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 말라” 판사의 말에 눈물바다 된 ‘전세사기’ 선고 법정

입력 2024.01.24 (16:12) 수정 2024.01.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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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 전세 사기 사건 1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피해자와 방청객들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 전세 사기 사건 1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피해자와 방청객들

오늘(24일) 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는 지난해 발생한 부산 지역 최대 규모 전세 사기 사건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229명, 피해액은 180억 원에 달합니다.

피고인 최 모 씨는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로 자금을 돌리며 무리한 임대 사업을 벌였습니다. 전세 사기 사건이 터지자 세입자들에게 본인을 위해 '탄원서'를 써주면 전세금을 우선 변제해 주겠다고 회유해 피해자들의 분노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1심 선고 공판을 직접 지켜보기 위해 법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재판장인 형사1단독 박주영 판사는 "선고 내용이 길다"면서 판결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피고인이 편취한 전세보증금 중에는 그 누구보다 근면하고 착한 젊은이들이 생에 처음 받아본 거액의 은행 대출금과 주택청약, 보험과 적금과
쥐꼬리만 한 월 급여에서 떼어낸 월급 일부와 커피값과 외식비같이 자잘한 욕망을 꾹꾹 참으며 한 푼, 두 푼 모은 비상금과
그들의 부모가 없는 살림에도 자식의 밝고 희망찬 미래를 기원하며 흔쾌히 보태준 쌈짓돈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지법 동부지원 박주영 판사의 판결문

박주영 판사는 "전세 제도나 금융 시스템 등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이긴 하나 자신의 탐욕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탐욕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즉시 멈춰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최 씨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5년을 선고했습니다.

현행법상 사기 혐의에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량은 징역 10년이고, 피해자가 다수인 경우 형의 절반을 가중할 수 있습니다.

'전세 사기' 사건에 내릴 수 있는 사실상 최고형을 선고한 셈입니다.

검찰이 선고를 요청한 징역 13년보다도 긴 형량이었습니다.

■ 40개 넘는 '탄원서' 모두 읽은 판사

40년 넘게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40대 중반에 독립했다.
열심히 살았다. 어릴 때 "나쁜 사람 벌 받는다."라는 말은 살면서 희미해진다.
전세 사기는 피해자 마음을 간접 살인하는 것 같다.
잘못한 것 없는데 잘못한 것 같고, 못나지 않았는데도 더 못난 것 같은 마음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의 탄원서 중

박주영 판사는 선고하면서 "피해자들의 탄원서 내용 일부를 옮긴다"며 40개가 넘는 탄원서를 요약해 하나씩 읽었습니다.

피해자 A 씨는 40대 중반에야 어렵게 모은 돈으로 독립한 집을 사기 당해 "잘못한 것 없는데 잘못한 것 같다"고 자책했습니다. B 씨는 결혼 상견례 전날 파혼을 당했고, 백내장을 앓고 있습니다.

C 씨는 주택금융공사 상담사로 일하는데, '전세 사기 피해자' 상담을 할 때마다 힘이 듭니다. D 씨는 딸이 자취한다고 부모님이 보내준 1,600만 원을 사기로 잃었는데, 부모님은 행여 딸이 불안해할까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40명의 사연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법정에는 피해자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퍼졌습니다. 박 판사는 형량을 선고한 후 최 씨를 내보냈고 피해자들에게 "잠깐 할 말이 있으니 그대로 계셔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 말라"…눈물바다 된 법정

부산 전세 사기 사건 1심 재판장 박주영 판사부산 전세 사기 사건 1심 재판장 박주영 판사

박주영 판사는 피해자들에게 재판장으로서, 세상에 책임을 져야 하는 기성세대로서 '피해자 여러분께 드리는 당부의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록과 탄원서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입니다.

한 개인의 욕망과 그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결코 여러분이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십시오. (중략)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나날이겠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하듯 이 암흑 같은 시절도 다 지나갈 것입니다. 이 사건이 남긴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가짐과 의지에 따라서는, 이 시련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더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디, 마음과 몸을 잘 챙기시고, 스스로를 아끼고 또 아껴서, 하루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박주영 판사가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전한 당부

재판이 끝나고 취재진을 만난 부산 전세 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형량 얼마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란 걸 인정받은 것 같다"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판장인 박주영 판사는 '어떤 양형 이유'와 '법정의 얼굴들'이란 책을 쓴 작가입니다. 울림을 주는 판결문으로도 유명합니다. 최근에는 특수협박 혐의로 구속기소 된 노숙인에게 선고 직후 책과 10만 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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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4-01-24 16: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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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 전세 사기 사건 1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피해자와 방청객들
오늘(24일) 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는 지난해 발생한 부산 지역 최대 규모 전세 사기 사건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229명, 피해액은 180억 원에 달합니다.

피고인 최 모 씨는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로 자금을 돌리며 무리한 임대 사업을 벌였습니다. 전세 사기 사건이 터지자 세입자들에게 본인을 위해 '탄원서'를 써주면 전세금을 우선 변제해 주겠다고 회유해 피해자들의 분노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1심 선고 공판을 직접 지켜보기 위해 법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재판장인 형사1단독 박주영 판사는 "선고 내용이 길다"면서 판결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피고인이 편취한 전세보증금 중에는 그 누구보다 근면하고 착한 젊은이들이 생에 처음 받아본 거액의 은행 대출금과 주택청약, 보험과 적금과
쥐꼬리만 한 월 급여에서 떼어낸 월급 일부와 커피값과 외식비같이 자잘한 욕망을 꾹꾹 참으며 한 푼, 두 푼 모은 비상금과
그들의 부모가 없는 살림에도 자식의 밝고 희망찬 미래를 기원하며 흔쾌히 보태준 쌈짓돈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지법 동부지원 박주영 판사의 판결문

박주영 판사는 "전세 제도나 금융 시스템 등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이긴 하나 자신의 탐욕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탐욕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즉시 멈춰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최 씨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5년을 선고했습니다.

현행법상 사기 혐의에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량은 징역 10년이고, 피해자가 다수인 경우 형의 절반을 가중할 수 있습니다.

'전세 사기' 사건에 내릴 수 있는 사실상 최고형을 선고한 셈입니다.

검찰이 선고를 요청한 징역 13년보다도 긴 형량이었습니다.

■ 40개 넘는 '탄원서' 모두 읽은 판사

40년 넘게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40대 중반에 독립했다.
열심히 살았다. 어릴 때 "나쁜 사람 벌 받는다."라는 말은 살면서 희미해진다.
전세 사기는 피해자 마음을 간접 살인하는 것 같다.
잘못한 것 없는데 잘못한 것 같고, 못나지 않았는데도 더 못난 것 같은 마음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의 탄원서 중

박주영 판사는 선고하면서 "피해자들의 탄원서 내용 일부를 옮긴다"며 40개가 넘는 탄원서를 요약해 하나씩 읽었습니다.

피해자 A 씨는 40대 중반에야 어렵게 모은 돈으로 독립한 집을 사기 당해 "잘못한 것 없는데 잘못한 것 같다"고 자책했습니다. B 씨는 결혼 상견례 전날 파혼을 당했고, 백내장을 앓고 있습니다.

C 씨는 주택금융공사 상담사로 일하는데, '전세 사기 피해자' 상담을 할 때마다 힘이 듭니다. D 씨는 딸이 자취한다고 부모님이 보내준 1,600만 원을 사기로 잃었는데, 부모님은 행여 딸이 불안해할까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40명의 사연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법정에는 피해자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퍼졌습니다. 박 판사는 형량을 선고한 후 최 씨를 내보냈고 피해자들에게 "잠깐 할 말이 있으니 그대로 계셔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 말라"…눈물바다 된 법정

부산 전세 사기 사건 1심 재판장 박주영 판사
박주영 판사는 피해자들에게 재판장으로서, 세상에 책임을 져야 하는 기성세대로서 '피해자 여러분께 드리는 당부의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록과 탄원서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입니다.

한 개인의 욕망과 그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결코 여러분이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십시오. (중략)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나날이겠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하듯 이 암흑 같은 시절도 다 지나갈 것입니다. 이 사건이 남긴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가짐과 의지에 따라서는, 이 시련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더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디, 마음과 몸을 잘 챙기시고, 스스로를 아끼고 또 아껴서, 하루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박주영 판사가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전한 당부

재판이 끝나고 취재진을 만난 부산 전세 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형량 얼마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란 걸 인정받은 것 같다"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판장인 박주영 판사는 '어떤 양형 이유'와 '법정의 얼굴들'이란 책을 쓴 작가입니다. 울림을 주는 판결문으로도 유명합니다. 최근에는 특수협박 혐의로 구속기소 된 노숙인에게 선고 직후 책과 10만 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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