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노인, 시골 노인…점잖은 치매의 비밀 (마음의 흐림…치매2) [창+]

입력 2024.02.10 (10:00) 수정 2024.02.1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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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월 13일(화) KBS1 밤 10시, <시사기획 창> '마음의 흐림과 마주하다...치매'편에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경남 하동의 궁항 마을을 찾은 것은 지난 1월 초였습니다.

"찍으러 내려 오이소."

조금은 무뚝뚝한 마을 이장님의 목소리에 살짝 긴장하며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내려간 취재진. 하지만 마을에 도착하자 얼마 안돼, 긴장은 눈녹듯 사라지고 이 마을이 왜 '치매안심마을'인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첫 날. 취재진은 이장댁을 따라 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 댁 2곳을 방문했습니다.

“치매 어르신들 지나가시고 이러시면 다 들여다보시고 도와주시고 이러시나요?(기자)”

정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나옵니다.

“예, 네 일이다, 내 일이다. 할 것도 안 따지고 다 앞서서 하려고 하니까 너무 그게 고맙고. 그게 우리 마을 사람들이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게 그겁니다.”
“저 할머니 택호가 00댁 이거든요. 00댁이 왜 이렇게 안보이네 이래요 사람들이. 그러면 아이고, 그래 안보이시네. 그래서 옆에 집에 아주머니가 계시거든요. 그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면 괜찮으시대요. 그러면 마음을 놓고 있고, 회관에 오시면 좋고, 안 오시면 또 신경이 쓰이니까 물어보면 또 괜찮다고 그러시면 또 마음이 좋고...그렇습니다. 사는 게.”

궁항마을에서는 모두 4명의 어르신이 현재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별 다른 불편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을 회관'이 있었습니다.

치매 어르신 한 분과 이장댁의 대화를 볼까요?

“(마을 회관에) 가면 사람들 쳐다보고, 또 밥도 얻어먹고 그렇게 온다 아닙니까. (얻어 먹는 게) 빚으로 생각하면 안 가고 싶은데.”

“아이고 또 저런 말씀하시면 되는가. 혼자 오시는 것도 아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는 데인데. 그런 생각은 하시지 말고 와서, 여럿이 먹으면 밥도 맛있더라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러고 저러고 또 놀기도 하고 남의 이야기도 듣고 내말도 좀 하고...”

'남의 이야기도 듣고, 내말도 좀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건넨 이 말 속에 사실 치매 예후와 관련된 많은 것이 함축돼 있습니다.

궁항리 마을 회관은 어르신들의 사랑방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취재진이 방문한 다음날만 해도 마을 분들이 둘러앉더니 김밥 100줄, 50인 분을 싸서 점심을 함께했습니다. 50명이 모두 회관에 오는 건 아니고 좀 여유있게 김밥을 만들어, 못오는 분들께도 가져다 드리기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며 서로 이야기 꽃이 피어납니다. 당연히 '말'이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선 기사 '마음의 흐림...치매1'에서 '뇌자극'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주변 사람과의 소통은 가장 대표적인 뇌자극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럼 대관절 이 마을 어르신들은 얼마나 대화를 많이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관찰카메라를 통해 도시 어르신과 시골 어르신의 모습을 비교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마을에 사시는 87세 김말수 할머니는 낮 시간 대부분을 마을 회관에서 보냅니다. 고정형 관찰 카메라도 회관에 설치했습니다.
98세 이길순 할머니는 서울 강북구에 홀로 사십니다. 주중 오전에는 요양보호사가 10시부터 12시까지 집에 찾아오고, 그 외 시간은 혼자 계십니다. 두 분다 치매 판정을 받은 상탭니다.

시간은 오전에 요양보호사가 방문하는 이 할머니의 생활 패턴을 감안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로 정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 시간 동안 하동에 거주하는 김 할머니는 모두 127회 말을 했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 할머니는 48차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나마 이 할머니의 입은 요양보호사가 퇴근한 정오 이후에는 전혀 열리지 않았습니다.

대화 횟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접촉 인원입니다. 하동의 김 할머니는 16명을 마을 회관에서 접촉했는데, 여러 사람이 있다보니 자기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오가는 대화에 계속 노출돼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이 할머니는 치매판정을 받았을지언정 비교적 정정하고 요양보호사와 이야기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대화 대상 자체가 아주 한정적이었습니다.

결국 이 차이는 '뇌자극'이 이뤄지는 빈도와 정도가 김 할머니 쪽이 훨씬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궁항마을 조황래 이장님의 자체 평가는 이렇습니다.

“주민들의 모임이 자꾸 잦으니까 많이 모여지는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기서 참 그렇게 (회관에) 나오시면 밥도 같이 해서 나눠 먹고 하니까, 자기들 집에 혼자 있으면 반찬이 그게 반찬인가. 그러니까 치매가 들어도 점잖은 치매고, 지금 현재 들어가 있다 해도, 판정을 받아도 다른 사람 보기에는 치매에 걸렸나 안 걸렸나 모를 정도고.”

알게 모르게 이뤄지는 공동 돌봄입니다.

궁항 마을의 마을 회관. 전문가들의 관점으로는 커뮤니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즉 교류할 수 있는 소속 집단의 유무가 사회적으로 치매의 정도를 가르는 척도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니라하고 외국하고의 차이가 외국은 커뮤니티가 잘 되어 있거든요. 같이 일도 하고 같이 대화도 하고 이런 게 잘 되어 있는데...예전에는 우리도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아파트에서 살고 계시고, 실제 아파트에서 노인만 살고 계신 가정이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다 이런 발표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노인들을 이렇게 밖으로 나오게 해 가지고 같이 모이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상당히 부재하거든요.
사람들하고 만나고 어울리고 대화하고 이런 것들이 되게 중요하거든요. 연세 드신 분들이, 그런데 자기 직장 퇴직하고 혼자 지내면 특히 남자들은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등산하거나 집 근처에서 왔다 갔다하고 이런 것밖에 없는데... 제 생각에는 한 50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지내고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미리 좀 만들어놓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60세 넘어서 퇴직하고 그때 하려 그러면 안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직장 끝내고 나서 저녁 때 커뮤니티에서 할 수 있는 거, 뭐 수영을 한다든지. 운동을 한다든지 그런 것들을 미리 좀 준비해보자. 그래가지고 그런 것들을 좀 유도하고 치매가 나기 이후에 관리한다기보다는 그 전부터 미리 도움을 드리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전홍진 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다음 편에서는 '왜 치매가 부끄러운가요?'라는 주제로 '치매 환자 가족들'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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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4-02-13 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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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월 13일(화) KBS1 밤 10시, <시사기획 창> '마음의 흐림과 마주하다...치매'편에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경남 하동의 궁항 마을을 찾은 것은 지난 1월 초였습니다.

"찍으러 내려 오이소."

조금은 무뚝뚝한 마을 이장님의 목소리에 살짝 긴장하며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내려간 취재진. 하지만 마을에 도착하자 얼마 안돼, 긴장은 눈녹듯 사라지고 이 마을이 왜 '치매안심마을'인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첫 날. 취재진은 이장댁을 따라 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 댁 2곳을 방문했습니다.

“치매 어르신들 지나가시고 이러시면 다 들여다보시고 도와주시고 이러시나요?(기자)”

정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나옵니다.

“예, 네 일이다, 내 일이다. 할 것도 안 따지고 다 앞서서 하려고 하니까 너무 그게 고맙고. 그게 우리 마을 사람들이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게 그겁니다.”
“저 할머니 택호가 00댁 이거든요. 00댁이 왜 이렇게 안보이네 이래요 사람들이. 그러면 아이고, 그래 안보이시네. 그래서 옆에 집에 아주머니가 계시거든요. 그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면 괜찮으시대요. 그러면 마음을 놓고 있고, 회관에 오시면 좋고, 안 오시면 또 신경이 쓰이니까 물어보면 또 괜찮다고 그러시면 또 마음이 좋고...그렇습니다. 사는 게.”

궁항마을에서는 모두 4명의 어르신이 현재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별 다른 불편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을 회관'이 있었습니다.

치매 어르신 한 분과 이장댁의 대화를 볼까요?

“(마을 회관에) 가면 사람들 쳐다보고, 또 밥도 얻어먹고 그렇게 온다 아닙니까. (얻어 먹는 게) 빚으로 생각하면 안 가고 싶은데.”

“아이고 또 저런 말씀하시면 되는가. 혼자 오시는 것도 아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는 데인데. 그런 생각은 하시지 말고 와서, 여럿이 먹으면 밥도 맛있더라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러고 저러고 또 놀기도 하고 남의 이야기도 듣고 내말도 좀 하고...”

'남의 이야기도 듣고, 내말도 좀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건넨 이 말 속에 사실 치매 예후와 관련된 많은 것이 함축돼 있습니다.

궁항리 마을 회관은 어르신들의 사랑방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취재진이 방문한 다음날만 해도 마을 분들이 둘러앉더니 김밥 100줄, 50인 분을 싸서 점심을 함께했습니다. 50명이 모두 회관에 오는 건 아니고 좀 여유있게 김밥을 만들어, 못오는 분들께도 가져다 드리기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며 서로 이야기 꽃이 피어납니다. 당연히 '말'이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선 기사 '마음의 흐림...치매1'에서 '뇌자극'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주변 사람과의 소통은 가장 대표적인 뇌자극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럼 대관절 이 마을 어르신들은 얼마나 대화를 많이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관찰카메라를 통해 도시 어르신과 시골 어르신의 모습을 비교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마을에 사시는 87세 김말수 할머니는 낮 시간 대부분을 마을 회관에서 보냅니다. 고정형 관찰 카메라도 회관에 설치했습니다.
98세 이길순 할머니는 서울 강북구에 홀로 사십니다. 주중 오전에는 요양보호사가 10시부터 12시까지 집에 찾아오고, 그 외 시간은 혼자 계십니다. 두 분다 치매 판정을 받은 상탭니다.

시간은 오전에 요양보호사가 방문하는 이 할머니의 생활 패턴을 감안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로 정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 시간 동안 하동에 거주하는 김 할머니는 모두 127회 말을 했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 할머니는 48차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나마 이 할머니의 입은 요양보호사가 퇴근한 정오 이후에는 전혀 열리지 않았습니다.

대화 횟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접촉 인원입니다. 하동의 김 할머니는 16명을 마을 회관에서 접촉했는데, 여러 사람이 있다보니 자기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오가는 대화에 계속 노출돼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이 할머니는 치매판정을 받았을지언정 비교적 정정하고 요양보호사와 이야기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대화 대상 자체가 아주 한정적이었습니다.

결국 이 차이는 '뇌자극'이 이뤄지는 빈도와 정도가 김 할머니 쪽이 훨씬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궁항마을 조황래 이장님의 자체 평가는 이렇습니다.

“주민들의 모임이 자꾸 잦으니까 많이 모여지는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기서 참 그렇게 (회관에) 나오시면 밥도 같이 해서 나눠 먹고 하니까, 자기들 집에 혼자 있으면 반찬이 그게 반찬인가. 그러니까 치매가 들어도 점잖은 치매고, 지금 현재 들어가 있다 해도, 판정을 받아도 다른 사람 보기에는 치매에 걸렸나 안 걸렸나 모를 정도고.”

알게 모르게 이뤄지는 공동 돌봄입니다.

궁항 마을의 마을 회관. 전문가들의 관점으로는 커뮤니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즉 교류할 수 있는 소속 집단의 유무가 사회적으로 치매의 정도를 가르는 척도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니라하고 외국하고의 차이가 외국은 커뮤니티가 잘 되어 있거든요. 같이 일도 하고 같이 대화도 하고 이런 게 잘 되어 있는데...예전에는 우리도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아파트에서 살고 계시고, 실제 아파트에서 노인만 살고 계신 가정이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다 이런 발표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노인들을 이렇게 밖으로 나오게 해 가지고 같이 모이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상당히 부재하거든요.
사람들하고 만나고 어울리고 대화하고 이런 것들이 되게 중요하거든요. 연세 드신 분들이, 그런데 자기 직장 퇴직하고 혼자 지내면 특히 남자들은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등산하거나 집 근처에서 왔다 갔다하고 이런 것밖에 없는데... 제 생각에는 한 50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지내고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미리 좀 만들어놓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60세 넘어서 퇴직하고 그때 하려 그러면 안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직장 끝내고 나서 저녁 때 커뮤니티에서 할 수 있는 거, 뭐 수영을 한다든지. 운동을 한다든지 그런 것들을 미리 좀 준비해보자. 그래가지고 그런 것들을 좀 유도하고 치매가 나기 이후에 관리한다기보다는 그 전부터 미리 도움을 드리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전홍진 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다음 편에서는 '왜 치매가 부끄러운가요?'라는 주제로 '치매 환자 가족들'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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