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네”…정면충돌 한러, 물밑에선 상황관리?

입력 2024.02.07 (07:00) 수정 2024.02.07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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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은 한러가 정면 충돌한 지난주 방한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러시아 고위급 인사 방한이다.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은 한러가 정면 충돌한 지난주 방한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러시아 고위급 인사 방한이다.

■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 러시아의 아시아태평양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그에게 한국 방문은 어렵게 성사된 일정이었다. 작년 9월에 오려다 일정을 확정짓지 못했고, 다섯 달 만에 서울에 왔다. 이달 1~4일, 한국 외교부 관계자들을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껄끄러워진 양국 관계를 '관리'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루덴코 차관이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한러가 이례적으로 정면 충돌했다.

윤 대통령이 북한을 "핵 선제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 집단"이라 비판하자(1월 31일), 러시아 외무부가 "편향되고 혐오스럽다"고 반발했고(2월 1일), 한국 외교부는 러시아의 발언이야말로 "편향되고 혐오스러운 궤변"이며,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이라고 호도하는 "억지"를 부린다고 맞받았다(2월 3일).

한국은 3일 오후엔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러 항의했다.

한러가, 나아가 한국이 제3국과 상대방 정상을 언급하며 이 정도 수위로 충돌한 일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방한은 그 이전부터 확정됐으니 우연의 일치이긴 하나, 루덴코 차관 입장에선 곤란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루덴코 차관은 이달 2일 한국 외교부 1차관과 차관보, 북핵 업무를 총괄하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연이어 만났다. 이 자리에서 한국 외교관들은 러시아 외무부 입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신원식 국방부 장관.

■ "선 넘는데?"…어떤 말들이 문제 됐나

한러는 왜 이렇게까지 충돌한 걸까. 양측이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선을 건드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미 지난달 말에 1차 충돌이 있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발언이 러시아를 자극했다. 신 장관은 1월 22일 국내 영자매체 코리아헤럴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자 :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에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

신원식 장관 : 적극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자유 세계 일원으로서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비살상무기와 인도적 지원에 집중한다는 정부 정책을 지지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용납할 수 없는 선, '레드라인'으로 명확하게 밝혀왔다. 지노비예프 대사 역시 부임 전후 연이은 언론인터뷰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무기지원이라는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한, 우리 관계는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는다"고 반복해 밝혔다.

윤 대통령이 작년 7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에도 러시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주시했다. 당시 외교부 1차관이던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국회에 출석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러관계를 관리하는 양국 간 '방정식'이 있다"며 "어느 정도 선까지는 서로 용인하며 관계를 관리하는 일종의 묵계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고 해서 (관계가) 그렇게까지 악화하진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윤 대통령이 살상무기 지원을 시사한 적이 있기는 했다. 작년 4월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하며 "러 군에 의한 대량학살 등 국제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재정적 지원만 제공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도 "우리 국내법에 바깥 교전국에 무기 지원을 금지하는 법은 없다"며 러시아를 압박했다. 러시아는 "30년간 건설적으로 이어 온 한러관계를 망칠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윤 대통령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진 않았다.

그러나 올해 초, 국방장관 개인 의견이라곤 하지만 또다시 군사지원 언급이 나온 데 대해 러시아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국은 북러 밀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지난해 9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이후 외교부는 안드레이 쿨릭 당시 주한 러시아대사를 초치해 경고했다. 러시아는 북한과 "합법적" 협력을 할 것이며, 군사협력은 서방의 거짓된 주장이라고 부인해왔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에 따르면, 루덴코 차관보도 이번 방한에서 북한과 "상호 호혜적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의사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북한을 "비이성적 집단"이라 비판하자, 러시아는 이전보다 강하게 북한을 감싸고 돌며 윤 대통령을 저격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우선 북한과 북핵 두둔은 용납할 수 없다는 '레드라인'을 러시아가 밟았다고 봤다. 대통령 발언을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이 비난한 것 역시 정부가 거친 반응을 낸 요인이 됐다. 외교부는 러시아가 쓴 표현을 그대로 러 외무부와 푸틴 대통령에게 돌려줬다.

지난달 취임한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윤석열 정부 첫 주러대사를 지냈다.지난달 취임한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윤석열 정부 첫 주러대사를 지냈다.

■ '러시아 대사 출신' 안보실장의 등판

경색된 한러관계는 지난 주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러시아가 먼저 도발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호구 아니냐"는 의견과, "외교적 고려 없이 국내정치를 위해 미성숙하게 반응했다"는 지적이 동시에 제기됐다.

다만 '상황관리' 노력이 있었다는 점도 추가로 공개되고 있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3일 루덴코 차관을 비공개로 만났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양측 만남은 어제(6일) 공개됐다.

안보실장은 국내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하는 사령탑이다. 외교는 철저하게 '급'을 따지는 무대다. 동맹인 미국은 조금 다른 대접을 받지만, 통상 장관이 방한하면 장관을, 차관이 방한하면 차관급을 만나고 간다. 그런데 장호진 안보실장은 비공식·비공개 형식을 빌려서 루덴코 차관을 만났다. 이미 외교부가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외무부를 거칠게 비판한 후였다.

장호진 실장은 윤석열 정부 첫 주러시아대사로,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한러 관계를 조율해왔다. 당시 러시아 정부의 카운터파트, 즉 협상 상대자 중 한 명이 루덴코 차관이었다. 장 실장은 지난해 6월 외교부 1차관 재직중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루덴코 차관을 만났다. 이번 면담에서 다른 외교당국자들보다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눴을 거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양측 모두 앞으로도 고위급 소통을 지속하며 관계를 '관리'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 15일 우크라이나 수도서 마주한 윤석열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출처:대통령실]지난해 7월 15일 우크라이나 수도서 마주한 윤석열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출처:대통령실]

■ 젤렌스키와 김정은 사이…한러관계 미래는

이런 식의 경색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서로에게만 잘한다고 관계가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 방북 일정을 북한과 조율하며 밀착하는 중이다. 북한산 무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핵탄두 소형화 등 첨단기술까진 내어주지 않을 거란 관측이 많지만, 그럼에도 러시아가 북한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한국도 서방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한편, 러시아를 '중대 위협'으로 규정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협력을 지난 2년간 강화해왔다.

그러면서도 양측은 관계를 관리할 여지를 계속 유지해왔다.

일례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자국에게 수출통제 등 불이익을 준 48개국을 '비우호국(unfriendly countries)'으로 지정했지만, 한국에 대해선 "비우호국 중 가장 우호적인 국가"라고 밝혀왔다. 아시아에선 한국과 일본, 타이완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는데, 이같은 표현은 한국에만 썼다. 비록 양측 설전에 빛이 바랬지만, 러시아가 한국에 고위 인사를 보낸 결정에도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 전문가인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장은 "한국은 미국과 밀착하면서도 자국에 주재했던 장호진 대사를 외교1차관에 이어 안보실장에 임명하고 후임 대사로 현직 외교2차관(이도훈 현 주러대사)을 보냈다"며 "러시아는 이 결정에 주목해왔다"고 밝혔다.

이어 "고위급 인사를 보내 한국이 자신들과의 관계 악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분명한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려 한 것 같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4년 5개월 만에 회담했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4년 5개월 만에 회담했다.

홍 원장은 또한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북한보다는 한국과의 협력이 이익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북한과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도 "러시아가 한국의 반응을 보며 푸틴 대통령의 방북과 북러 군사협력 시점을 조율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아울러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의 중요 행위자이고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 따라 국제정세가 급변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상황에서 고위급 교류를 지속하는 등 국익을 위한 합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이익을 위해서라도 양측 사이에 남아있는 '여지(餘地)'를 완전히 없애선 안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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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07 07:00:43
    • 수정2024-02-07 07: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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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은 한러가 정면 충돌한 지난주 방한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러시아 고위급 인사 방한이다.
■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 러시아의 아시아태평양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그에게 한국 방문은 어렵게 성사된 일정이었다. 작년 9월에 오려다 일정을 확정짓지 못했고, 다섯 달 만에 서울에 왔다. 이달 1~4일, 한국 외교부 관계자들을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껄끄러워진 양국 관계를 '관리'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루덴코 차관이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한러가 이례적으로 정면 충돌했다.

윤 대통령이 북한을 "핵 선제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 집단"이라 비판하자(1월 31일), 러시아 외무부가 "편향되고 혐오스럽다"고 반발했고(2월 1일), 한국 외교부는 러시아의 발언이야말로 "편향되고 혐오스러운 궤변"이며,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이라고 호도하는 "억지"를 부린다고 맞받았다(2월 3일).

한국은 3일 오후엔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러 항의했다.

한러가, 나아가 한국이 제3국과 상대방 정상을 언급하며 이 정도 수위로 충돌한 일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방한은 그 이전부터 확정됐으니 우연의 일치이긴 하나, 루덴코 차관 입장에선 곤란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루덴코 차관은 이달 2일 한국 외교부 1차관과 차관보, 북핵 업무를 총괄하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연이어 만났다. 이 자리에서 한국 외교관들은 러시아 외무부 입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 "선 넘는데?"…어떤 말들이 문제 됐나

한러는 왜 이렇게까지 충돌한 걸까. 양측이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선을 건드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미 지난달 말에 1차 충돌이 있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발언이 러시아를 자극했다. 신 장관은 1월 22일 국내 영자매체 코리아헤럴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자 :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에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

신원식 장관 : 적극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자유 세계 일원으로서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비살상무기와 인도적 지원에 집중한다는 정부 정책을 지지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용납할 수 없는 선, '레드라인'으로 명확하게 밝혀왔다. 지노비예프 대사 역시 부임 전후 연이은 언론인터뷰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무기지원이라는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한, 우리 관계는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는다"고 반복해 밝혔다.

윤 대통령이 작년 7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에도 러시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주시했다. 당시 외교부 1차관이던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국회에 출석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러관계를 관리하는 양국 간 '방정식'이 있다"며 "어느 정도 선까지는 서로 용인하며 관계를 관리하는 일종의 묵계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고 해서 (관계가) 그렇게까지 악화하진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윤 대통령이 살상무기 지원을 시사한 적이 있기는 했다. 작년 4월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하며 "러 군에 의한 대량학살 등 국제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재정적 지원만 제공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도 "우리 국내법에 바깥 교전국에 무기 지원을 금지하는 법은 없다"며 러시아를 압박했다. 러시아는 "30년간 건설적으로 이어 온 한러관계를 망칠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윤 대통령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진 않았다.

그러나 올해 초, 국방장관 개인 의견이라곤 하지만 또다시 군사지원 언급이 나온 데 대해 러시아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국은 북러 밀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지난해 9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이후 외교부는 안드레이 쿨릭 당시 주한 러시아대사를 초치해 경고했다. 러시아는 북한과 "합법적" 협력을 할 것이며, 군사협력은 서방의 거짓된 주장이라고 부인해왔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에 따르면, 루덴코 차관보도 이번 방한에서 북한과 "상호 호혜적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의사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북한을 "비이성적 집단"이라 비판하자, 러시아는 이전보다 강하게 북한을 감싸고 돌며 윤 대통령을 저격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우선 북한과 북핵 두둔은 용납할 수 없다는 '레드라인'을 러시아가 밟았다고 봤다. 대통령 발언을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이 비난한 것 역시 정부가 거친 반응을 낸 요인이 됐다. 외교부는 러시아가 쓴 표현을 그대로 러 외무부와 푸틴 대통령에게 돌려줬다.

지난달 취임한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윤석열 정부 첫 주러대사를 지냈다.
■ '러시아 대사 출신' 안보실장의 등판

경색된 한러관계는 지난 주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러시아가 먼저 도발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호구 아니냐"는 의견과, "외교적 고려 없이 국내정치를 위해 미성숙하게 반응했다"는 지적이 동시에 제기됐다.

다만 '상황관리' 노력이 있었다는 점도 추가로 공개되고 있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3일 루덴코 차관을 비공개로 만났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양측 만남은 어제(6일) 공개됐다.

안보실장은 국내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하는 사령탑이다. 외교는 철저하게 '급'을 따지는 무대다. 동맹인 미국은 조금 다른 대접을 받지만, 통상 장관이 방한하면 장관을, 차관이 방한하면 차관급을 만나고 간다. 그런데 장호진 안보실장은 비공식·비공개 형식을 빌려서 루덴코 차관을 만났다. 이미 외교부가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외무부를 거칠게 비판한 후였다.

장호진 실장은 윤석열 정부 첫 주러시아대사로,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한러 관계를 조율해왔다. 당시 러시아 정부의 카운터파트, 즉 협상 상대자 중 한 명이 루덴코 차관이었다. 장 실장은 지난해 6월 외교부 1차관 재직중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루덴코 차관을 만났다. 이번 면담에서 다른 외교당국자들보다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눴을 거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양측 모두 앞으로도 고위급 소통을 지속하며 관계를 '관리'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 15일 우크라이나 수도서 마주한 윤석열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출처:대통령실]
■ 젤렌스키와 김정은 사이…한러관계 미래는

이런 식의 경색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서로에게만 잘한다고 관계가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 방북 일정을 북한과 조율하며 밀착하는 중이다. 북한산 무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핵탄두 소형화 등 첨단기술까진 내어주지 않을 거란 관측이 많지만, 그럼에도 러시아가 북한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한국도 서방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한편, 러시아를 '중대 위협'으로 규정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협력을 지난 2년간 강화해왔다.

그러면서도 양측은 관계를 관리할 여지를 계속 유지해왔다.

일례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자국에게 수출통제 등 불이익을 준 48개국을 '비우호국(unfriendly countries)'으로 지정했지만, 한국에 대해선 "비우호국 중 가장 우호적인 국가"라고 밝혀왔다. 아시아에선 한국과 일본, 타이완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는데, 이같은 표현은 한국에만 썼다. 비록 양측 설전에 빛이 바랬지만, 러시아가 한국에 고위 인사를 보낸 결정에도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 전문가인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장은 "한국은 미국과 밀착하면서도 자국에 주재했던 장호진 대사를 외교1차관에 이어 안보실장에 임명하고 후임 대사로 현직 외교2차관(이도훈 현 주러대사)을 보냈다"며 "러시아는 이 결정에 주목해왔다"고 밝혔다.

이어 "고위급 인사를 보내 한국이 자신들과의 관계 악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분명한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려 한 것 같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4년 5개월 만에 회담했다.
홍 원장은 또한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북한보다는 한국과의 협력이 이익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북한과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도 "러시아가 한국의 반응을 보며 푸틴 대통령의 방북과 북러 군사협력 시점을 조율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아울러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의 중요 행위자이고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 따라 국제정세가 급변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상황에서 고위급 교류를 지속하는 등 국익을 위한 합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이익을 위해서라도 양측 사이에 남아있는 '여지(餘地)'를 완전히 없애선 안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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