.01.2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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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는 B 씨와 결혼한 후 5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아내 B 씨는 부지런히 식당 일을 해 모은 돈으로 자신 명의의 아파트를 매입했지만, A 씨는 이따금 일용직 노동을 할 뿐 정해진 직업이 없어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A 씨는 이후 본인이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지 못하고 자녀들이 아내와만 교류하자 가장으로서 열등감을 가졌고, 수십 년 전부터 술에 취하면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때리거나 위협하고 집안 물건을 부쉈습니다.

A 씨는 수년 전부터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이며 폭력이 심해졌습니다.

급기야 2020년에는 아내 B 씨에게 "불을 질러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라이터로 집 안방 옷가지에 불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A 씨는 이 범행으로 2021년 현주건조물방화미수죄로 기소됐고, 서울남부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가 확정됐습니다.

■ "불 질러 죽인다" 옷가지에 불 붙여…집행유예

A 씨는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던 2023년 2월, 근처 공원 등을 돌아다니다 저녁 8시쯤 주점에서 맥주 5병을 마신 후 자정이 넘어 편의점에서 소주와 안주를 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술에 취한 A 씨는 B 씨에게 "집이 당신 명의이니 집을 담보로 1,000만 원 정도 대출을 받아 돈을 좀 달라"고 말했고, B 씨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말다툼은 밀고 당기는 몸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A 씨는 안방으로 피한 B 씨를 따라 들어가 계속 다투던 중, 베란다로 나가 수납장에 있는 둔기를 꺼낸 뒤, 잠겨 있던 안방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앉아 있던 B 씨의 뒤통수 부분을 가격했고, 30여 차례 때려 B 씨를 살해했습니다. 당시 한 자녀가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범행 후 A 씨는 둔기를 베란다 수납장 부근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A 씨는 범행 직후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A 씨는 살인죄로 기소됐습니다.


■ "알코올 중독은 맞아…심신미약은 불인정"

재판에서의 쟁점은 당시 A 씨가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만약 그렇다면 형을 감경해야 하는지였습니다.

1심 서울남부지법은 A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A 씨가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 당시 맥주 5병 이상의 술을 마신 사실, 범행 전 알코올 의존증후군 등으로 2020년부터 2021년까지 3개월 가량 입원한 것을 비롯해 몇 차례 병원치료를 받은 사실, 전문심리위원 전문의가 피고인이 적어도 중증도 내지 고도의 알코올 중독 증상 상태라는 소견을 밝힌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 A 씨가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이르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A 씨의 범행도구의 이용과정 등에서는 피고인의 사물변별능력이 충분히 확인된다"며, "범행 직후 배우자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의하면 피고인은 당시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 윤리적 의미를 판단하는 의사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A 씨가 수사기관에서 범행 당시의 주요 상황이나 당시 대화 내용, 공격행위 등에 대해 비교적 명확하게 진술한 점, 전문심리위원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 당시 음주로 인하여 의식이 저하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점 등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재판부는 양형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은 배우자를 살해하는 행위는 가장 존엄하고도 중대한 법익인 사람의 생명을 박탈함과 동시에 혼인관계에 기초한 법적·도덕적 책무를 원천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며 "가족 간의 윤리와 애정을 무너뜨리고 남아있는 자녀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남기므로 그 죄책이 매우 무겁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50년간의 혼인 기간 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피해자는 피고인의 범행으로 인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귀중한 생명을 잃었는바 범행 결과가 극히 중하다. 피고인의 무리한 금전적 요구를 피해자가 거절하자 피고인이 이에 격분하여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는바, 그 범행 동기에 참작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범행 수법이 매우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피고인은 평소 피해자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아왔고 근래에는 피해자를 상대로 한 방화미수 범행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았음에도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지극히 참담한 상황을 겪게 된 피해자 자녀들의 심적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자녀들은 현재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재판부는 다만 A 씨가 정신병원에서 알코올 의존증후군, 뇌전증 등으로 입원치료를 받는 등의 병력이 있었던 점 등에 비춰 범행 당시 사리분별력이 다소 떨어진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범행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점, 70대의 고령이고 40여 년간 실형을 선고받은 범죄전력이 없는 점을 감안했다고 설명했습니다.

A 씨는 형이 무겁다며, 검사는 형이 가볍다며 각각 항소했지만 2심 서울고법은 항소를 기각하고 1심 판결을 유지했습니다.

대법원도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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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23 1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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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는 B 씨와 결혼한 후 5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아내 B 씨는 부지런히 식당 일을 해 모은 돈으로 자신 명의의 아파트를 매입했지만, A 씨는 이따금 일용직 노동을 할 뿐 정해진 직업이 없어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A 씨는 이후 본인이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지 못하고 자녀들이 아내와만 교류하자 가장으로서 열등감을 가졌고, 수십 년 전부터 술에 취하면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때리거나 위협하고 집안 물건을 부쉈습니다.

A 씨는 수년 전부터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이며 폭력이 심해졌습니다.

급기야 2020년에는 아내 B 씨에게 "불을 질러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라이터로 집 안방 옷가지에 불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A 씨는 이 범행으로 2021년 현주건조물방화미수죄로 기소됐고, 서울남부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가 확정됐습니다.

■ "불 질러 죽인다" 옷가지에 불 붙여…집행유예

A 씨는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던 2023년 2월, 근처 공원 등을 돌아다니다 저녁 8시쯤 주점에서 맥주 5병을 마신 후 자정이 넘어 편의점에서 소주와 안주를 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술에 취한 A 씨는 B 씨에게 "집이 당신 명의이니 집을 담보로 1,000만 원 정도 대출을 받아 돈을 좀 달라"고 말했고, B 씨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말다툼은 밀고 당기는 몸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A 씨는 안방으로 피한 B 씨를 따라 들어가 계속 다투던 중, 베란다로 나가 수납장에 있는 둔기를 꺼낸 뒤, 잠겨 있던 안방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앉아 있던 B 씨의 뒤통수 부분을 가격했고, 30여 차례 때려 B 씨를 살해했습니다. 당시 한 자녀가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범행 후 A 씨는 둔기를 베란다 수납장 부근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A 씨는 범행 직후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A 씨는 살인죄로 기소됐습니다.


■ "알코올 중독은 맞아…심신미약은 불인정"

재판에서의 쟁점은 당시 A 씨가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만약 그렇다면 형을 감경해야 하는지였습니다.

1심 서울남부지법은 A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A 씨가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 당시 맥주 5병 이상의 술을 마신 사실, 범행 전 알코올 의존증후군 등으로 2020년부터 2021년까지 3개월 가량 입원한 것을 비롯해 몇 차례 병원치료를 받은 사실, 전문심리위원 전문의가 피고인이 적어도 중증도 내지 고도의 알코올 중독 증상 상태라는 소견을 밝힌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 A 씨가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이르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A 씨의 범행도구의 이용과정 등에서는 피고인의 사물변별능력이 충분히 확인된다"며, "범행 직후 배우자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의하면 피고인은 당시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 윤리적 의미를 판단하는 의사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A 씨가 수사기관에서 범행 당시의 주요 상황이나 당시 대화 내용, 공격행위 등에 대해 비교적 명확하게 진술한 점, 전문심리위원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 당시 음주로 인하여 의식이 저하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점 등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재판부는 양형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은 배우자를 살해하는 행위는 가장 존엄하고도 중대한 법익인 사람의 생명을 박탈함과 동시에 혼인관계에 기초한 법적·도덕적 책무를 원천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며 "가족 간의 윤리와 애정을 무너뜨리고 남아있는 자녀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남기므로 그 죄책이 매우 무겁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50년간의 혼인 기간 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피해자는 피고인의 범행으로 인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귀중한 생명을 잃었는바 범행 결과가 극히 중하다. 피고인의 무리한 금전적 요구를 피해자가 거절하자 피고인이 이에 격분하여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는바, 그 범행 동기에 참작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범행 수법이 매우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피고인은 평소 피해자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아왔고 근래에는 피해자를 상대로 한 방화미수 범행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았음에도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지극히 참담한 상황을 겪게 된 피해자 자녀들의 심적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자녀들은 현재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재판부는 다만 A 씨가 정신병원에서 알코올 의존증후군, 뇌전증 등으로 입원치료를 받는 등의 병력이 있었던 점 등에 비춰 범행 당시 사리분별력이 다소 떨어진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범행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점, 70대의 고령이고 40여 년간 실형을 선고받은 범죄전력이 없는 점을 감안했다고 설명했습니다.

A 씨는 형이 무겁다며, 검사는 형이 가볍다며 각각 항소했지만 2심 서울고법은 항소를 기각하고 1심 판결을 유지했습니다.

대법원도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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