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엔 시신, 10일째 외출 못 했다”…‘무법천지’ 아이티 상황 들어보니

입력 2024.03.16 (07:07) 수정 2024.03.1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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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12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출처: AP연합뉴스)현지시각 12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출처: AP연합뉴스)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

2010년 대지진으로 국토 전역이 파괴됐던 국가, 식량이 없어 진흙에 소금을 넣어 구워 먹는다는 최빈국이 이번엔 갱단 폭동으로 무법 천지가 됐습니다.

발단은 3년 전. 2021년 7월 현직 대통령이 외국 용병에게 암살된 이후 무장 갱단이 세력을 키우며 대통령 권한대행인 현직 아리엘 앙리 총리 퇴진을 요구해왔습니다. 지난달 7일까지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던 총리는 사임을 거부한 채 갱단을 통제할 병력 파견을 요청하려 지난달 말 케냐로 출국합니다. 이 틈을 타 갱단의 폭동이 시작됐습니다.

갱단은 교도소 2곳을 습격하고 경찰서와 은행을 불태웠습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80% 이상을 갱단이 지배하는 거로 유엔은 추정합니다. 유혈사태가 계속되자 미국도 압박에 나섰고, 앙리 총리는 결국 11일 해외에서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음 권력을 누가 가질지를 두고 또 다른 혼란이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현지시각 4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공항 근처에서 총격을 피해 시민들이 달아나는 모습. (출처 : AP통신)현지시각 4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공항 근처에서 총격을 피해 시민들이 달아나는 모습. (출처 : AP통신)

■ 권력 싸움 뛰어든 갱단, 길거리엔 시신이

현재 아이티에는 폭동을 막을 경찰도 시민을 도울 공무원도 없습니다. 현지에 진입한 AP통신이 보내온 영상을 보면, 이틀 전까지도 수도 포르토프랭스 골목이나 도로에서 총격에 사망한 시신이 여러 구 발견됐습니다. 낮 기온 30도, 시민들은 코를 틀어쥐고 거리를 지나갑니다. 유탄을 맞아 다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걸어갑니다. 부서진 상점, 불탄 차들이 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갱단은 공항 점거도 시도했습니다. 해외 체류 중인 총리의 귀국길을 차단하는 겁니다. 공항 접근 자체가 위험해, 항공기 이용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에는 한국 기업들이 입주한 국영 공단이 있습니다. 이 공단 근처까지 갱단의 폭력이 번진 적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섬유업체 '윌버스'의 아이티 법인장인 양희철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불안감이 느껴진다"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지역에도 갱단 공격이 시작돼 매우 큰 공포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웬만한 혼란에는 익숙했던 교민들도 이번엔 '다르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2010년부터 아이티를 37회 방문한 원승재 목사는 현지와 매일 연락을 주고 받는다며 "이전에는 안전했던 선교사 주거지까지 공격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원 목사가 받은 영상에는 총성과 혈흔, 화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교민 지준구 씨는 "외출 못 나간지가 10일째"라고 했습니다. 야간에는 통행금지, 낮에도 거리가 텅 비어있다고 했습니다. 갱단이 현지 외국인을 사살하겠다고 밝혔단 소문도 돌고 있다고 합니다. 지 씨는 부족한 생필품을 현지인을 통해 조금씩 어렵게 구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주 넘게 가동을 중단했던 공단은 이번 주부터 다시 문을 열었지만 혼란이 수습된 건 아닙니다. 로이터통신은 주초 총리 사임 발표 이후 모습을 감췄던 갱단이 13일 밤부터 일부 지역에서 폭력사태를 다시 일으켰다고 보도했습니다.

해외에서 사임을 발표한 현직 아리엘 앙리 총리. 그는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해외에서 사임을 발표한 현직 아리엘 앙리 총리. 그는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 1주일새 기름값 2배…"먹는 것부터 줄였다"

현지 물가도 크게 올랐습니다.

갱단이 항만과 도로를 막아 유통망이 마비되자 기름값부터 폭등했습니다. 현지 영자매체 아이티 타임즈에 따르면, 1갤런(3.8리터)에 5.66달러이던 기름값은 지난주 17달러를 기록했습니다. 2.5배 상승입니다.

매체와 인터뷰한 택시기사는 "기름이 부족해 운행시간을 줄이니 벌이가 줄었고, 이 때문에 기름과 식량을 또 못 사게 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밝혔습니다. 구호시설 '아이티 꽃동네'의 최마지아 수녀는 "어디서 기름 판다고 하면 줄을 그렇게 길게 선다"며 "경유값은 똑같지만 재고가 없다. 휘발유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했습니다.

갱단이 도로 통행료를 걷으며 소금값이 2배로 뛰는 등 다른 생필품도 이전보다 크게 비싸졌습니다. 소비자물가는 이미 2017년부터 매해 10%씩 오르다 2022년엔 34%까지 뛴 상태입니다.

■ 외교부 "유사시 철수계획 수립 완료"

정부는 아이티 정세를 주시하며 유사시 육로와 항로로 교민을 철수할 계획 수립을 완료했습니다. 아이티에 공관이 없어 옆 나라 도미니카 주재 한국대사관이 교민들에게 철수 계획을 미리 안내하고, 철수 의사 등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는 이미 2021년 2월부터 아이티 전역에 여행경보 3단계(철수 권고)를 유지 중입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당장 교민들을 모두 철수시키거나, 여행경보를 4단계(여행금지)로 올려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거로 전해집니다. 특히 철수 계획이 마치 당장 시행되는 것처럼 보도되는 걸 경계하는 분위기입니다. 현재 아이티에서 자국민을 빼내려는 국가가 없고, 섣불리 철수 계획을 가동할 경우 현지 갱단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거로 보입니다.

강인선 외교2차관은 어제(15일) 도미니카 주재 대사 및 외교부 담당 국장들과 합동 화상회의를 열고, 서울 본부와 공관이 상시 연락하고 인접국·우방국과 협조 체계를 구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출처 : AP연합뉴스)(출처 : AP연합뉴스)

■ 국회의원도, 총리도 없는 무정부 상태... 미래는?

아이티는 안정될 수 있을까. 차기 권력 구도를 살펴봐야겠지만 현재로선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우선 일종의 임시정부 기구인 '과도위원회'가 임시 총리를 선출하고 차기 대선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이 과도위원회 구성부터 쉽지 않습니다.

사임을 발표한 앙리 총리는 선거 준비가 완료되면 물러나겠다면서도, 과도위원 임명은 헌법에 따라 자신과 참모들이 해야 한다고 13일 CNN에 밝혔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갱단 'G9' 수장 지미 셰리지에는 과도위원으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에게 협박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번 사태를 주도한 G9 외에도 'G펩' 등 아이티 수도에 기반을 둔 갱단만 20여 개. 이들은 과도위 참여를 요구하며 차기 대선에 영향을 미치겠단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유엔은 케냐 주도로 다국적 경찰력을 아이티에 파견하려 했지만, 총리 사임이 발표되며 이를 보류했습니다. 일부 아이티인들은 "케냐 경찰도 부패했는데 이들이 이끄는 다국적 경찰이 우리를 제대로 지켜주겠느냐"며 우려하고 있다고 현지 매체들은 보도했습니다. 아이티 난민이 대거 유입될까 경계하는 미국은 다국적 경찰 임무에 1억 달러(약 1,332억 원)를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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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12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출처: AP연합뉴스)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

2010년 대지진으로 국토 전역이 파괴됐던 국가, 식량이 없어 진흙에 소금을 넣어 구워 먹는다는 최빈국이 이번엔 갱단 폭동으로 무법 천지가 됐습니다.

발단은 3년 전. 2021년 7월 현직 대통령이 외국 용병에게 암살된 이후 무장 갱단이 세력을 키우며 대통령 권한대행인 현직 아리엘 앙리 총리 퇴진을 요구해왔습니다. 지난달 7일까지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던 총리는 사임을 거부한 채 갱단을 통제할 병력 파견을 요청하려 지난달 말 케냐로 출국합니다. 이 틈을 타 갱단의 폭동이 시작됐습니다.

갱단은 교도소 2곳을 습격하고 경찰서와 은행을 불태웠습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80% 이상을 갱단이 지배하는 거로 유엔은 추정합니다. 유혈사태가 계속되자 미국도 압박에 나섰고, 앙리 총리는 결국 11일 해외에서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음 권력을 누가 가질지를 두고 또 다른 혼란이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현지시각 4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공항 근처에서 총격을 피해 시민들이 달아나는 모습. (출처 : AP통신)
■ 권력 싸움 뛰어든 갱단, 길거리엔 시신이

현재 아이티에는 폭동을 막을 경찰도 시민을 도울 공무원도 없습니다. 현지에 진입한 AP통신이 보내온 영상을 보면, 이틀 전까지도 수도 포르토프랭스 골목이나 도로에서 총격에 사망한 시신이 여러 구 발견됐습니다. 낮 기온 30도, 시민들은 코를 틀어쥐고 거리를 지나갑니다. 유탄을 맞아 다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걸어갑니다. 부서진 상점, 불탄 차들이 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갱단은 공항 점거도 시도했습니다. 해외 체류 중인 총리의 귀국길을 차단하는 겁니다. 공항 접근 자체가 위험해, 항공기 이용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에는 한국 기업들이 입주한 국영 공단이 있습니다. 이 공단 근처까지 갱단의 폭력이 번진 적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섬유업체 '윌버스'의 아이티 법인장인 양희철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불안감이 느껴진다"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지역에도 갱단 공격이 시작돼 매우 큰 공포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웬만한 혼란에는 익숙했던 교민들도 이번엔 '다르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2010년부터 아이티를 37회 방문한 원승재 목사는 현지와 매일 연락을 주고 받는다며 "이전에는 안전했던 선교사 주거지까지 공격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원 목사가 받은 영상에는 총성과 혈흔, 화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교민 지준구 씨는 "외출 못 나간지가 10일째"라고 했습니다. 야간에는 통행금지, 낮에도 거리가 텅 비어있다고 했습니다. 갱단이 현지 외국인을 사살하겠다고 밝혔단 소문도 돌고 있다고 합니다. 지 씨는 부족한 생필품을 현지인을 통해 조금씩 어렵게 구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주 넘게 가동을 중단했던 공단은 이번 주부터 다시 문을 열었지만 혼란이 수습된 건 아닙니다. 로이터통신은 주초 총리 사임 발표 이후 모습을 감췄던 갱단이 13일 밤부터 일부 지역에서 폭력사태를 다시 일으켰다고 보도했습니다.

해외에서 사임을 발표한 현직 아리엘 앙리 총리. 그는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 1주일새 기름값 2배…"먹는 것부터 줄였다"

현지 물가도 크게 올랐습니다.

갱단이 항만과 도로를 막아 유통망이 마비되자 기름값부터 폭등했습니다. 현지 영자매체 아이티 타임즈에 따르면, 1갤런(3.8리터)에 5.66달러이던 기름값은 지난주 17달러를 기록했습니다. 2.5배 상승입니다.

매체와 인터뷰한 택시기사는 "기름이 부족해 운행시간을 줄이니 벌이가 줄었고, 이 때문에 기름과 식량을 또 못 사게 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밝혔습니다. 구호시설 '아이티 꽃동네'의 최마지아 수녀는 "어디서 기름 판다고 하면 줄을 그렇게 길게 선다"며 "경유값은 똑같지만 재고가 없다. 휘발유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했습니다.

갱단이 도로 통행료를 걷으며 소금값이 2배로 뛰는 등 다른 생필품도 이전보다 크게 비싸졌습니다. 소비자물가는 이미 2017년부터 매해 10%씩 오르다 2022년엔 34%까지 뛴 상태입니다.

■ 외교부 "유사시 철수계획 수립 완료"

정부는 아이티 정세를 주시하며 유사시 육로와 항로로 교민을 철수할 계획 수립을 완료했습니다. 아이티에 공관이 없어 옆 나라 도미니카 주재 한국대사관이 교민들에게 철수 계획을 미리 안내하고, 철수 의사 등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는 이미 2021년 2월부터 아이티 전역에 여행경보 3단계(철수 권고)를 유지 중입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당장 교민들을 모두 철수시키거나, 여행경보를 4단계(여행금지)로 올려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거로 전해집니다. 특히 철수 계획이 마치 당장 시행되는 것처럼 보도되는 걸 경계하는 분위기입니다. 현재 아이티에서 자국민을 빼내려는 국가가 없고, 섣불리 철수 계획을 가동할 경우 현지 갱단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거로 보입니다.

강인선 외교2차관은 어제(15일) 도미니카 주재 대사 및 외교부 담당 국장들과 합동 화상회의를 열고, 서울 본부와 공관이 상시 연락하고 인접국·우방국과 협조 체계를 구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출처 : AP연합뉴스)
■ 국회의원도, 총리도 없는 무정부 상태... 미래는?

아이티는 안정될 수 있을까. 차기 권력 구도를 살펴봐야겠지만 현재로선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우선 일종의 임시정부 기구인 '과도위원회'가 임시 총리를 선출하고 차기 대선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이 과도위원회 구성부터 쉽지 않습니다.

사임을 발표한 앙리 총리는 선거 준비가 완료되면 물러나겠다면서도, 과도위원 임명은 헌법에 따라 자신과 참모들이 해야 한다고 13일 CNN에 밝혔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갱단 'G9' 수장 지미 셰리지에는 과도위원으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에게 협박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번 사태를 주도한 G9 외에도 'G펩' 등 아이티 수도에 기반을 둔 갱단만 20여 개. 이들은 과도위 참여를 요구하며 차기 대선에 영향을 미치겠단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유엔은 케냐 주도로 다국적 경찰력을 아이티에 파견하려 했지만, 총리 사임이 발표되며 이를 보류했습니다. 일부 아이티인들은 "케냐 경찰도 부패했는데 이들이 이끄는 다국적 경찰이 우리를 제대로 지켜주겠느냐"며 우려하고 있다고 현지 매체들은 보도했습니다. 아이티 난민이 대거 유입될까 경계하는 미국은 다국적 경찰 임무에 1억 달러(약 1,332억 원)를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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