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한 표’ 준비하는 그들의 자세

입력 2024.02.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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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습이니까 제가 정당 네 개만 가지고 왔어요. 정당을 뽑는 비례대표 국회의원도 각 정당의 뭘 보고 투표하죠?"
"약속!"
"다른 말로?"
"공약!"
-지난 20일, 서울시 선관위 주최 투표참여 교육 및 모의 투표 체험

■ 사표 될라 조심조심…투표·사전 교육 반복 연습

지난 20일, 서울시 강서구의 기쁜우리복지관에 30여 명의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이 모였습니다. 4월10일 치러지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투표하는 방법을 배우러 온 겁니다. 선거의 종류와 투표 용지에 대한 이론 교육을 먼저 받고나면 모형 신분증, 실제와 똑같은 기표소, 투표함을 놓고 모의 투표를 체험합니다.

'갑당 백두산', '을당 한라산', '병당 설악산'. 가상 후보의 가상 공약인데도, 발달장애인들은 진지하게 공약을 외우고 본인이 선택한 후보 옆에 조심스레 기표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는 위의 사진과 같은 레일 버튼형 특수 기표 용구도 도입됩니다. 뇌병변 장애로 손 떨림이 심한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겁니다. 기표 위치를 정확하게 조정해서 어렵게 행사한 한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방지합니다.

이 복지관의 발달장애인들은 이렇게 4년째 투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투표함과 기표소 설치도 쉽지 않았지만 현재 복지관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됐습니다.

■ "투표하려 공부해요"…아는 만큼 높아지는 정치 관심도

비장애인들조차 때로는 후보자의 복잡다단한 공약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발달장애인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반복 연습, 사전 교육 등 작은 도움만 있으면 이들도 충분히 후보를 고르고 온전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의 모의 투표 체험을 추진한 한재영 기쁜우리복지관 개인별서비스지원팀 대리는 "이제는 다 함께 산책할 때 후보자 현수막이 붙어 있으면 누군지 물어보고, 각자 공보물을 가지고 와서 내용을 다 같이 공부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커진 만큼 정치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는 얘깁니다.


■ "모든 발달장애인에 기회 돌아가야"

하지만 모든 발달장애인들이 이 같은 기회를 얻는 건 아닙니다. 누구나 선거관리위원회나 선거연수원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 참여 교육을 신청할 수 있지만, 매번 모의투표 연습이 제공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직원이 열 명을 채 못 넘는 각 시군구 선관위에서는 선거철이 다가올수록 인력난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소외감으로 다가옵니다. 강서구의 투표참여 교육이 이뤄진 바로 그 날, 발달장애인 당사자 단체 '한국피플퍼스트'는 서울시 선관위를 찾아 "서울시 전역에서 발달장애인 유권자를 위한 모의 투표를 실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모의 투표를 지원하는 곳이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적다"며 "더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에 대한 침해와 차별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 선거 공보물도 난관…선관위 가이드라인 무용지물

외래어와 축약어가 많은 선거 공보물도 난관입니다. '저상버스'와 같은 단어는 '계단이 없는 버스'처럼 쉽게 풀어써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후보자의 의지만 있다면 '쉬운 공보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쉬운 공보물은 발달장애인 뿐 아니라 다문화가정,노화·높은 스트레스·뇌졸중 등 후천적 장애로 인지 능력이 떨어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선관위는 올해 어려운 용어를 쉽게 풀어 쓸 수 있도록 '쉬운 공보물' 가이드라인과 용어집을 발간했습니다. 하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고, 한 종류의 공보물을 더 만드는 게 부담이기 때문이라 이를 지키는 후보자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 전국 발달장애인 25.5만 명…법원 "선거법 개정 우선"

결국 발달장애인들은 '쉬운 공보물'과 후보자 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 도입 등을 요구하며 법원을 찾아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해 9월 1심에서 각하됐습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은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법률적 근거를 마련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별도의 선거공보물을 작성하려면 법률적 근거가 필요하고 , 선거법상 투표용지 기재사항과 기재방법이 규정돼 있어 그림투표 용지는 허용되지 않는단 겁니다.


결국 발달장애인들은 지난 14일 다시 국회로 향했습니다. 이기백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는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 이 법이 왜 통과되지 않았을까,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저희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호소했습니다. 2022년 기준 전국 발달장애인 숫자는 25만 5천 명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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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겨운 한 표’ 준비하는 그들의 자세
    • 입력 2024-02-24 0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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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습이니까 제가 정당 네 개만 가지고 왔어요. 정당을 뽑는 비례대표 국회의원도 각 정당의 뭘 보고 투표하죠?"
"약속!"
"다른 말로?"
"공약!"
-지난 20일, 서울시 선관위 주최 투표참여 교육 및 모의 투표 체험

■ 사표 될라 조심조심…투표·사전 교육 반복 연습

지난 20일, 서울시 강서구의 기쁜우리복지관에 30여 명의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이 모였습니다. 4월10일 치러지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투표하는 방법을 배우러 온 겁니다. 선거의 종류와 투표 용지에 대한 이론 교육을 먼저 받고나면 모형 신분증, 실제와 똑같은 기표소, 투표함을 놓고 모의 투표를 체험합니다.

'갑당 백두산', '을당 한라산', '병당 설악산'. 가상 후보의 가상 공약인데도, 발달장애인들은 진지하게 공약을 외우고 본인이 선택한 후보 옆에 조심스레 기표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는 위의 사진과 같은 레일 버튼형 특수 기표 용구도 도입됩니다. 뇌병변 장애로 손 떨림이 심한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겁니다. 기표 위치를 정확하게 조정해서 어렵게 행사한 한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방지합니다.

이 복지관의 발달장애인들은 이렇게 4년째 투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투표함과 기표소 설치도 쉽지 않았지만 현재 복지관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됐습니다.

■ "투표하려 공부해요"…아는 만큼 높아지는 정치 관심도

비장애인들조차 때로는 후보자의 복잡다단한 공약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발달장애인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반복 연습, 사전 교육 등 작은 도움만 있으면 이들도 충분히 후보를 고르고 온전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의 모의 투표 체험을 추진한 한재영 기쁜우리복지관 개인별서비스지원팀 대리는 "이제는 다 함께 산책할 때 후보자 현수막이 붙어 있으면 누군지 물어보고, 각자 공보물을 가지고 와서 내용을 다 같이 공부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커진 만큼 정치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는 얘깁니다.


■ "모든 발달장애인에 기회 돌아가야"

하지만 모든 발달장애인들이 이 같은 기회를 얻는 건 아닙니다. 누구나 선거관리위원회나 선거연수원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 참여 교육을 신청할 수 있지만, 매번 모의투표 연습이 제공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직원이 열 명을 채 못 넘는 각 시군구 선관위에서는 선거철이 다가올수록 인력난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소외감으로 다가옵니다. 강서구의 투표참여 교육이 이뤄진 바로 그 날, 발달장애인 당사자 단체 '한국피플퍼스트'는 서울시 선관위를 찾아 "서울시 전역에서 발달장애인 유권자를 위한 모의 투표를 실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모의 투표를 지원하는 곳이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적다"며 "더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에 대한 침해와 차별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 선거 공보물도 난관…선관위 가이드라인 무용지물

외래어와 축약어가 많은 선거 공보물도 난관입니다. '저상버스'와 같은 단어는 '계단이 없는 버스'처럼 쉽게 풀어써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후보자의 의지만 있다면 '쉬운 공보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쉬운 공보물은 발달장애인 뿐 아니라 다문화가정,노화·높은 스트레스·뇌졸중 등 후천적 장애로 인지 능력이 떨어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선관위는 올해 어려운 용어를 쉽게 풀어 쓸 수 있도록 '쉬운 공보물' 가이드라인과 용어집을 발간했습니다. 하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고, 한 종류의 공보물을 더 만드는 게 부담이기 때문이라 이를 지키는 후보자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 전국 발달장애인 25.5만 명…법원 "선거법 개정 우선"

결국 발달장애인들은 '쉬운 공보물'과 후보자 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 도입 등을 요구하며 법원을 찾아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해 9월 1심에서 각하됐습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은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법률적 근거를 마련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별도의 선거공보물을 작성하려면 법률적 근거가 필요하고 , 선거법상 투표용지 기재사항과 기재방법이 규정돼 있어 그림투표 용지는 허용되지 않는단 겁니다.


결국 발달장애인들은 지난 14일 다시 국회로 향했습니다. 이기백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는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 이 법이 왜 통과되지 않았을까,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저희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호소했습니다. 2022년 기준 전국 발달장애인 숫자는 25만 5천 명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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