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아오지 탄광 실제 모습…53년을 아오지에서 보낸 국군포로 풀 스토리 [창+]

입력 2024.02.11 (13:00) 수정 2024.02.1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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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기차는 북으로 가고 있었다' 중에서]

6.25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화살머리 고지.

이대봉 어르신은 정전을 한달 앞둔 1953년 6월 28일 이곳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올해 93세인 어르신은 70여 년 전 일들을 상세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공격할 때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200발의 탄알을 나눠 준단 말이요. 그거 매야지. 무전기도 매야지. M1 소총도
매야지. 소총 무게가 9킬로그램이 넘소. 완전히 그렇게 무장하게 되면 정말 힘겹단 말이요. 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 화살머리고지. 거기에서 (우리) 소대가 토굴 속에 있는데 중공군 놈들이 토굴 안에까지 들어오고...

국군포로들은 북한 인민군에게 넘겨져 평양으로 이송됐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국군포로
미군 포로는 밑에 아래에 골짜기에 있고 우리 국군포로는 중턱에 있었단 말이요. 그런데 미군 포로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포로들을 (1953년) 9월에 평양 강동 수용소로 다 집결시키더란 말이요. 그래서 야 이제는
집에 보내주는 모양이다... 옛날에는 포로들은 다 (고국으로) 보내게 되어 있단 말이요, 국제법상으로...”


1953년 유엔군과 공산군의 판문점 포로 교환 당시 미국에서 만들어진 기록영화입니다.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미군 병사가 가족과 통화를 하는 실제 모습입니다.

<미군 가족>
- 조지! 우리 아들! 우리 여기 모여서 네 목소리를 듣고 있어.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전 잘 지내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미국에 도착하면 전화하렴.
-네.
-모두 목소리 들으니까 좋지? 우리 아들, 우리가 널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모를거야.
-3,4일 후면 갈 거예요.
-3,4일 후에?
-네, 그 정도요.
-그래, 기다리고 있을께.

그러나 국군포로들의 운명은 이들과는 달랐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대봉 어르신과 다른 국군포로들을 열차에 태웠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포로를 교환해서 이제는 집에 보내주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아 기차가 한참 가는데 야, 이 기차가 북쪽으로 간다, 그때서야 알았다고...
그리고 우리는 (북한) ‘내무성 건설대’ 1701 부대로, 아오지에 내리게 했단 말이요. 한 500명 됐다고.”

<인터뷰> 조성훈/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내무성 건설대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서 이분들을 (북한) 내무성에서 관리를 하면서 광산에다 배치하게 하는 기구로서 내무성 건설대를 조직했던 겁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그래서 아오지 탄광에서, 53년 동안 거기에서 살았어요.
(기자) 아오지에서만 53년 사셨어요?
네.

<인터뷰> 조성훈/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1956년 6월경에 무의무탁자. 남한에 가족이 있고 고향이 있는데 (국군포로들을) 무의무탁자로 (분류해서)
북한 주민으로 만든 거죠. 광산이라든가 임업소라든가 가장 힘든 직장에 배치를 하며 북한 주민화 했던거죠.”

이대봉 어르신은 2006년 탈북할 때까지 탄광 등 강제 노역에 동원됐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한이라는 게 있을까...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내 운명. 내 팔자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지. 매사에 신경 쓰고 그러면 못 산다고요. 내 팔자가 이렇구나 하고...
(기자) 혼자 계실 때 우시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왜 울죠. 울었지, 속으로. 남자라는 게 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겠소? 울어도 속으로 울고 다 그러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봤단 말이요. 아들 낳고 아들 돌 된 다음에 아내가 사망했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2살 때니까... 아이를 키워야 되겠지 싶어서 내가 재혼을 했지. (재가한 아내 집안이) 월남자 가정인데 다시 말해서 (아내의) 아버지가 한국에 간 그런 가정이니까 거기선 아주 천대를 받는단 말이요.”

아들은 이른바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가정 환경을 원망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원망이라는 게... 내가 국군포로기 때문에 (아들이) 발전을 못 하니까 원망하는 거지. 내 아들도 마음이 용하고 아주 그랬기 때문에 많이 가슴을 태웠겠지.

아내에 이어 아들까지 세상을 뜨자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아들 사망하고 내가 3일 만에 탈북 했어요. 내가 누구 믿고 북한에 있겠어. 짐승도 제가 태어난 굴에 가서 죽는데 나는 북한에 아무도 없다고. 그러니까 탈북해야 되겠구나. 죽더라도 그저 고향 가자.”

험난한 탈북 과정을 거쳐 53년만에 돌아온 고향,
가슴에 품고만 살았던 어머니는 생존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내가 지금 사진을 가지고 있어.
(기자) 어머님 사진이요?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저한테 한 번.

어르신은 어머니와 자신의 젊었을 적 사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내가 탈북해서 나왔는데 동생이 갖고 있더라고. 어머니는 계속 이 사진을 놓고 (아들)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이게 내 총각 때 사진이란 말이에요.”

어르신은 북한에 있을 때 가족들이 들을까봐 소리를 죽여가며 불렀던 노래가 있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어르신을 다시 찾아가 노래를 부탁드려 봤습니다.

1952년에 나온 노래 ‘전선야곡’이었습니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전선에서도 그렇고, 북한에서도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그 노래를 부르고 그랬어. 그래서 항상 어머니를 생각했고... 어머니가 뭐겠어. 곧 조국이지.

<인터뷰> 이혜민/ 작가
나를 키워주고 길러준 그런 조국. 이런 조국에서 날 돌보지 않았다 그런 점을 저한테 설명하실 때는 정말 분노하셨어요. 좋다,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면 국군포로 단 한 명이라도
데리러 왔어야 하지 않느냐. 안 데리러 온 것도 좋다. 그러면 데리고 가겠다는 시도라도 했어야 하지 않냐. 정상회담 할 때 말이라도 꺼내야 되는 것 아니냐.


#국군포로 #탈북국군포로 #625전쟁 #포로교환 #아오지탄광 #강제노역
#인민군의용군 #귀환용사 #포로수용소 #전선야곡

취재·연출: 김동진
촬영: 이제우
영상편집: 안영아
자료조사: 황현비
조 연 출: 이정윤

관련 방송일시: 2024년 2월 6일 화요일 밤10시 KBS1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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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화살머리 고지.

이대봉 어르신은 정전을 한달 앞둔 1953년 6월 28일 이곳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올해 93세인 어르신은 70여 년 전 일들을 상세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공격할 때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200발의 탄알을 나눠 준단 말이요. 그거 매야지. 무전기도 매야지. M1 소총도
매야지. 소총 무게가 9킬로그램이 넘소. 완전히 그렇게 무장하게 되면 정말 힘겹단 말이요. 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 화살머리고지. 거기에서 (우리) 소대가 토굴 속에 있는데 중공군 놈들이 토굴 안에까지 들어오고...

국군포로들은 북한 인민군에게 넘겨져 평양으로 이송됐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국군포로
미군 포로는 밑에 아래에 골짜기에 있고 우리 국군포로는 중턱에 있었단 말이요. 그런데 미군 포로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포로들을 (1953년) 9월에 평양 강동 수용소로 다 집결시키더란 말이요. 그래서 야 이제는
집에 보내주는 모양이다... 옛날에는 포로들은 다 (고국으로) 보내게 되어 있단 말이요, 국제법상으로...”


1953년 유엔군과 공산군의 판문점 포로 교환 당시 미국에서 만들어진 기록영화입니다.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미군 병사가 가족과 통화를 하는 실제 모습입니다.

<미군 가족>
- 조지! 우리 아들! 우리 여기 모여서 네 목소리를 듣고 있어.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전 잘 지내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미국에 도착하면 전화하렴.
-네.
-모두 목소리 들으니까 좋지? 우리 아들, 우리가 널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모를거야.
-3,4일 후면 갈 거예요.
-3,4일 후에?
-네, 그 정도요.
-그래, 기다리고 있을께.

그러나 국군포로들의 운명은 이들과는 달랐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대봉 어르신과 다른 국군포로들을 열차에 태웠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포로를 교환해서 이제는 집에 보내주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아 기차가 한참 가는데 야, 이 기차가 북쪽으로 간다, 그때서야 알았다고...
그리고 우리는 (북한) ‘내무성 건설대’ 1701 부대로, 아오지에 내리게 했단 말이요. 한 500명 됐다고.”

<인터뷰> 조성훈/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내무성 건설대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서 이분들을 (북한) 내무성에서 관리를 하면서 광산에다 배치하게 하는 기구로서 내무성 건설대를 조직했던 겁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그래서 아오지 탄광에서, 53년 동안 거기에서 살았어요.
(기자) 아오지에서만 53년 사셨어요?
네.

<인터뷰> 조성훈/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1956년 6월경에 무의무탁자. 남한에 가족이 있고 고향이 있는데 (국군포로들을) 무의무탁자로 (분류해서)
북한 주민으로 만든 거죠. 광산이라든가 임업소라든가 가장 힘든 직장에 배치를 하며 북한 주민화 했던거죠.”

이대봉 어르신은 2006년 탈북할 때까지 탄광 등 강제 노역에 동원됐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한이라는 게 있을까...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내 운명. 내 팔자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지. 매사에 신경 쓰고 그러면 못 산다고요. 내 팔자가 이렇구나 하고...
(기자) 혼자 계실 때 우시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왜 울죠. 울었지, 속으로. 남자라는 게 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겠소? 울어도 속으로 울고 다 그러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봤단 말이요. 아들 낳고 아들 돌 된 다음에 아내가 사망했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2살 때니까... 아이를 키워야 되겠지 싶어서 내가 재혼을 했지. (재가한 아내 집안이) 월남자 가정인데 다시 말해서 (아내의) 아버지가 한국에 간 그런 가정이니까 거기선 아주 천대를 받는단 말이요.”

아들은 이른바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가정 환경을 원망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원망이라는 게... 내가 국군포로기 때문에 (아들이) 발전을 못 하니까 원망하는 거지. 내 아들도 마음이 용하고 아주 그랬기 때문에 많이 가슴을 태웠겠지.

아내에 이어 아들까지 세상을 뜨자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아들 사망하고 내가 3일 만에 탈북 했어요. 내가 누구 믿고 북한에 있겠어. 짐승도 제가 태어난 굴에 가서 죽는데 나는 북한에 아무도 없다고. 그러니까 탈북해야 되겠구나. 죽더라도 그저 고향 가자.”

험난한 탈북 과정을 거쳐 53년만에 돌아온 고향,
가슴에 품고만 살았던 어머니는 생존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내가 지금 사진을 가지고 있어.
(기자) 어머님 사진이요?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저한테 한 번.

어르신은 어머니와 자신의 젊었을 적 사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내가 탈북해서 나왔는데 동생이 갖고 있더라고. 어머니는 계속 이 사진을 놓고 (아들)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이게 내 총각 때 사진이란 말이에요.”

어르신은 북한에 있을 때 가족들이 들을까봐 소리를 죽여가며 불렀던 노래가 있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어르신을 다시 찾아가 노래를 부탁드려 봤습니다.

1952년에 나온 노래 ‘전선야곡’이었습니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인터뷰> 이대봉/ 53년 동안 국군포로 생활
전선에서도 그렇고, 북한에서도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그 노래를 부르고 그랬어. 그래서 항상 어머니를 생각했고... 어머니가 뭐겠어. 곧 조국이지.

<인터뷰> 이혜민/ 작가
나를 키워주고 길러준 그런 조국. 이런 조국에서 날 돌보지 않았다 그런 점을 저한테 설명하실 때는 정말 분노하셨어요. 좋다,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면 국군포로 단 한 명이라도
데리러 왔어야 하지 않느냐. 안 데리러 온 것도 좋다. 그러면 데리고 가겠다는 시도라도 했어야 하지 않냐. 정상회담 할 때 말이라도 꺼내야 되는 것 아니냐.


#국군포로 #탈북국군포로 #625전쟁 #포로교환 #아오지탄광 #강제노역
#인민군의용군 #귀환용사 #포로수용소 #전선야곡

취재·연출: 김동진
촬영: 이제우
영상편집: 안영아
자료조사: 황현비
조 연 출: 이정윤

관련 방송일시: 2024년 2월 6일 화요일 밤10시 KBS1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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