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6·25전쟁영웅’에 ‘창린도 탈환작전’ 한문식 해군 대령 선정

입력 2024.02.29 (07:46) 수정 2024.02.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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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는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한문식 해군 대령을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한문식 대령은 6‧25전쟁 중 기뢰 제거함인 김해정 정장으로 1950년 8월 서해봉쇄 작전에서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차단에 기여하고, 1952년 7월 대잠 작전을 수행하는 금강산함 함장으로 서북해역의 전략적 도서인 황해남도 옹진에 위치한 창린도 탈환작전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훈부는 설명했습니다.

한 대령은 1945년 11월 해방병단(해군의 전신)에 입대하여 임관 후 인천기지 갑판사관, 진해기지 인사관, 1948년 11월부터 김해정장으로 복무 중 1950년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1950년 8월 6~7일 서해안 봉쇄작전에 참전해 적 발동선 2척, 화물선 2척, 다수의 범선을 격침함으로써 서해안을 통한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는데 기여했고, 이후 금강산함장으로 해상 일선에서 작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52년 7월 15일, 적 300여 명의 기습공격으로 창린도가 점령당하자 금강산함, 영국 순양함(벨파스트함), 호위함(PF-116함), 아군 유격대는 연합작전회의를 열고 미 해군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창린도 재탈환을 결정했습니다.

한문식 대령은 아군 함정들과 전투기들의 피아식별을 위해 상륙군인 유격대에게 흰 천 한 장씩을 소유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백포작전(白布作戰)’을 제안, 1952년 7월 16일 새벽 140여 명의 유격대가 탑승한 범선, 발동선을 창린도 남단으로 호송하여 성공적으로 상륙시켰습니다.

이후 영국 순양함, 호위함, 미 해군 전투기 4대와 연합작전으로 포격과 폭격을 개시했으며, 이에 힘입은 유격대는 적의 반격이 가장 치열했던 창린도 81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적군 70명 사살, 27명 생포, 무기 다수 노획 등 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백포작전’을 통해 창린도 탈환에 기여한 한문식 대령은 휴전회담을 이용하여 서해안 일대에 포대를 구축하고 해안경비요원을 증강시켜 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습니다.

정부는 한문식 대령의 공훈에 따라 충무무공훈장(1951, 1953), 을지무공훈장(1952)을 수여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국가보훈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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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는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한문식 해군 대령을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한문식 대령은 6‧25전쟁 중 기뢰 제거함인 김해정 정장으로 1950년 8월 서해봉쇄 작전에서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차단에 기여하고, 1952년 7월 대잠 작전을 수행하는 금강산함 함장으로 서북해역의 전략적 도서인 황해남도 옹진에 위치한 창린도 탈환작전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훈부는 설명했습니다.

한 대령은 1945년 11월 해방병단(해군의 전신)에 입대하여 임관 후 인천기지 갑판사관, 진해기지 인사관, 1948년 11월부터 김해정장으로 복무 중 1950년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1950년 8월 6~7일 서해안 봉쇄작전에 참전해 적 발동선 2척, 화물선 2척, 다수의 범선을 격침함으로써 서해안을 통한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는데 기여했고, 이후 금강산함장으로 해상 일선에서 작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52년 7월 15일, 적 300여 명의 기습공격으로 창린도가 점령당하자 금강산함, 영국 순양함(벨파스트함), 호위함(PF-116함), 아군 유격대는 연합작전회의를 열고 미 해군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창린도 재탈환을 결정했습니다.

한문식 대령은 아군 함정들과 전투기들의 피아식별을 위해 상륙군인 유격대에게 흰 천 한 장씩을 소유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백포작전(白布作戰)’을 제안, 1952년 7월 16일 새벽 140여 명의 유격대가 탑승한 범선, 발동선을 창린도 남단으로 호송하여 성공적으로 상륙시켰습니다.

이후 영국 순양함, 호위함, 미 해군 전투기 4대와 연합작전으로 포격과 폭격을 개시했으며, 이에 힘입은 유격대는 적의 반격이 가장 치열했던 창린도 81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적군 70명 사살, 27명 생포, 무기 다수 노획 등 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백포작전’을 통해 창린도 탈환에 기여한 한문식 대령은 휴전회담을 이용하여 서해안 일대에 포대를 구축하고 해안경비요원을 증강시켜 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습니다.

정부는 한문식 대령의 공훈에 따라 충무무공훈장(1951, 1953), 을지무공훈장(1952)을 수여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국가보훈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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