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려진 전쟁 희생자, 국군포로 생전 증언 [창+]

입력 2024.02.10 (13:18) 수정 2024.02.1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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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기차는 북으로 가고 있었다' 중에서]

<국군포로 생전 인터뷰 中 >
(이혜민 작가) 한번 다시 여쭤볼께요. 몇 년 생이시고 고향이 어디신지?
(김성태 어르신) 나는 1932년 9월 30일 경기도 포천 군내면 하성북리, 거기서 출생했습니다. 나는 1948년 3월 15일인가 그때 ‘국방 경비대’에 입대했어요. 나 열일곱살 때야. 나이 두 살 올려가지고.

(이혜민 작가) 그러면 48년 3월 15일에 왜 나이를 그렇게 올려서 가셨어요?
(김성태 어르신) 군대 가고 싶어서... 나는 뭐 모르지 군대가 뭐 멋있어 보이고 하기 때문에.

(이혜민 작가) 그럼 혹시 친구들도 같이 가셨나요?
(김성태 어르신) 아 그럼. 스무명이 갔단 말이요, 포천군에서.

(이혜민 작가) 그러면 6남매 (가족) 중에서 몇째세요?
(김성태 어르신) 내가 맏이지, 맏이.
(이혜민 작가) 어머니 상심이 크셨겠다.

이혜민 작가는 전직 신문사 기자로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이혜민 작가는 6.25 당시 인민군 포로로 북한에 끌려갔다 탈북한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지난 해 책을 썼습니다.

<인터뷰> 이혜민/ 작가
2013년에 (사단법인) 물망초에서 국군포로 신고센터를 연다고 해서 그때 취재를 했고 그걸 계기로 해서 국군포로들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이걸 알아보기 시작했는데요.

(김성태 어르신) 그러니까 1950년도지 50년도. 그해 6월 25일에 바로 전쟁이 일어났잖아? 그때 거기(군대) 가 있다가 내가 목격했어요. 6월 25일 그 날 전쟁을 (새벽) 3,4시쯤 되니까 38선 일대에서 번개가 치면서 말이지. 우레 소리가 나더라 말이야.

당시 젊은이들은 김성태 어르신처럼 친구나 친지를 따라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난지 나흘만에 인민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인터뷰> 김성태/ 국군포로(2022년 생전 인터뷰)
6월 29일에 내가 그 무명고지 전투에서 전쟁하다가 중대장이 부상을 당했단 말이요. 중대장을 업고 내려오다가 내가 파편을 맞아서 포로가 된거에요.

그리고 북한에 끌려가 탈북할 때까지 51년간을 북한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함경북도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 시멘트 공장 노역에 강제 동원됐습니다.

(김성태 어르신) 내가 그걸 이야기해야 해요. (몸이) 너무 약해져 가지고 내 앞에 한 사람이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주저 앉더란 말이에요, 주저 앉아. 오후 5시가 돼서 같이 수용소로 돌아 오는데 주저 앉더란 말이야. 주저 앉더니 죽었어, 죽었어.
(이혜민 작가) 아니 어디서요? 시멘트 공장에서?
(김성태 어르신) 네, 네, 네. 너무 과도한 일을 하다 보니까
(이혜민 작가) 제대로 못 먹고...?
(김성태 어르신) 그럼 그럼. 제대로 못 먹고 약해지니까.

탈출을 시도했지만, 붙잡혔습니다.

(이혜민 작가) 탈출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누가 주변에서 탈출을 했었나요?
(김성태 어르신) 아니 난 북한에 있는 동안 계속 고향 때문에 넘어오려고 그랬단 말이야.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해서...

북한 당국은 김 어르신을 13년 동안 교화소, 즉 교도소에 가뒀습니다.

교화소에서도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인터뷰> 김성태/ 국군포로 (2022년 생전 인터뷰)
1954년 4월입니다. 일은 힘들지, 배는 고프지. 내가 죄가 없다고,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해서 도망을 쳤단 말이에요. 여기(남한)로 넘어오려고 혼자 그랬었는데 그게 실현이 안 되고...
그때 얻어 맞았어요, 많이 맞았어요. 구타를 많이 당했다고. (교화소 간수들이) 어떻게 그렇게 도주를 하는가 하며 말이지. 야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이제 교화를 잘 받겠습니다.

<인터뷰> 이혜민/ 작가
13년 동안 교화소(교도소) 생활을 하셨어요. 그런데 13년 동안 이 한 번 닦아보지 못했다. 이빨 한 번. 그리고 목욕도 못 해봤다, 옷을 그냥 푹 쪄서 벌레 정도만 없애주고 입고 그리고 독방에 갇혀서 정말 이렇게 웅크리고 앉은 채로, 앉아서 보름, 한 달, 이렇게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보름 동안 독방에 계셨었는데...“

석방된 뒤에는 탄광으로 끌려가 굴을 파는 노역에 강제 동원됐습니다.

(이혜민 작가) 27년 동안 탄광에서 일하신 거에요?
(김성태 어르신) 응.
(이혜민 작가) 27년 동안 그러면 굴진공으로 일하시면서 거기 그때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27년 어떻게 보내셨는가 기억나세요?
(김성태 어르신) 땅굴 팠지 뭐. 발파 해서 그 다음에 삽질 하고 굴진공이라는 건 동발(지지대) 세우고.
(이혜민 작가) 목격한 것들 또 좀 말씀해 주세요.
(김성태 어르신) 아니 생지옥이라니까, 생지옥. 뭐 다른 게 지옥이 어디, 지옥이 어디 따로 있어? 그게 지옥이지.

<인터뷰> 이혜민/ 작가
내가 진짜 역사적인 어떤 사명감을 갖고 기록해야겠다 이런 것보다는 이렇게 참혹한 일을 경험했는데 이걸 가슴에 묻고만 가면 얼마나 속상할까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남길 수 없는데 너무나 참혹한 일을 경험한 이의 심정은 어떤 걸까. 그 사람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싶다.

지난 해 늦가을 김성태 어르신은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쟁 포로였던 자신이 왜 51년간 북한에서 고통 당해야 했는지, 왜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는지.

어쩌면 김 어르신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울분을 떨쳐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혜민 작가가 촬영한 인터뷰 영상 속의 김성태 어르신은 소박하고 인정 많은 할아버지였습니다.

<인터뷰> 이혜민/ 작가
제가 보통 취재를 오후에 가려고 하거든요. 오전에 가면 점심을 꼭 같이 먹어야 돼서 되도록 피해를 안 드리려고
1시, 12시 반 이렇게 가요. 그런데 그날은 왠지 10시에 갔어요. 10시쯤 가서 있는데 요양보호사 그분이 오셔서 점심을 마련해주셨거든요.

(이혜민 작가)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제일 중요한 교화소 경험 여쭤볼께요.
(요양보호사) 아 안녕하세요?
(김성태 어르신) 들어오세요. 어 시간이 벌써... 저 점심 하면 돼요. 저기 뭐야 국수를 해도 되겠거든요. 그래가지고, 내가 북한에선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더란 말이에요. (교화소에서) 형을 다 살고 죽다 살아났어...그래.
(이혜민 작가) 그러면 제가 다음에 올까요. 지금 좀 말씀하시기 혹시 불편하시면...?
(김성태 어르신) 아니오, 아니오, 관계 없는데 뭘 또 한 번 더 오겠어요. 여기서 식사를 하라는 말이에요.
(요양보호사) 아 제가 비빔국수 해줄께요.
(이혜민 작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러면 교화소에서 있었던 일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정전 협정 이후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는 모두 80명,
이 가운데 10명의 국군포로만이 국내에 생존해 있습니다.



#국군포로 #탈북국군포로 #625전쟁 #포로교환 #아오지탄광 #강제노역
#인민군의용군 #귀환용사 #포로수용소 #전선야곡

취재·연출: 김동진
촬영: 이제우
영상편집: 안영아
자료조사: 황현비
조 연 출: 이정윤

관련 방송일시: 2024년 2월 6일 화요일 밤10시 KBS1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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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생전 인터뷰 中 >
(이혜민 작가) 한번 다시 여쭤볼께요. 몇 년 생이시고 고향이 어디신지?
(김성태 어르신) 나는 1932년 9월 30일 경기도 포천 군내면 하성북리, 거기서 출생했습니다. 나는 1948년 3월 15일인가 그때 ‘국방 경비대’에 입대했어요. 나 열일곱살 때야. 나이 두 살 올려가지고.

(이혜민 작가) 그러면 48년 3월 15일에 왜 나이를 그렇게 올려서 가셨어요?
(김성태 어르신) 군대 가고 싶어서... 나는 뭐 모르지 군대가 뭐 멋있어 보이고 하기 때문에.

(이혜민 작가) 그럼 혹시 친구들도 같이 가셨나요?
(김성태 어르신) 아 그럼. 스무명이 갔단 말이요, 포천군에서.

(이혜민 작가) 그러면 6남매 (가족) 중에서 몇째세요?
(김성태 어르신) 내가 맏이지, 맏이.
(이혜민 작가) 어머니 상심이 크셨겠다.

이혜민 작가는 전직 신문사 기자로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이혜민 작가는 6.25 당시 인민군 포로로 북한에 끌려갔다 탈북한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지난 해 책을 썼습니다.

<인터뷰> 이혜민/ 작가
2013년에 (사단법인) 물망초에서 국군포로 신고센터를 연다고 해서 그때 취재를 했고 그걸 계기로 해서 국군포로들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이걸 알아보기 시작했는데요.

(김성태 어르신) 그러니까 1950년도지 50년도. 그해 6월 25일에 바로 전쟁이 일어났잖아? 그때 거기(군대) 가 있다가 내가 목격했어요. 6월 25일 그 날 전쟁을 (새벽) 3,4시쯤 되니까 38선 일대에서 번개가 치면서 말이지. 우레 소리가 나더라 말이야.

당시 젊은이들은 김성태 어르신처럼 친구나 친지를 따라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난지 나흘만에 인민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인터뷰> 김성태/ 국군포로(2022년 생전 인터뷰)
6월 29일에 내가 그 무명고지 전투에서 전쟁하다가 중대장이 부상을 당했단 말이요. 중대장을 업고 내려오다가 내가 파편을 맞아서 포로가 된거에요.

그리고 북한에 끌려가 탈북할 때까지 51년간을 북한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함경북도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 시멘트 공장 노역에 강제 동원됐습니다.

(김성태 어르신) 내가 그걸 이야기해야 해요. (몸이) 너무 약해져 가지고 내 앞에 한 사람이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주저 앉더란 말이에요, 주저 앉아. 오후 5시가 돼서 같이 수용소로 돌아 오는데 주저 앉더란 말이야. 주저 앉더니 죽었어, 죽었어.
(이혜민 작가) 아니 어디서요? 시멘트 공장에서?
(김성태 어르신) 네, 네, 네. 너무 과도한 일을 하다 보니까
(이혜민 작가) 제대로 못 먹고...?
(김성태 어르신) 그럼 그럼. 제대로 못 먹고 약해지니까.

탈출을 시도했지만, 붙잡혔습니다.

(이혜민 작가) 탈출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누가 주변에서 탈출을 했었나요?
(김성태 어르신) 아니 난 북한에 있는 동안 계속 고향 때문에 넘어오려고 그랬단 말이야.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해서...

북한 당국은 김 어르신을 13년 동안 교화소, 즉 교도소에 가뒀습니다.

교화소에서도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인터뷰> 김성태/ 국군포로 (2022년 생전 인터뷰)
1954년 4월입니다. 일은 힘들지, 배는 고프지. 내가 죄가 없다고,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해서 도망을 쳤단 말이에요. 여기(남한)로 넘어오려고 혼자 그랬었는데 그게 실현이 안 되고...
그때 얻어 맞았어요, 많이 맞았어요. 구타를 많이 당했다고. (교화소 간수들이) 어떻게 그렇게 도주를 하는가 하며 말이지. 야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이제 교화를 잘 받겠습니다.

<인터뷰> 이혜민/ 작가
13년 동안 교화소(교도소) 생활을 하셨어요. 그런데 13년 동안 이 한 번 닦아보지 못했다. 이빨 한 번. 그리고 목욕도 못 해봤다, 옷을 그냥 푹 쪄서 벌레 정도만 없애주고 입고 그리고 독방에 갇혀서 정말 이렇게 웅크리고 앉은 채로, 앉아서 보름, 한 달, 이렇게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보름 동안 독방에 계셨었는데...“

석방된 뒤에는 탄광으로 끌려가 굴을 파는 노역에 강제 동원됐습니다.

(이혜민 작가) 27년 동안 탄광에서 일하신 거에요?
(김성태 어르신) 응.
(이혜민 작가) 27년 동안 그러면 굴진공으로 일하시면서 거기 그때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27년 어떻게 보내셨는가 기억나세요?
(김성태 어르신) 땅굴 팠지 뭐. 발파 해서 그 다음에 삽질 하고 굴진공이라는 건 동발(지지대) 세우고.
(이혜민 작가) 목격한 것들 또 좀 말씀해 주세요.
(김성태 어르신) 아니 생지옥이라니까, 생지옥. 뭐 다른 게 지옥이 어디, 지옥이 어디 따로 있어? 그게 지옥이지.

<인터뷰> 이혜민/ 작가
내가 진짜 역사적인 어떤 사명감을 갖고 기록해야겠다 이런 것보다는 이렇게 참혹한 일을 경험했는데 이걸 가슴에 묻고만 가면 얼마나 속상할까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남길 수 없는데 너무나 참혹한 일을 경험한 이의 심정은 어떤 걸까. 그 사람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싶다.

지난 해 늦가을 김성태 어르신은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쟁 포로였던 자신이 왜 51년간 북한에서 고통 당해야 했는지, 왜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는지.

어쩌면 김 어르신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울분을 떨쳐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혜민 작가가 촬영한 인터뷰 영상 속의 김성태 어르신은 소박하고 인정 많은 할아버지였습니다.

<인터뷰> 이혜민/ 작가
제가 보통 취재를 오후에 가려고 하거든요. 오전에 가면 점심을 꼭 같이 먹어야 돼서 되도록 피해를 안 드리려고
1시, 12시 반 이렇게 가요. 그런데 그날은 왠지 10시에 갔어요. 10시쯤 가서 있는데 요양보호사 그분이 오셔서 점심을 마련해주셨거든요.

(이혜민 작가)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제일 중요한 교화소 경험 여쭤볼께요.
(요양보호사) 아 안녕하세요?
(김성태 어르신) 들어오세요. 어 시간이 벌써... 저 점심 하면 돼요. 저기 뭐야 국수를 해도 되겠거든요. 그래가지고, 내가 북한에선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더란 말이에요. (교화소에서) 형을 다 살고 죽다 살아났어...그래.
(이혜민 작가) 그러면 제가 다음에 올까요. 지금 좀 말씀하시기 혹시 불편하시면...?
(김성태 어르신) 아니오, 아니오, 관계 없는데 뭘 또 한 번 더 오겠어요. 여기서 식사를 하라는 말이에요.
(요양보호사) 아 제가 비빔국수 해줄께요.
(이혜민 작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러면 교화소에서 있었던 일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정전 협정 이후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는 모두 80명,
이 가운데 10명의 국군포로만이 국내에 생존해 있습니다.



#국군포로 #탈북국군포로 #625전쟁 #포로교환 #아오지탄광 #강제노역
#인민군의용군 #귀환용사 #포로수용소 #전선야곡

취재·연출: 김동진
촬영: 이제우
영상편집: 안영아
자료조사: 황현비
조 연 출: 이정윤

관련 방송일시: 2024년 2월 6일 화요일 밤10시 KBS1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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