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형 당뇨’ 딸과 세종→서울 170km 행군기

입력 2024.02.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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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km 걷기에 나선 박근용 씨(가운데)와 딸 율아 양170km 걷기에 나선 박근용 씨(가운데)와 딸 율아 양

■ 1형 당뇨 딸과 함께 세종→서울 걷기 나서

갑작스럽게 나선 길이었습니다. 박근용-박율아 부녀는 집 세종에서 서울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설 연휴를 앞둔 지난 7일 길을 나섰습니다. 지도로 조회해 본 도보 거리는 170km. 하루 10~20km를 걸어 10박 11일 동안 세종에서 충북 청주로 또 천안과 경기도를 거쳐 서울로 이동하는 일정이었습니다.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8살 초등학생 율아에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1형 당뇨는 스스로 혈당 조절을 할 수 없어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질환입니다. 아픈 딸과 함께 긴 여정에 올라야 하는 아빠의 부담도 컸습니다.

그럼에도 길을 나선 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빠 박 씨는 "혈당 조절만 잘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앞으로 펼쳐질 딸의 인생을 위해 '이겨낸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행군 도중 잠시 쉬는 부녀행군 도중 잠시 쉬는 부녀

■ 요동치는 혈당…170km 완주한 부녀

서울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험했습니다. 지도 앱에서 걷는 길로 안내받은 동선이었지만 도심을 벗어나면 인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둘째 날엔 세종 도심을 벗어나 조치원읍에 접어들었는데 도로에 인도가 없어 갓길로 걸어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오르막이 있었고 겨울의 끝자락에 있는 탓에 기온 변화도 심했습니다. 눈과 비는 물론 우박까지 쏟아진 날도 있었습니다.

행군 도중 요동치는 율아의 혈당행군 도중 요동치는 율아의 혈당

율아의 혈당도 요동쳤습니다. 체력 소모가 심할 때면 뚝 떨어지기도 했고 거꾸로 열량을 보충하려고 김밥 몇 개만 먹으면 위험 수준인 250mg/dL을 훌쩍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혈당 관리 앱은 수시로 경고 알림음을 냈습니다.

혈당이 오를 때마다 율아는 자신의 배에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했습니다.

혈당이 올라가자 율아가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혈당이 올라가자 율아가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녀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나는 지역마다 다른 환우들은 물론 시민들까지 나서 응원을 해줬습니다.

환우들이 함께 걷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기도 했고 자신이 사는 지역을 지날 때면 합류해 걷기도 했습니다. 고된 여정 탓에 망가진 부녀의 짐 수레를 대신해 새것을 선물한 환우도 있었습니다. 여정에 동참했던 한 환우는 "율아는 1형 당뇨를 앓게 된 지 이제 겨우 반년째지만 수십 년을 투병해 온 자신에게 거꾸로 용기와 희망을 줬다"고 했습니다.

행군 도중 충남 천안에서 만난 환우가 율아를 안아주고 있다.행군 도중 충남 천안에서 만난 환우가 율아를 안아주고 있다.

시민들도 응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형 당뇨인의 호소를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현수막을 보고 이들의 긴 여정에 응원의 목소리를 함께 실었습니다. 율아를 꼭 안아주거나 용돈을 주고 간식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박근용-박율아 부녀 10박 11일 여정

① 2월 7일 세종시의회~보건복지부 6km → ② 8일 식약처 21km → ③ 9일 전의 게스트하우스 18km → ④ 10일 천안역 19km → ⑤ 11일 평택시청 23km ⑥ 12일 오산시청 21km ⑦ 13일 수원 버스터미널 15km → ⑧ 14일 의왕시청 14km ⑨ 15일 과천시청 14km → ⑩ 16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11km → ⑪ 17일 용산 대통령실 8km

이런 응원 속에 부녀는 주말인 지난 17일 완주에 성공했습니다. 목적지였던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앞까지 도착한 겁니다. 마지막 서울 일정에는 환우 수십 명이 동행했습니다. 대통령실 인근 공원에서 완주를 기념하는 사진도 찍었습니다. '부녀의 길'은 어느새 '환우의 길'이 돼 있었습니다.

박 씨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어린이날 행사 등에 대통령실에서 율아를 초대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1형 당뇨 환우와 가족들이 박 씨 부녀의 완주를 기념하며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촬영한 사진1형 당뇨 환우와 가족들이 박 씨 부녀의 완주를 기념하며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촬영한 사진

■ "중증 난치질환 지정해야"

이들 부녀의 '걷기 대장정'은 감동으로 남았지만, 실제 1형 당뇨를 겪는 건 힘든 일입니다. 2형 당뇨와 달리 췌장에서 인슐린이 아예 분비되지 않아 혈당 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아·청소년기에 주로 발병해 투병 기간도 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치료 비용도 부담입니다. 혈당 측정과 인슐린 주입 기기 등에만 한 달에 수십만 원이 들지만, 요양급여 적용 대상이 아니라 본인부담금 비율이 30%에 이릅니다.

또, 상급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경우가 많아 본인 부담률이 더 높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1형 당뇨 전체를 '중증 난치질환'으로 지정하고 본인 부담을 낮춰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국내 1형 당뇨 환자는 지난해 6월 말 기준 3만 6천여 명입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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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형 당뇨’ 딸과 세종→서울 170km 행군기
    • 입력 2024-02-20 07: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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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km 걷기에 나선 박근용 씨(가운데)와 딸 율아 양
■ 1형 당뇨 딸과 함께 세종→서울 걷기 나서

갑작스럽게 나선 길이었습니다. 박근용-박율아 부녀는 집 세종에서 서울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설 연휴를 앞둔 지난 7일 길을 나섰습니다. 지도로 조회해 본 도보 거리는 170km. 하루 10~20km를 걸어 10박 11일 동안 세종에서 충북 청주로 또 천안과 경기도를 거쳐 서울로 이동하는 일정이었습니다.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8살 초등학생 율아에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1형 당뇨는 스스로 혈당 조절을 할 수 없어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질환입니다. 아픈 딸과 함께 긴 여정에 올라야 하는 아빠의 부담도 컸습니다.

그럼에도 길을 나선 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빠 박 씨는 "혈당 조절만 잘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앞으로 펼쳐질 딸의 인생을 위해 '이겨낸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행군 도중 잠시 쉬는 부녀
■ 요동치는 혈당…170km 완주한 부녀

서울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험했습니다. 지도 앱에서 걷는 길로 안내받은 동선이었지만 도심을 벗어나면 인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둘째 날엔 세종 도심을 벗어나 조치원읍에 접어들었는데 도로에 인도가 없어 갓길로 걸어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오르막이 있었고 겨울의 끝자락에 있는 탓에 기온 변화도 심했습니다. 눈과 비는 물론 우박까지 쏟아진 날도 있었습니다.

행군 도중 요동치는 율아의 혈당
율아의 혈당도 요동쳤습니다. 체력 소모가 심할 때면 뚝 떨어지기도 했고 거꾸로 열량을 보충하려고 김밥 몇 개만 먹으면 위험 수준인 250mg/dL을 훌쩍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혈당 관리 앱은 수시로 경고 알림음을 냈습니다.

혈당이 오를 때마다 율아는 자신의 배에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했습니다.

혈당이 올라가자 율아가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녀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나는 지역마다 다른 환우들은 물론 시민들까지 나서 응원을 해줬습니다.

환우들이 함께 걷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기도 했고 자신이 사는 지역을 지날 때면 합류해 걷기도 했습니다. 고된 여정 탓에 망가진 부녀의 짐 수레를 대신해 새것을 선물한 환우도 있었습니다. 여정에 동참했던 한 환우는 "율아는 1형 당뇨를 앓게 된 지 이제 겨우 반년째지만 수십 년을 투병해 온 자신에게 거꾸로 용기와 희망을 줬다"고 했습니다.

행군 도중 충남 천안에서 만난 환우가 율아를 안아주고 있다.
시민들도 응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형 당뇨인의 호소를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현수막을 보고 이들의 긴 여정에 응원의 목소리를 함께 실었습니다. 율아를 꼭 안아주거나 용돈을 주고 간식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박근용-박율아 부녀 10박 11일 여정

① 2월 7일 세종시의회~보건복지부 6km → ② 8일 식약처 21km → ③ 9일 전의 게스트하우스 18km → ④ 10일 천안역 19km → ⑤ 11일 평택시청 23km ⑥ 12일 오산시청 21km ⑦ 13일 수원 버스터미널 15km → ⑧ 14일 의왕시청 14km ⑨ 15일 과천시청 14km → ⑩ 16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11km → ⑪ 17일 용산 대통령실 8km

이런 응원 속에 부녀는 주말인 지난 17일 완주에 성공했습니다. 목적지였던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앞까지 도착한 겁니다. 마지막 서울 일정에는 환우 수십 명이 동행했습니다. 대통령실 인근 공원에서 완주를 기념하는 사진도 찍었습니다. '부녀의 길'은 어느새 '환우의 길'이 돼 있었습니다.

박 씨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어린이날 행사 등에 대통령실에서 율아를 초대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1형 당뇨 환우와 가족들이 박 씨 부녀의 완주를 기념하며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촬영한 사진
■ "중증 난치질환 지정해야"

이들 부녀의 '걷기 대장정'은 감동으로 남았지만, 실제 1형 당뇨를 겪는 건 힘든 일입니다. 2형 당뇨와 달리 췌장에서 인슐린이 아예 분비되지 않아 혈당 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아·청소년기에 주로 발병해 투병 기간도 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치료 비용도 부담입니다. 혈당 측정과 인슐린 주입 기기 등에만 한 달에 수십만 원이 들지만, 요양급여 적용 대상이 아니라 본인부담금 비율이 30%에 이릅니다.

또, 상급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경우가 많아 본인 부담률이 더 높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1형 당뇨 전체를 '중증 난치질환'으로 지정하고 본인 부담을 낮춰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국내 1형 당뇨 환자는 지난해 6월 말 기준 3만 6천여 명입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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