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다] 목월의 미공개 시 세상 빛을 보다

입력 2024.03.17 (23:23) 수정 2024.03.1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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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보다 5회] 목월의 미공개 시, 세상 빛을 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 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 귀 귀가 닮았네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할 나이에 누구나 따라 불렀던 동요 <얼룩 송아지>.
하지만 노랫말을 누가 썼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태주 /시인
박목월 선생을 상징하는 몇 개의 시 중에 <얼룩 송아지>가 들어가고요, <나그네>가 들어가고요,
그러니까 당신의 상징처럼 이렇게 느껴지셨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했던 노래입니다.

<낭독>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90년 전 시인 박목월이 청년시절부터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시가 담긴 62권의 노트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님 노트라는 게 그냥 일반적인 무슨 사설을 쓴 노트가 아니라 작품을, 거의 완성된 작품들을 쓴 노트들을 내가 만지게 된다는 것이 벅차오르고…….

1938년 아내 유익순 여사와 결혼한 목월.

시인과 그의 노트 곁에는 늘 아내가 있었고, 남편이 남긴 노트를 아내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태어난 것이 1939년인데 36년 치부터 결혼해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노트를 한 권도 놓치지 않고 이것을 어머니가 열심히, 어디다 감췄는지도 모르게 감춰서 이것을 보존하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면…….

목월의 작품 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노트와 평생 써온 시들이 시인이 세상을 뜬 지 4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박동규 교수가 고향 경주를 찾았습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1980년대 TV문화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아침마당>의 단골 출연자로 유명했던 박동규 교수는 박목월 시인의 아들입니다.

목월의 고향이자 박동규 교수의 고향이기도 한 경주.
이곳에 시인 박목월의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올해로 여든 다섯. 박 교수가 오랜만에 아버지의 문학관을 찾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아버지의 익숙한 목소리.

<전신> (박목월 육성낭송)
나는 물방울이 된다
추녀 밑에서 떨어지는
그 생명의 흐르는 리듬을
나는 안다

나는 접시가 된다
그것이 받드는
허전한 공간의 충만을 나는 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비록 녹음이지만 아버님이 시 낭송하는 목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울컥해서 한참 동안 가슴이 찌릿하게 남아 있는 게 역시 ‘아버님의 문학관에 왔구나.’ 하는 걸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1915년 경주에서 태어난 박목월은 고즈넉한 풍경과 사람들을 노래한 서정시를 고향 경주에서 써내려갔습니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 있다고 할 만큼 박목월은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되찾은 나라와 우리의 삶을 그려낸 시들은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목월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시집 <청록집>을 발표한 뒤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자연의 참다운 숨결, 언어의 순수한 맛 이런 것들을 다 그리워하고 살았던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 데서 오는 특징을 잘 대변해 주는 ‘청록파’를 좋아했겠죠.

청록파 박목월의 대표작 ‘나그네’ 역시 이 무렵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낭독>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목월은 유년시절부터 경주의 산과 들에서 시인의 꿈을 키웠고, 24살이던 1939년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초기 시는 전부 경주(에 대한) 시죠. 아버님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자연 공간들은 바로 소재였고 그것이 삶의 터전이었고 정신의 본향이었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하나의 꿈이었던 그 모든 것이 이 속에 다 들어있었다 생각이 됩니다.

목월이 살던 집 그 자리에 옛 모습을 되살린 초가.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이건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여기 탁자에 이렇게 앉아가지고 시 쓸 때 원고 놓고 쓰시던 거 그대로 내가 보낸거예요.

누렇게 변해버린 노트 역시 목월이 쓰던 것.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지가 이런 노트를 참 좋아하셨어요. 이거 비싼, 이게 아마 월급 받아서 제일 좋은 노트 사 오셨을거예요.

오래된 일기.

<낭독>
몹시 아프다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애기다. 순산이다.
체중이 평균보다 더 무겁다는 게다.
이것도 첫 아비에게는 자랑인 것이다.


태어난 아이는 1939년생 박동규 교수.
아들의 생일을 기록한 85년 전 목월의 일기입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어렸을 때 썼던 글자예요. 아버님이 여기다 글자를 가르쳐줘서 이렇게 박 자를 썼다는 걸 얘기하고 있는데…….

어린 아들이 색연필로 한자 朴 자를 연습한 흔적.
서툰 두 글자 위로, 아버지는 ‘팔 아파 더 못 쓰겠다.’는 아들의 투정을 글로 옮겨놓았습니다.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목월의 일상들.
아내 유익순 여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소중한 기록들을 사십 년 넘게 간직해왔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어머니가 이런 걸 정말 소중한 성경처럼 소중한 걸로 생각하고 감춰두고 전쟁을 겪어가도 이걸 감춰두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 옛날에 일본 경찰들이 그걸 찾으러 다닌다는 얘기가 있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역사가 참 길죠. 아버님이 경주에서 살다가 대구로 왔다가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 갔다가 서울에서 전쟁 만나가지고 피난 와서, 이 머나먼 길을 이걸 짊어지고 다녔다는 얘기죠.

어머니 유익순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지도 27년.
시인의 아들은 어머니가 갖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켜왔던 목월의 미공개 유작 166편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님이 밤에 글을 쓰실 때 이걸 써놓고서는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친 것이 노트 속에 그대로 순서대로 다 있습니다.

목월이 시인으로 등단하기 이전인 1936년에 썼던 시.

<낭독>
놓인 길 다 가도
맘은 어두워
거리는 빛 없는
설움에 잠긴다
피오른 꿈 보람
이대로 스러져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시인의 고뇌도 느껴집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1939년도에 박목월 선생님 등단을 하셨으니까요. 등단한 이후에 그 전 과정을 전부 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으로, 문학사적으로 귀중한 보물이 될 것 같습니다.

노트와 미발표작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하기 한 달 전.
박동규 교수는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노트 62권 전체를 KBS 취재진에게 사전에 공개했습니다.
1930년대부터 시인이 써내려간 노트는 넘겨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이 종이가 거의 이제 부서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일반 노트가 아니고 종이 질이 백지 상태에다가 쭉 작성을 하셨어요.

박동규 교수의 제자이자, 이번 노트 공개 과정을 주도한 우정권 교수.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참 놀라운 것은 목월 선생님이 이 노트가 거의 초고일 텐데 지금 이거 보면 행 연을 다 구분해서 깨끗하게 돼 있잖아요. 한 작가가 창작할 때에 머릿속에 모든 어떤 시어라든가 행과 연과 운율과 리듬을 다 살려서 썼다…….

우 교수가 노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대학원 지도학생으로서 박동규 선생님 댁에 가본 적이 있어요. 갔더니 방 한 구석에 있는 보따리를 보게 됐고, 이 보따리가 뭡니까 하고 여쭤봤더니 박목월 선생님의 유작품 노트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당시 노트를 열어보지 못했던 우 교수는 3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목월의 노트를 떠올렸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어느 날 또 생각이 나서 선생님한테 보여달라고 여쭤보니까 와서 보라고 하셔서 보게 됐습니다. 보고 난 다음에는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공개를 망설이던 박 교수로부터 목월의 친필노트를 넘겨 받은 것은 지난해 4월이었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권 수를 세보니까요, 62권이고요. 62권을 제가 받아가지고 시 편 수를 세보니까 한 400편이 넘더라고요. 그 순간은 제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고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곧바로 목월의 시를 노트에서 되살려내는 판독과 분석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멀게는 90년 가까운 시간을 되짚어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작업.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중요한 건 목월 선생님이 이걸 전부 연필로 쓰셨어.

세월에 흐려진, 4만 자가 넘는 연필 글씨를 일일이 판독하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기존에 발표된 작품들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문학사적으로 봤을 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학자로서의 검증 과정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 검증 과정을 작년 8월부터 12월까지 그리고 올해 1월까지의 과정을 전부 다 거쳤습니다.

수백 편의 미공개 시를 혼자 힘으로 분석할 수 없었던 우 교수는 공동 연구진을 꾸렸습니다.

박덕규 / 단국대 명예교수
어떤 시는 완성품이 있고, 노트에 그 완성품으로 가는 과정이 있단 말이에요. 그것도 유품으로서 가치가 있죠. 시인이 어떤 변모 과정으로, 육필로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연구진은 기존의 어떤 지면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시 166 편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시인 박목월의 작품 세계가 새로 열린 것입니다.
목월이 떠난 지 46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목월의 시를 직접 만나봅니다.

이상호 / KBS 아나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시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박목월 시인의 미공개 유작이라고 들었습니다.

유성호 / 한양대 교수
오늘 낭송하시고 또 우리가 감상할 몇 편은 박목월 선생님 댁에 원고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최근에 그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돼서 대중들에게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입니다.

이상호 / KBS 아나운서
네 그러면 미발표작 가운데 먼저 ‘용설란’부터…….

<낭독>
용설란

파도소리에 뜰이 흔들리는
그 뜰에 용설란

반쯤 달빛에 풀리고
반쯤 달빛에 빛나는 육중한 잎새

반쯤 안개에 풀리고
반쯤 안개에 살아나는 제주도

말의 깃자락에 소나기가 묻어오는
그 낭낭한 모음의 하늘에 한라산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 빚어

달빛에 반쯤 풀리고
달빛에 반쯤 살아나는 제주도

안개에 반쯤 풀리고
안개에 반쯤 살아나는 용설란


이상호 / KBS 아나운서
박목월 시인이 제주생활을 하셨나봐요?

유성호 / 한양대 교수
원래 용설란이라는 게 용의 혓바닥처럼 생긴 잎새들이 여러 개 모인 이런 외관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박목월 선생님께서 1950년대 초반에 전쟁 직후에 제주도에 머무시면서 여기 나오는 대로 제주도, 한라산, 그리고 어눌한 사투리 이런 것들이 이제 서울에서 살던 목월 선생이 제주도에 가서 생긴 낯섦을 보여주는 건데 거기에 용설란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이상호 / KBS 아나운서
제가 느끼기에는 용설란을 낭송을 하면서 내용 자체는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렇게 희망적이거나 밝은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유성호 / 한양대 교수
이 용설란처럼, 용설란도 제주도의 식물이 아니고 어디선가 온 것이니까 그런 어떤 나그네로서의 마음 이런 것들이 동일성을 느꼈던 것 같아요. 박목월 선생은 역시 소리의 시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말의 그 아름다운 소리들 이런 것을 정확하게 이렇게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이 '낭낭한 모음'이야말로 박목월 선생의 시 세계를 이렇게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생전, 여러 편의 작품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목월은 시와 음악을 한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목월 /1976년 방송 인터뷰
시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운율의 문제거든요. 리듬 아니겠습니까? 리듬이라는 것 자체가 음악적인 용어예요. 그래서 시인이나 음악가나 모든 예술가의 가슴 속에 있는 소위 ‘시 정신’은 음악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겠죠.

풀꽃시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나태주 시인.
유년 시절 읽었던 목월의 시가 나태주를 시인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처음 목월의 존재를 알게 해 준 시 한 편.

나태주 / 시인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이 시를 제가 열, 그러니까 열네 살 때 읽었을까요? 열세 살, 열네 살, 만으로. 이 시를 읽고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아 세상에 이런 문장도 있구나. 이런 가슴 치는 이런 훌륭한 문장도 있구나. 그렇게 해서 '시인이 되겠다.' 그렇게 결심을 했습니다.

시로 만났던 목월을 나태주는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다시 인연을 맺게 됩니다.

나태주 / 시인
1971년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내가 당선을 했는데 그때 나를 뽑아준 분이 박목월 선생님이에요. 1971년 1월 12일에 시상식을 하고 그 뒤에 1월 말인가 2월 초에 가서 뵙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나 군, 나 군은 서울 같은 데 올라오지 말고 시골에서 시만 써.' 근데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능력이 없어서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고 시골에서 살면서 시만 썼으니까 목월 선생님의 당부를 제가 무능해서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1940년대부터 누구나 즐겨 불렀던 ‘얼룩 송아지’.
목월의 시 세계는 동시에서 시작했습니다.

나태주 / 시인
박목월 선생님께서는 아동문학 그러니까 동시 동요 작가에서 출발해서 성인시 작가 시인으로 옮겨가셨어요. 그런데 이제 그랬어도 끝까지 동시 동요를 버리지 않고 같이 병행하면서 주로 성인시를 쓰셨지만 동시도 놓지 않고 쓰셨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월이 동시를 놓지 않았다는 그의 설명처럼 이번에 빛을 본 유작 가운데에도 동시라 할 만한 작품 수십 편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처음 공개되는 목월의 동시.

<낭독>
봄 부르는 소리

뒷산에는 눈 녹은 개울물 소리
돌돌돌 돌돌돌
봄을 부르네

봄아씨 꽃아씨 어서 오세요
꽃수레 꿈수레 타고 오세요

얼음이 풀려서 시냇물소리
돌돌돌 돌돌돌 봄을 부르네

은실비 봄비를 앞장세우고
봄아씨 꽃아씨 어서 오세요
산에도 들에도 꽃방석 펴면
우리도 즐겁게 봄잔치하자


생각지 못했던 미공개 작품의 등장.
문학 연구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박덕규 / 단국대 명예교수
유명한 시인의 노트에서 시가 발굴됐다 이런 개념이 아니고 지금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그런 수준이 꽤 있기 때문에 이게 중요하잖아요. 그 자체의 유물적인 가치가 첫째 있지만 두번째는 이 수준 자체가 지금 읽어도, 적어도 50년 이상 되는 50년 60년 돼가는 이런 것 안에서 그 수준이 있다는 건 그건 놀라운 일이고요.

미발표작 가운데는 생활인으로서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이른바 ‘생활시’도 있었습니다.

<낭독>
과실의 시

날로 고갈하는
처참한 박목월 일가의
가계부 위에
큼직한 운명의 바위가 자리 잡는데,

아 어린 것을 조부모께 맡겨야겠군.
사변 후 두 번째의 완패.
그런 어느 날
거리에서 문득 바라보는
과일 가게는 유난히 빛나고 화려하고
……

당시 목월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엿볼 수 있는 시어들.

유성호 / 한양대교수
여기 보면 '사변 후 두 번째 완패' 이런 구절이 있으니까, 1950년대 중반쯤에 '박목월 일가의 가계부'라는 약간 생활적인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까? 아마 경제적인 곤궁을 겪으신 것 같아요.
박목월 선생님은 초기에는 자연 이를테면 '청노루'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산도화'나 이런 것들을 그려서 완벽한 동양화법으로 아름다운 자연시를 썼지만 이렇게 중기쯤에 이르러서는 한국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상 우리가 가계부라는 단어가 시에 나오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고단한 소시민들의 삶을 이렇게 반영함으로써 생활 시인으로도 아주 높으신데 이런 작품들도 그러한 유명세를 좀 보완하는 그런 새로운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목월의 시에 가계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건 목월이 실제로 가계부를 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성호 / 한양대 교수
박목월 선생님은 그냥 자신이 지상에서 겪는 혼란 또는 상처 또는 아버지로서의 부담감 이런 것들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쓰셔서 어찌 보면 그 당시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또 그런 고달픔은 지금도 변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뭐랄까 친화력 있는 공감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친필 노트에는 아들에게 준 용돈 액수까지 적어둔 목월의 기록이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던 당시 목월 일가의 생활상과 그때의 시대상이 시로 태어난 셈입니다.

미공개 노트에는 목월에게 특별했던 날의 기록도 담겨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살고 있는 충남 공주, 옛 도심에 자리잡은 붉은 벽돌의 교회.

나태주 / 시인
이 교회당은 공주 중앙감리교회 교회당인데 목월 선생님께서 결혼하신 바로 그 교회당입니다. 6.25 때 약간 손상을 입었다고 그러는데 이 벽체라든가 이 전체는 그대로라고 해요. 유익순 여사는 여기 이 교회하고 관계에 있는 영명학교, 영명여학교 학생이셨어요. 충남 이 근동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교입니다.

스물셋 신랑과 열여덟 신부로 결혼식을 올린 박목월 유익순 부부.
신랑 목월은 신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낭독>
흰 너울을 쓴 아래 얼굴에는 그래도 약간 분홍이 스미고,
그래서 그가 가진 튤립꽃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결혼을 마쳤다.


작품집으로, 일기장으로, 자신이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을 담아놓은 목월의 노트.

아내 유익순 여사가 일생 동안 고이 간직했던 남편 목월의 노트는 27년 전 보자기에 싸인 채
아들 박 교수에게 남겨졌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그 보자기라는 게 비단 보자기 있지 않습니까? 단색으로 된 걸로 이렇게 묶어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걸 책장 옆에다 놔뒀다고. ‘너한테 남긴다.’ 이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받아들여서 그걸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1997년 유익순 여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진 노트는 왜 이제야 공개된 것일까.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어머니 보자기 푼다는 게 그게 쉬운 일이 아닙디다. 어머니의 그 정성만큼을 내가 어떻게 살려서 이것을 발표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이 들고, 아버님이 시집에 담고자 하는 시들을 고르기 위해서 고민하셨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고르는 기준을 내가 모르잖아요. 아버님이 해놓은 구분의 선을 허물어뜨리기가 내가 싫어서 그냥 내가 가만히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있고요.

그렇게 27년이 흘렀습니다.

노트 공개를 망설이던 박 교수를 설득한 건 제자 우정권 교수였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교수
이걸 그냥 묻혀둔다는 것은 우리 문학하는 연구자들하고 많은 문학 애호가들한테의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박동규 선생님을 원망하는 목소리를 먼저 냈습니다. 선생님 왜 이 보물단지를 왜 집안 한 구석에 가지고 계셨습니까? 이거를 세상 사람들에게 꺼내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박목월 선생님의 그 흔적들을 다 느낄 것이고, 이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 후대들이 다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수십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목월의 미공개 유작 166편이 마침내 세상 빛을 보게 됐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더 가지고 있고 싶었는데 나도 나이가 있고 내가 이걸 지금 안 해놓으면 누가 할 사람이 없지 않나 하는 조바심이 공개하게 된 동기의 한 가지고, 사실은 시가 내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잘 쓴 시가 아니지 않습니까? 독자들이 읽을 때는 내가 못썼다고 생각하는 시도 독자들이 볼 때는 그게 더 좋다고 느낄 수도 있듯이 한번 같이 울어보고 같이 웃어보는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경기도 용인.
시인 박목월과 아내 유익순 여사가 함께 잠든 곳을 아들 박 교수가 찾았습니다.

수백 편의 작품을 생전에 공개하지 않았던 목월.
아버지의 노트를 세상에 내놓은 아들의 선택을 목월은 어떻게 생각할까.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님은 내가 잘못했어도, 세상에서 잘못하고 가도 꾸짖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잘못이 있어도 아버지는 ‘그래 그러면 됐다.’ 그 정도지, 꾸짖지 않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렇고...
(어머님 아버님 만나 뵙게 되셔도 '수고했다.'고 해주실까요?)
그렇게 기대하고 있죠. 내가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버님 성격에 아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박목월 유작품 발간위원회는 미발표 유작 166 편을 포함한 새로운 ‘박목월 전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된 시인의 일생을 바탕으로 ‘박목월 평전’도 발간할 계획이다.>

46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박목월 시인의 미공개 작품들.

시인이 정성 들여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시어들은 오래도록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반 세기 전 우리 곁을 떠난 시인 박목월.

이번에 세상 빛을 본 유작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시인으로서의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
박목월 선생님 보고 그랬대요. 선생님 대표작은 ‘나그네’지요? 그러면 ‘ 야 그런 소리들 말아라. 나는 대표작을 오늘 저녁에 쓸거다.’ 그랬대요. 그게 시인의 꿈이 아닌가.

취재: 유동엽
촬영: 김성현 김민준 조선기 강우용
편집: 김태형 강정희
그래픽: 장수현 KBS아트비전 솔미디어
리서처: 신용하 김예은
조연출: 유화영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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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보다] 목월의 미공개 시 세상 빛을 보다
    • 입력 2024-03-17 23:23:07
    • 수정2024-03-18 16:59:30
    문화

[더 보다 5회] 목월의 미공개 시, 세상 빛을 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 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 귀 귀가 닮았네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할 나이에 누구나 따라 불렀던 동요 <얼룩 송아지>.
하지만 노랫말을 누가 썼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태주 /시인
박목월 선생을 상징하는 몇 개의 시 중에 <얼룩 송아지>가 들어가고요, <나그네>가 들어가고요,
그러니까 당신의 상징처럼 이렇게 느껴지셨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했던 노래입니다.

<낭독>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90년 전 시인 박목월이 청년시절부터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시가 담긴 62권의 노트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님 노트라는 게 그냥 일반적인 무슨 사설을 쓴 노트가 아니라 작품을, 거의 완성된 작품들을 쓴 노트들을 내가 만지게 된다는 것이 벅차오르고…….

1938년 아내 유익순 여사와 결혼한 목월.

시인과 그의 노트 곁에는 늘 아내가 있었고, 남편이 남긴 노트를 아내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태어난 것이 1939년인데 36년 치부터 결혼해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노트를 한 권도 놓치지 않고 이것을 어머니가 열심히, 어디다 감췄는지도 모르게 감춰서 이것을 보존하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면…….

목월의 작품 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노트와 평생 써온 시들이 시인이 세상을 뜬 지 4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박동규 교수가 고향 경주를 찾았습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1980년대 TV문화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아침마당>의 단골 출연자로 유명했던 박동규 교수는 박목월 시인의 아들입니다.

목월의 고향이자 박동규 교수의 고향이기도 한 경주.
이곳에 시인 박목월의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올해로 여든 다섯. 박 교수가 오랜만에 아버지의 문학관을 찾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아버지의 익숙한 목소리.

<전신> (박목월 육성낭송)
나는 물방울이 된다
추녀 밑에서 떨어지는
그 생명의 흐르는 리듬을
나는 안다

나는 접시가 된다
그것이 받드는
허전한 공간의 충만을 나는 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비록 녹음이지만 아버님이 시 낭송하는 목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울컥해서 한참 동안 가슴이 찌릿하게 남아 있는 게 역시 ‘아버님의 문학관에 왔구나.’ 하는 걸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1915년 경주에서 태어난 박목월은 고즈넉한 풍경과 사람들을 노래한 서정시를 고향 경주에서 써내려갔습니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 있다고 할 만큼 박목월은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되찾은 나라와 우리의 삶을 그려낸 시들은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목월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시집 <청록집>을 발표한 뒤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자연의 참다운 숨결, 언어의 순수한 맛 이런 것들을 다 그리워하고 살았던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 데서 오는 특징을 잘 대변해 주는 ‘청록파’를 좋아했겠죠.

청록파 박목월의 대표작 ‘나그네’ 역시 이 무렵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낭독>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목월은 유년시절부터 경주의 산과 들에서 시인의 꿈을 키웠고, 24살이던 1939년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초기 시는 전부 경주(에 대한) 시죠. 아버님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자연 공간들은 바로 소재였고 그것이 삶의 터전이었고 정신의 본향이었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하나의 꿈이었던 그 모든 것이 이 속에 다 들어있었다 생각이 됩니다.

목월이 살던 집 그 자리에 옛 모습을 되살린 초가.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이건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여기 탁자에 이렇게 앉아가지고 시 쓸 때 원고 놓고 쓰시던 거 그대로 내가 보낸거예요.

누렇게 변해버린 노트 역시 목월이 쓰던 것.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지가 이런 노트를 참 좋아하셨어요. 이거 비싼, 이게 아마 월급 받아서 제일 좋은 노트 사 오셨을거예요.

오래된 일기.

<낭독>
몹시 아프다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애기다. 순산이다.
체중이 평균보다 더 무겁다는 게다.
이것도 첫 아비에게는 자랑인 것이다.


태어난 아이는 1939년생 박동규 교수.
아들의 생일을 기록한 85년 전 목월의 일기입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어렸을 때 썼던 글자예요. 아버님이 여기다 글자를 가르쳐줘서 이렇게 박 자를 썼다는 걸 얘기하고 있는데…….

어린 아들이 색연필로 한자 朴 자를 연습한 흔적.
서툰 두 글자 위로, 아버지는 ‘팔 아파 더 못 쓰겠다.’는 아들의 투정을 글로 옮겨놓았습니다.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목월의 일상들.
아내 유익순 여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소중한 기록들을 사십 년 넘게 간직해왔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어머니가 이런 걸 정말 소중한 성경처럼 소중한 걸로 생각하고 감춰두고 전쟁을 겪어가도 이걸 감춰두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 옛날에 일본 경찰들이 그걸 찾으러 다닌다는 얘기가 있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역사가 참 길죠. 아버님이 경주에서 살다가 대구로 왔다가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 갔다가 서울에서 전쟁 만나가지고 피난 와서, 이 머나먼 길을 이걸 짊어지고 다녔다는 얘기죠.

어머니 유익순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지도 27년.
시인의 아들은 어머니가 갖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켜왔던 목월의 미공개 유작 166편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님이 밤에 글을 쓰실 때 이걸 써놓고서는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친 것이 노트 속에 그대로 순서대로 다 있습니다.

목월이 시인으로 등단하기 이전인 1936년에 썼던 시.

<낭독>
놓인 길 다 가도
맘은 어두워
거리는 빛 없는
설움에 잠긴다
피오른 꿈 보람
이대로 스러져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시인의 고뇌도 느껴집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1939년도에 박목월 선생님 등단을 하셨으니까요. 등단한 이후에 그 전 과정을 전부 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으로, 문학사적으로 귀중한 보물이 될 것 같습니다.

노트와 미발표작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하기 한 달 전.
박동규 교수는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노트 62권 전체를 KBS 취재진에게 사전에 공개했습니다.
1930년대부터 시인이 써내려간 노트는 넘겨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이 종이가 거의 이제 부서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일반 노트가 아니고 종이 질이 백지 상태에다가 쭉 작성을 하셨어요.

박동규 교수의 제자이자, 이번 노트 공개 과정을 주도한 우정권 교수.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참 놀라운 것은 목월 선생님이 이 노트가 거의 초고일 텐데 지금 이거 보면 행 연을 다 구분해서 깨끗하게 돼 있잖아요. 한 작가가 창작할 때에 머릿속에 모든 어떤 시어라든가 행과 연과 운율과 리듬을 다 살려서 썼다…….

우 교수가 노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대학원 지도학생으로서 박동규 선생님 댁에 가본 적이 있어요. 갔더니 방 한 구석에 있는 보따리를 보게 됐고, 이 보따리가 뭡니까 하고 여쭤봤더니 박목월 선생님의 유작품 노트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당시 노트를 열어보지 못했던 우 교수는 3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목월의 노트를 떠올렸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어느 날 또 생각이 나서 선생님한테 보여달라고 여쭤보니까 와서 보라고 하셔서 보게 됐습니다. 보고 난 다음에는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공개를 망설이던 박 교수로부터 목월의 친필노트를 넘겨 받은 것은 지난해 4월이었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권 수를 세보니까요, 62권이고요. 62권을 제가 받아가지고 시 편 수를 세보니까 한 400편이 넘더라고요. 그 순간은 제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고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곧바로 목월의 시를 노트에서 되살려내는 판독과 분석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멀게는 90년 가까운 시간을 되짚어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작업.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중요한 건 목월 선생님이 이걸 전부 연필로 쓰셨어.

세월에 흐려진, 4만 자가 넘는 연필 글씨를 일일이 판독하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
기존에 발표된 작품들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문학사적으로 봤을 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학자로서의 검증 과정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 검증 과정을 작년 8월부터 12월까지 그리고 올해 1월까지의 과정을 전부 다 거쳤습니다.

수백 편의 미공개 시를 혼자 힘으로 분석할 수 없었던 우 교수는 공동 연구진을 꾸렸습니다.

박덕규 / 단국대 명예교수
어떤 시는 완성품이 있고, 노트에 그 완성품으로 가는 과정이 있단 말이에요. 그것도 유품으로서 가치가 있죠. 시인이 어떤 변모 과정으로, 육필로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연구진은 기존의 어떤 지면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시 166 편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시인 박목월의 작품 세계가 새로 열린 것입니다.
목월이 떠난 지 46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목월의 시를 직접 만나봅니다.

이상호 / KBS 아나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시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박목월 시인의 미공개 유작이라고 들었습니다.

유성호 / 한양대 교수
오늘 낭송하시고 또 우리가 감상할 몇 편은 박목월 선생님 댁에 원고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최근에 그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돼서 대중들에게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입니다.

이상호 / KBS 아나운서
네 그러면 미발표작 가운데 먼저 ‘용설란’부터…….

<낭독>
용설란

파도소리에 뜰이 흔들리는
그 뜰에 용설란

반쯤 달빛에 풀리고
반쯤 달빛에 빛나는 육중한 잎새

반쯤 안개에 풀리고
반쯤 안개에 살아나는 제주도

말의 깃자락에 소나기가 묻어오는
그 낭낭한 모음의 하늘에 한라산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 빚어

달빛에 반쯤 풀리고
달빛에 반쯤 살아나는 제주도

안개에 반쯤 풀리고
안개에 반쯤 살아나는 용설란


이상호 / KBS 아나운서
박목월 시인이 제주생활을 하셨나봐요?

유성호 / 한양대 교수
원래 용설란이라는 게 용의 혓바닥처럼 생긴 잎새들이 여러 개 모인 이런 외관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박목월 선생님께서 1950년대 초반에 전쟁 직후에 제주도에 머무시면서 여기 나오는 대로 제주도, 한라산, 그리고 어눌한 사투리 이런 것들이 이제 서울에서 살던 목월 선생이 제주도에 가서 생긴 낯섦을 보여주는 건데 거기에 용설란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이상호 / KBS 아나운서
제가 느끼기에는 용설란을 낭송을 하면서 내용 자체는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렇게 희망적이거나 밝은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유성호 / 한양대 교수
이 용설란처럼, 용설란도 제주도의 식물이 아니고 어디선가 온 것이니까 그런 어떤 나그네로서의 마음 이런 것들이 동일성을 느꼈던 것 같아요. 박목월 선생은 역시 소리의 시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말의 그 아름다운 소리들 이런 것을 정확하게 이렇게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이 '낭낭한 모음'이야말로 박목월 선생의 시 세계를 이렇게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생전, 여러 편의 작품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목월은 시와 음악을 한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목월 /1976년 방송 인터뷰
시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운율의 문제거든요. 리듬 아니겠습니까? 리듬이라는 것 자체가 음악적인 용어예요. 그래서 시인이나 음악가나 모든 예술가의 가슴 속에 있는 소위 ‘시 정신’은 음악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겠죠.

풀꽃시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나태주 시인.
유년 시절 읽었던 목월의 시가 나태주를 시인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처음 목월의 존재를 알게 해 준 시 한 편.

나태주 / 시인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이 시를 제가 열, 그러니까 열네 살 때 읽었을까요? 열세 살, 열네 살, 만으로. 이 시를 읽고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아 세상에 이런 문장도 있구나. 이런 가슴 치는 이런 훌륭한 문장도 있구나. 그렇게 해서 '시인이 되겠다.' 그렇게 결심을 했습니다.

시로 만났던 목월을 나태주는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다시 인연을 맺게 됩니다.

나태주 / 시인
1971년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내가 당선을 했는데 그때 나를 뽑아준 분이 박목월 선생님이에요. 1971년 1월 12일에 시상식을 하고 그 뒤에 1월 말인가 2월 초에 가서 뵙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나 군, 나 군은 서울 같은 데 올라오지 말고 시골에서 시만 써.' 근데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능력이 없어서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고 시골에서 살면서 시만 썼으니까 목월 선생님의 당부를 제가 무능해서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1940년대부터 누구나 즐겨 불렀던 ‘얼룩 송아지’.
목월의 시 세계는 동시에서 시작했습니다.

나태주 / 시인
박목월 선생님께서는 아동문학 그러니까 동시 동요 작가에서 출발해서 성인시 작가 시인으로 옮겨가셨어요. 그런데 이제 그랬어도 끝까지 동시 동요를 버리지 않고 같이 병행하면서 주로 성인시를 쓰셨지만 동시도 놓지 않고 쓰셨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월이 동시를 놓지 않았다는 그의 설명처럼 이번에 빛을 본 유작 가운데에도 동시라 할 만한 작품 수십 편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처음 공개되는 목월의 동시.

<낭독>
봄 부르는 소리

뒷산에는 눈 녹은 개울물 소리
돌돌돌 돌돌돌
봄을 부르네

봄아씨 꽃아씨 어서 오세요
꽃수레 꿈수레 타고 오세요

얼음이 풀려서 시냇물소리
돌돌돌 돌돌돌 봄을 부르네

은실비 봄비를 앞장세우고
봄아씨 꽃아씨 어서 오세요
산에도 들에도 꽃방석 펴면
우리도 즐겁게 봄잔치하자


생각지 못했던 미공개 작품의 등장.
문학 연구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박덕규 / 단국대 명예교수
유명한 시인의 노트에서 시가 발굴됐다 이런 개념이 아니고 지금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그런 수준이 꽤 있기 때문에 이게 중요하잖아요. 그 자체의 유물적인 가치가 첫째 있지만 두번째는 이 수준 자체가 지금 읽어도, 적어도 50년 이상 되는 50년 60년 돼가는 이런 것 안에서 그 수준이 있다는 건 그건 놀라운 일이고요.

미발표작 가운데는 생활인으로서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이른바 ‘생활시’도 있었습니다.

<낭독>
과실의 시

날로 고갈하는
처참한 박목월 일가의
가계부 위에
큼직한 운명의 바위가 자리 잡는데,

아 어린 것을 조부모께 맡겨야겠군.
사변 후 두 번째의 완패.
그런 어느 날
거리에서 문득 바라보는
과일 가게는 유난히 빛나고 화려하고
……

당시 목월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엿볼 수 있는 시어들.

유성호 / 한양대교수
여기 보면 '사변 후 두 번째 완패' 이런 구절이 있으니까, 1950년대 중반쯤에 '박목월 일가의 가계부'라는 약간 생활적인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까? 아마 경제적인 곤궁을 겪으신 것 같아요.
박목월 선생님은 초기에는 자연 이를테면 '청노루'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산도화'나 이런 것들을 그려서 완벽한 동양화법으로 아름다운 자연시를 썼지만 이렇게 중기쯤에 이르러서는 한국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상 우리가 가계부라는 단어가 시에 나오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고단한 소시민들의 삶을 이렇게 반영함으로써 생활 시인으로도 아주 높으신데 이런 작품들도 그러한 유명세를 좀 보완하는 그런 새로운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목월의 시에 가계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건 목월이 실제로 가계부를 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성호 / 한양대 교수
박목월 선생님은 그냥 자신이 지상에서 겪는 혼란 또는 상처 또는 아버지로서의 부담감 이런 것들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쓰셔서 어찌 보면 그 당시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또 그런 고달픔은 지금도 변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뭐랄까 친화력 있는 공감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친필 노트에는 아들에게 준 용돈 액수까지 적어둔 목월의 기록이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던 당시 목월 일가의 생활상과 그때의 시대상이 시로 태어난 셈입니다.

미공개 노트에는 목월에게 특별했던 날의 기록도 담겨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살고 있는 충남 공주, 옛 도심에 자리잡은 붉은 벽돌의 교회.

나태주 / 시인
이 교회당은 공주 중앙감리교회 교회당인데 목월 선생님께서 결혼하신 바로 그 교회당입니다. 6.25 때 약간 손상을 입었다고 그러는데 이 벽체라든가 이 전체는 그대로라고 해요. 유익순 여사는 여기 이 교회하고 관계에 있는 영명학교, 영명여학교 학생이셨어요. 충남 이 근동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교입니다.

스물셋 신랑과 열여덟 신부로 결혼식을 올린 박목월 유익순 부부.
신랑 목월은 신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낭독>
흰 너울을 쓴 아래 얼굴에는 그래도 약간 분홍이 스미고,
그래서 그가 가진 튤립꽃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결혼을 마쳤다.


작품집으로, 일기장으로, 자신이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을 담아놓은 목월의 노트.

아내 유익순 여사가 일생 동안 고이 간직했던 남편 목월의 노트는 27년 전 보자기에 싸인 채
아들 박 교수에게 남겨졌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그 보자기라는 게 비단 보자기 있지 않습니까? 단색으로 된 걸로 이렇게 묶어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걸 책장 옆에다 놔뒀다고. ‘너한테 남긴다.’ 이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받아들여서 그걸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1997년 유익순 여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진 노트는 왜 이제야 공개된 것일까.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어머니 보자기 푼다는 게 그게 쉬운 일이 아닙디다. 어머니의 그 정성만큼을 내가 어떻게 살려서 이것을 발표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이 들고, 아버님이 시집에 담고자 하는 시들을 고르기 위해서 고민하셨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고르는 기준을 내가 모르잖아요. 아버님이 해놓은 구분의 선을 허물어뜨리기가 내가 싫어서 그냥 내가 가만히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있고요.

그렇게 27년이 흘렀습니다.

노트 공개를 망설이던 박 교수를 설득한 건 제자 우정권 교수였습니다.

우정권 / 단국대 교수
이걸 그냥 묻혀둔다는 것은 우리 문학하는 연구자들하고 많은 문학 애호가들한테의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박동규 선생님을 원망하는 목소리를 먼저 냈습니다. 선생님 왜 이 보물단지를 왜 집안 한 구석에 가지고 계셨습니까? 이거를 세상 사람들에게 꺼내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박목월 선생님의 그 흔적들을 다 느낄 것이고, 이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 후대들이 다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수십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목월의 미공개 유작 166편이 마침내 세상 빛을 보게 됐습니다.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더 가지고 있고 싶었는데 나도 나이가 있고 내가 이걸 지금 안 해놓으면 누가 할 사람이 없지 않나 하는 조바심이 공개하게 된 동기의 한 가지고, 사실은 시가 내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잘 쓴 시가 아니지 않습니까? 독자들이 읽을 때는 내가 못썼다고 생각하는 시도 독자들이 볼 때는 그게 더 좋다고 느낄 수도 있듯이 한번 같이 울어보고 같이 웃어보는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경기도 용인.
시인 박목월과 아내 유익순 여사가 함께 잠든 곳을 아들 박 교수가 찾았습니다.

수백 편의 작품을 생전에 공개하지 않았던 목월.
아버지의 노트를 세상에 내놓은 아들의 선택을 목월은 어떻게 생각할까.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님은 내가 잘못했어도, 세상에서 잘못하고 가도 꾸짖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잘못이 있어도 아버지는 ‘그래 그러면 됐다.’ 그 정도지, 꾸짖지 않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렇고...
(어머님 아버님 만나 뵙게 되셔도 '수고했다.'고 해주실까요?)
그렇게 기대하고 있죠. 내가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버님 성격에 아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박목월 유작품 발간위원회는 미발표 유작 166 편을 포함한 새로운 ‘박목월 전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된 시인의 일생을 바탕으로 ‘박목월 평전’도 발간할 계획이다.>

46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박목월 시인의 미공개 작품들.

시인이 정성 들여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시어들은 오래도록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반 세기 전 우리 곁을 떠난 시인 박목월.

이번에 세상 빛을 본 유작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시인으로서의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
박목월 선생님 보고 그랬대요. 선생님 대표작은 ‘나그네’지요? 그러면 ‘ 야 그런 소리들 말아라. 나는 대표작을 오늘 저녁에 쓸거다.’ 그랬대요. 그게 시인의 꿈이 아닌가.

취재: 유동엽
촬영: 김성현 김민준 조선기 강우용
편집: 김태형 강정희
그래픽: 장수현 KBS아트비전 솔미디어
리서처: 신용하 김예은
조연출: 유화영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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