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들 밥 챙겨주려다 착각”…자전거 훔친 7남매 맏이 고교생의 ‘자백’

입력 2024.02.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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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20일, 한 고등학생이 지구대를 찾아왔습니다. 고개를 떨군 채 갑자기 본인이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훔쳤다는 잘못을 털어놓는 겁니다.

"시간이 늦어서 동생들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두르느라 착각했습니다."

평범한 청소년의 절도 사건이라면 따끔히 혼내고 법에 따라 책임을 물을 법한 사안, 하지만 사건을 맡은 경찰관이 주목한 건 이 고등학생의 속사정이었습니다.

■"여섯 동생 밥 챙기려 서두르다 착각"…고교생의 자백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고등학생 A 군이 지구대에 찾아오기 이틀 전 밤 9시쯤, A 군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도보 30분 거리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파트 단지 자전거 보관대에 잠금 장치 없이 세워진 자전거 한 대를 타고 갔는데, 몇 시간 뒤 자전거 주인이 '자전거를 누가 훔쳐갔다'며 경찰에 신고한 겁니다.

하지만 A 군은 경찰 수사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자전거를 주인에게 돌려줬고, 스스로 지구대에 찾아와 자신의 잘못을 직접 털어놨습니다.

A 군은 "평소 친구가 타던 자전거와 비슷하게 생겨 친구 자전거로 착각했다"며 "잠시 빌려 타려고 했는데 뒤늦게 다른 사람의 자전거라는 사실을 알고 돌려줬다"고 경찰에 진술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을 마치고 집에 가다가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빨리 여섯 동생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두르느라…"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가정 형편에 주목한 경찰…복지 사각지대 찾아내 지원

사건 서류는 오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과로 넘어갔는데, 담당 경찰관의 눈에 띈 건 A 군이 진술한 가정 형편이었습니다.

6남 1녀의 다자녀 가정 중 장남이었던 A 군. A 군의 아버지는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심부전과 폐 질환 등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A 군 역시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고, 남은 여섯 동생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9명의 가족이 사는 곳은 14평짜리 국민임대 아파트로 주거 환경도 다소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초생활수급이나 차상위 등 취약계층 선정 대상에서 제외된 건 A 군 아버지의 월 소득이 있고 차량을 보유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차량에 대해 A 군 아버지는 '자녀가 많고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이 많아 꼭 필요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A 군 가족이 '복지 사각지대'에 있다고 판단해 여러 차례 가정 방문과 면담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 지난 6일, 오산시와 오산경찰서, 보건소 등 7개 관계 기관이 연 통합 회의에서 A 군 가족에 대한 실질적인 복지 지원이 결정됐습니다.

긴급복지지원금(320만 원×3개월)을 비롯해 이불과 라면 등 가정후원물품, 급식비, 자녀 의료비 등을 지원하고, 초·중등 자녀 방과 후 돌봄 제공, 중학생 자녀 대상 운동 프로그램 제공 등 교육 지원도 이뤄졌습니다.

■절도 사건은 벌금 10만 원 선고유예


A 군의 자전거 절도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달 11일 경찰이 선도심사위원회를 열었습니다.

선도심사위는 소년이 저지른 범죄 중 사안이 경미하고 초범인 경우, 피해자와 합의한 경우 등에 한해 사건 내용과 동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훈방·즉결심판·입건 등의 처분을 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선도심사위는 A 군에게 즉결심판 처분을 내렸고, 최근 법원은 A 군에게 벌금 10만 원의 선고를 유예했습니다.

선고유예는 가벼운 범죄에 대해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미루고 2년이 지나면 사실상 없던 일로 해주는 판결입니다.

경찰 관계자는 "A 군이 경찰에 고맙다는 뜻과 함께 앞으로 중장비 관련 기술을 배워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동생들을 보살피겠다는 말을 전해왔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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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26 10: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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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20일, 한 고등학생이 지구대를 찾아왔습니다. 고개를 떨군 채 갑자기 본인이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훔쳤다는 잘못을 털어놓는 겁니다.

"시간이 늦어서 동생들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두르느라 착각했습니다."

평범한 청소년의 절도 사건이라면 따끔히 혼내고 법에 따라 책임을 물을 법한 사안, 하지만 사건을 맡은 경찰관이 주목한 건 이 고등학생의 속사정이었습니다.

■"여섯 동생 밥 챙기려 서두르다 착각"…고교생의 자백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고등학생 A 군이 지구대에 찾아오기 이틀 전 밤 9시쯤, A 군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도보 30분 거리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파트 단지 자전거 보관대에 잠금 장치 없이 세워진 자전거 한 대를 타고 갔는데, 몇 시간 뒤 자전거 주인이 '자전거를 누가 훔쳐갔다'며 경찰에 신고한 겁니다.

하지만 A 군은 경찰 수사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자전거를 주인에게 돌려줬고, 스스로 지구대에 찾아와 자신의 잘못을 직접 털어놨습니다.

A 군은 "평소 친구가 타던 자전거와 비슷하게 생겨 친구 자전거로 착각했다"며 "잠시 빌려 타려고 했는데 뒤늦게 다른 사람의 자전거라는 사실을 알고 돌려줬다"고 경찰에 진술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을 마치고 집에 가다가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빨리 여섯 동생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두르느라…"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가정 형편에 주목한 경찰…복지 사각지대 찾아내 지원

사건 서류는 오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과로 넘어갔는데, 담당 경찰관의 눈에 띈 건 A 군이 진술한 가정 형편이었습니다.

6남 1녀의 다자녀 가정 중 장남이었던 A 군. A 군의 아버지는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심부전과 폐 질환 등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A 군 역시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고, 남은 여섯 동생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9명의 가족이 사는 곳은 14평짜리 국민임대 아파트로 주거 환경도 다소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초생활수급이나 차상위 등 취약계층 선정 대상에서 제외된 건 A 군 아버지의 월 소득이 있고 차량을 보유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차량에 대해 A 군 아버지는 '자녀가 많고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이 많아 꼭 필요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A 군 가족이 '복지 사각지대'에 있다고 판단해 여러 차례 가정 방문과 면담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 지난 6일, 오산시와 오산경찰서, 보건소 등 7개 관계 기관이 연 통합 회의에서 A 군 가족에 대한 실질적인 복지 지원이 결정됐습니다.

긴급복지지원금(320만 원×3개월)을 비롯해 이불과 라면 등 가정후원물품, 급식비, 자녀 의료비 등을 지원하고, 초·중등 자녀 방과 후 돌봄 제공, 중학생 자녀 대상 운동 프로그램 제공 등 교육 지원도 이뤄졌습니다.

■절도 사건은 벌금 10만 원 선고유예


A 군의 자전거 절도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달 11일 경찰이 선도심사위원회를 열었습니다.

선도심사위는 소년이 저지른 범죄 중 사안이 경미하고 초범인 경우, 피해자와 합의한 경우 등에 한해 사건 내용과 동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훈방·즉결심판·입건 등의 처분을 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선도심사위는 A 군에게 즉결심판 처분을 내렸고, 최근 법원은 A 군에게 벌금 10만 원의 선고를 유예했습니다.

선고유예는 가벼운 범죄에 대해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미루고 2년이 지나면 사실상 없던 일로 해주는 판결입니다.

경찰 관계자는 "A 군이 경찰에 고맙다는 뜻과 함께 앞으로 중장비 관련 기술을 배워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동생들을 보살피겠다는 말을 전해왔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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