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될 수 있을까 [창+]
입력 2024.02.20 (07:00)
수정 2024.02.2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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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 앞을 지나는 제주올레 10코스. 사단법인 제주올레 제공
지난해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제주올레 1코스.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너른 터에 제주 해녀들의 노래와 스페인 갈리시아 전통 음악이 울려 퍼졌다(2023년 9월 20일 KBS 뉴스 <‘길’로 통하는 제주와 산티아고…‘우정의 길 협약’ 1주년>).
제주올레와 '산티아고 순례길'이 맺은 우정을 기념하며 2022년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돌하르방을 세우고 1년 뒤, 제주올레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조가비'를 남겼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어 제주올레가 탄생한 지 15년 만이다.
2007년 첫 길을 낸 뒤, 한국에 '걷기 열풍'을 불러일으킨 제주올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또 건강을 지키려 운동 삼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27개 코스 437km 길을 찾는다.
■ 올레 일본 수출 10년…현지화 성공한 '규슈올레'
제주올레는 2022년 누적 방문객 1천만 명을 넘어섰다. 역사가 20년도 채 안되는 비교적 '어린' 길이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 도보 여행길에 '영감을 주는' 모델로 발돋움했다. 일본과 몽골에 올레길을 수출하고, 스페인과 캐나다, 스위스, 타이완, 호주 등 세계 각국 13개 도보 여행길과 '우정의 길'을 맺었다.
일본에는 '올레' 브랜드가 수출됐다. 2012년 처음으로 규슈에서 '규슈 올레'가 생겨났는데, '올레'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만큼, 조랑말 모양 '간세'와 청·홍색 리본 등 제주올레의 표식을 사용하고 운영 체계를 그대로 따른다. 제주올레는 이 같은 브랜드 사용료로 매해 100만 엔(한화 약 900만 원)을 받는다.
지난해 12월 일본 사가현 다케오시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올레 페어’ 참가자들이 올레길을 걷기 전, 몸풀기 운동을 하고 있다. 2024년 1월 2일 KBS 뉴스 7 제주
시작은 한국인 관광객을 불러모으기 위해 도입한 길이었지만, 규슈올레는 이제 일본인이 더 많이 찾아 걷는 길이 됐다. 지자체의 올레 유치 열기 속에 한때 규슈에만 20개가 넘는 올레길이 개발돼 운영되기도 했다.
"2016년 정도까지는 한국인 방문객이 일본인보다 많았지만, 그 이후에는 일본인이 더 많아졌습니다. 한국 올레길에서 정한 규칙대로 리본을 따라 걷는 올레길은 등산로나 둘레길과는 달라요. 등산은 계속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손발을 이용해서 위험한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올레길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레저로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마츠시마 유이치/일본 규슈관광기구 차장)
'올레꾼 전용 료칸', 포장해 들고 갈 수 있는 '올레꾼 전용 도시락'까지 등장했다.
계절마다 열리는 크고 작은 올레 걷기 축제에도 남녀노소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는 등 규슈올레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지금도 일본 각지에서 올레길 도입을 위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 대지진 쓰나미 상처 품은 '치유의 길' 미야기올레
규슈에 이어 '제주올레'를 수입한 일본 동북 지역 일본 미야기현에서는 지난해 11월, 다섯 번째 올레길이 열렸다. 코로나19 때문에 미뤄졌던 개장이다.
미야기현은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당시 밀어닥친 쓰나미로 1만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1천 명이 넘는 실종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본 지역이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 전체 사망자(1만 9천여 명)의 절반 이상이 미야기현에서 나왔다. 실종자 수색 작업은 지진 발생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규슈올레 성공 사례를 본 미야기현은 제주에 먼저 손을 뻗어왔다. 제주올레는 이사회 논의 끝에 미야기현과 손을 맞잡고, 길을 내기로 했다. '지진으로 아픔을 겪은 지역을 품는 것이 제주올레가 추구하는 치유와 상생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이유에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일어서기, 지역 주민들의 '마음 회복'을 제대로 해 나가고자 하는 데에 올레길 도입만 한 일이 없었습니다." (키쿠치 케이치/일본 미야기현의회 의장)
지난해 11월 개장한 일본 미야기올레 다섯 번째 코스 무라타(村田) 코스 출발 지점 일대를 세계 각지에서 모인 올레꾼들이 걷고 있다. (일본 미야기현=민소영 기자)
■ 지속 가능한 제주올레 되려면?…"제주 자연·문화 이어져야"
제주의 숨은 길을 찾고, 끊어진 길을 잇고, 사라진 길을 되살리고, 없는 길을 만들어낸 16년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홀로 걷는 여행객들의 안전사고 문제가 발생하자, 자원봉사자들은 혼자서 올레길을 걷기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매일 제주올레 한 코스씩 함께 걷기에 자발적으로 나섰다.
사유지를 지나는 올레길은 코스가 변경되는 일도 자주 겪어야 했다. 대가 없이 길을 열어줬지만, 찾는 이들이 많아지며 일부 여행객들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밭작물을 가져가는 등 문제를 빚기도 했다.
"저희가 땅을 사서 길을 낸 것이 아니라 사유지가 전체 길이의 한 30% 정도 되는데, 통과권만 얻고 다니는 건데, 사유지 주인들이 ‘이제 내 땅으로 더는 안 왔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저희가 길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땅에 다른 건축행위나 이런 것들이 벌어지면 저희가 또 길을 바꿔야 하는 상황들이 생기고." (안은주/사단법인 제주올레 대표이사)
올레길 방문객이 한 해에만 100만 명을 넘는 시기도 있었다. 발길이 뜸했던 곳에 사람들이 몰리자, 전망 좋은 곳마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올레길 주변으로 땅값이 들썩였고, 숙박시설과 타운 하우스 단지, 카페촌이 만들어졌다. 십수 년 전 봤던 고즈넉한 제주의 자연 풍광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제주올레 측은 중산간 오름 군락을 볼 수 있는 1-2코스를 설계·개발했다가, 결국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제주 해안뿐만 아니라 중산간 일대까지 개발 광풍을 몰고 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아, 제주의 곶자왈과 오름, 바다를 골고루 둘러볼 수 있는 27개의 길이 만들어진 지 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닮고 싶었던 제주올레는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1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전 세계 도보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는 길로 존속할 수 있을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제주 지역사회에서 과잉 관광(오버 투어리즘)에 대해서 갑론을박했던 때가 있습니다. 과거보다는 개발 정도가 많이 완화됐다, 친환경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보지만, 자연 그대로 100% 두고 관광을 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관광객들의 편의성도 높여야 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시설도 당연히 필요한 거고요.
다만 '제주다움'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하겠죠.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제주도는 한 번 찾는 곳이 아닙니다. 자주 찾는 곳이거든요. 제주관광공사나 제주관광협회 등 유관기관들이 함께 과거와 현재의 제주 등 변화상을 주기적으로 조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동일/제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가 사라지면, 제주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걷지 않으면, 길도 사라진다. 길은 새로 내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제주도 #제주올레 #올레길 #규슈올레 #미야기올레
#도보여행 #걷기여행길 #트레일 #올레축제 #지역경제
#관광산업 #산티아고순례길 #시사기획창 #KBS시사
취재·연출: 민소영
촬영: 강재윤 고성호 고아람 한창희
영상편집: 김대영
자료조사: 정성연
관련방송일시: 2024년 2월 20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 유튜브YouTube KBS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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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제주올레 1코스.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너른 터에 제주 해녀들의 노래와 스페인 갈리시아 전통 음악이 울려 퍼졌다(2023년 9월 20일 KBS 뉴스 <‘길’로 통하는 제주와 산티아고…‘우정의 길 협약’ 1주년>).
제주올레와 '산티아고 순례길'이 맺은 우정을 기념하며 2022년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돌하르방을 세우고 1년 뒤, 제주올레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조가비'를 남겼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어 제주올레가 탄생한 지 15년 만이다.
2007년 첫 길을 낸 뒤, 한국에 '걷기 열풍'을 불러일으킨 제주올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또 건강을 지키려 운동 삼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27개 코스 437km 길을 찾는다.
■ 올레 일본 수출 10년…현지화 성공한 '규슈올레'
제주올레는 2022년 누적 방문객 1천만 명을 넘어섰다. 역사가 20년도 채 안되는 비교적 '어린' 길이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 도보 여행길에 '영감을 주는' 모델로 발돋움했다. 일본과 몽골에 올레길을 수출하고, 스페인과 캐나다, 스위스, 타이완, 호주 등 세계 각국 13개 도보 여행길과 '우정의 길'을 맺었다.
일본에는 '올레' 브랜드가 수출됐다. 2012년 처음으로 규슈에서 '규슈 올레'가 생겨났는데, '올레'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만큼, 조랑말 모양 '간세'와 청·홍색 리본 등 제주올레의 표식을 사용하고 운영 체계를 그대로 따른다. 제주올레는 이 같은 브랜드 사용료로 매해 100만 엔(한화 약 900만 원)을 받는다.
시작은 한국인 관광객을 불러모으기 위해 도입한 길이었지만, 규슈올레는 이제 일본인이 더 많이 찾아 걷는 길이 됐다. 지자체의 올레 유치 열기 속에 한때 규슈에만 20개가 넘는 올레길이 개발돼 운영되기도 했다.
"2016년 정도까지는 한국인 방문객이 일본인보다 많았지만, 그 이후에는 일본인이 더 많아졌습니다. 한국 올레길에서 정한 규칙대로 리본을 따라 걷는 올레길은 등산로나 둘레길과는 달라요. 등산은 계속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손발을 이용해서 위험한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올레길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레저로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마츠시마 유이치/일본 규슈관광기구 차장)
'올레꾼 전용 료칸', 포장해 들고 갈 수 있는 '올레꾼 전용 도시락'까지 등장했다.
계절마다 열리는 크고 작은 올레 걷기 축제에도 남녀노소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는 등 규슈올레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지금도 일본 각지에서 올레길 도입을 위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 대지진 쓰나미 상처 품은 '치유의 길' 미야기올레
규슈에 이어 '제주올레'를 수입한 일본 동북 지역 일본 미야기현에서는 지난해 11월, 다섯 번째 올레길이 열렸다. 코로나19 때문에 미뤄졌던 개장이다.
미야기현은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당시 밀어닥친 쓰나미로 1만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1천 명이 넘는 실종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본 지역이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 전체 사망자(1만 9천여 명)의 절반 이상이 미야기현에서 나왔다. 실종자 수색 작업은 지진 발생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규슈올레 성공 사례를 본 미야기현은 제주에 먼저 손을 뻗어왔다. 제주올레는 이사회 논의 끝에 미야기현과 손을 맞잡고, 길을 내기로 했다. '지진으로 아픔을 겪은 지역을 품는 것이 제주올레가 추구하는 치유와 상생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이유에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일어서기, 지역 주민들의 '마음 회복'을 제대로 해 나가고자 하는 데에 올레길 도입만 한 일이 없었습니다." (키쿠치 케이치/일본 미야기현의회 의장)
■ 지속 가능한 제주올레 되려면?…"제주 자연·문화 이어져야"
제주의 숨은 길을 찾고, 끊어진 길을 잇고, 사라진 길을 되살리고, 없는 길을 만들어낸 16년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홀로 걷는 여행객들의 안전사고 문제가 발생하자, 자원봉사자들은 혼자서 올레길을 걷기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매일 제주올레 한 코스씩 함께 걷기에 자발적으로 나섰다.
사유지를 지나는 올레길은 코스가 변경되는 일도 자주 겪어야 했다. 대가 없이 길을 열어줬지만, 찾는 이들이 많아지며 일부 여행객들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밭작물을 가져가는 등 문제를 빚기도 했다.
"저희가 땅을 사서 길을 낸 것이 아니라 사유지가 전체 길이의 한 30% 정도 되는데, 통과권만 얻고 다니는 건데, 사유지 주인들이 ‘이제 내 땅으로 더는 안 왔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저희가 길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땅에 다른 건축행위나 이런 것들이 벌어지면 저희가 또 길을 바꿔야 하는 상황들이 생기고." (안은주/사단법인 제주올레 대표이사)
올레길 방문객이 한 해에만 100만 명을 넘는 시기도 있었다. 발길이 뜸했던 곳에 사람들이 몰리자, 전망 좋은 곳마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올레길 주변으로 땅값이 들썩였고, 숙박시설과 타운 하우스 단지, 카페촌이 만들어졌다. 십수 년 전 봤던 고즈넉한 제주의 자연 풍광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제주올레 측은 중산간 오름 군락을 볼 수 있는 1-2코스를 설계·개발했다가, 결국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제주 해안뿐만 아니라 중산간 일대까지 개발 광풍을 몰고 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아, 제주의 곶자왈과 오름, 바다를 골고루 둘러볼 수 있는 27개의 길이 만들어진 지 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닮고 싶었던 제주올레는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1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전 세계 도보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는 길로 존속할 수 있을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제주 지역사회에서 과잉 관광(오버 투어리즘)에 대해서 갑론을박했던 때가 있습니다. 과거보다는 개발 정도가 많이 완화됐다, 친환경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보지만, 자연 그대로 100% 두고 관광을 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관광객들의 편의성도 높여야 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시설도 당연히 필요한 거고요.
다만 '제주다움'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하겠죠.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제주도는 한 번 찾는 곳이 아닙니다. 자주 찾는 곳이거든요. 제주관광공사나 제주관광협회 등 유관기관들이 함께 과거와 현재의 제주 등 변화상을 주기적으로 조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동일/제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가 사라지면, 제주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걷지 않으면, 길도 사라진다. 길은 새로 내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제주도 #제주올레 #올레길 #규슈올레 #미야기올레
#도보여행 #걷기여행길 #트레일 #올레축제 #지역경제
#관광산업 #산티아고순례길 #시사기획창 #KBS시사
취재·연출: 민소영
촬영: 강재윤 고성호 고아람 한창희
영상편집: 김대영
자료조사: 정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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