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K] 5·18 첫 사망자 ‘故 이세종 열사’ 의미는?

입력 2024.03.19 (19:55) 수정 2024.03.1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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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슈K 시간입니다

전북대학교 학생이었던 고 이세종 열사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첫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전북은 물론,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재정립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세종 열사의 5.18 첫 사망자 공식 인정이 어떤 의미가 있고, 전북민주화운동이 재평가받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지 이석환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과 함께 자세히 알아봅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고 이세종 열사, 어떤 분이었는지 소개해주십시오.

[답변]

고 이세종 열사는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요,

5월 17일 토요일 전북대 제1 학생회관에서 '계엄반대' '전두환 결사반대'를 외치며 4월부터 연일 계속되던 농성을 40여명의 학우들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자 전북대 안에는 제7공수 계엄군이 들어와 학생회관을 포위했는데요,

시위중이던 학생들을 마치 토끼몰이하듯 옥상까지 쫒아가며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 진압작전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체포되었는데, 결국 이세종 열사는 새벽 6시경 학생회관 옆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됐습니다.

그의 죽음이 단순 추락사가 아닌 무력에 의한 폭력에 의한 죽음임이 밝혀졌고, 이후 동료들과 학생들이 이세종 추모비를 세우고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등을 계속 요구해왔습니다.

[앵커]

최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이 열사를 첫 사망자로 공식 인정했는데요,

어떤 점을 근거로 들어 첫 사망자로 인정했는지요?

[답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월 18일 1시40분에서 50분 사이에 전북대를 장악하려는 제7공수 여단의 진압과정에서 폭행당한 뒤 추락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기존에 알려진 첫 희생자보다 하루가 빠른건데요,

이것은 목격자 진술과 계엄군 작전일지, 그리고 현장조사를 통해 이뤄진 결과입니다.

2002년 학술세미나에서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가 '5.18 최초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최초 희생자는 이세종이다' 라고 발표하면서 우리는 이세종열사의 첫 사망자 공식인정을 항상 기원해왔는데요,

실로 44년만에 공식 인정된 것입니다.

[앵커]

이세종 열사가 첫 사망자로 공식 인정되면서 전라북도 민주화운동,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역사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답변]

먼저 5.18 민주화운동이 광주,전남에서 전북을 포함한 전국적인 민중항쟁으로 시간적, 공간적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군부가 노렸던 지역 고립전략이 밝혀졌고, 특히 5.18민주화운동하면 변방으로만 알려졌던 전북이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전북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묻혀졌던 과거 진실들을 발굴할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나아가 전북대학교와 전북이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진원지와 성지라는 사실이 역사로 기록됐고요 앞으로 전북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가 새로 쓰이게 될것임을 인정받게 된겁니다.

[앵커]

그런데 아직도 이세종 열사의 죽음의 원인을 확실히 밝히지 못했죠.

전북 민주화운동이 새롭게 재평가받으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요?

[답변]

일단, 이세종 열사 죽음의 원인부터 밝혀야죠.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민주화운동이고 민중항쟁이지만 지금도 누가 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을 승인한 미국의 책임 등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한 당시 희생자 명단이 대부분 광주.전남지역에 한정되어 초기에 이세종열사가 포함되지 않았던 거지요.

아직도 이세종열사가 누구에게 폭행당하고, 옥상에서 추락한 경위등이 규명되지 않아, 지금이라도 누군가의 양심고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앵커]

이세종 열사뿐 아니라 전북 지역 5.18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와 진상규명도 이뤄져야겠지요?

[답변]

전북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건과 관련자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당시 전북대 시위현장에서 체포, 구금된 사람이 35명에 이르고, 전북대 뿐만 아니라 전북지역의 모든 대학 대표자들이 온 몸으로 항거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당시 원광대 한의대 재학중이던 임균수 열사가 광주항쟁에 참여하다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 총탄에 희생되었고요.

고등학생으로는 최초로 5. 27에 신흥고등학생들이 시위를 했습니다.

이외에도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5.18진상을 알리다 피습, 징계를 당한 종교계, 교육계, 공무원들이 적지 않은데요,

여산성당 박창신신부를 군인들이 성당까지 찾아와 대검으로 테러한 사건이 대표적이며 이 사전 역시 가해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진실과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겠습니다.

[앵커]

이세종열사의 첫 사망자 공식인정을 계기로 추모사업에도 큰 힘이 실릴 전망이라고요?

[답변]

그동안 5.18동지회등에서 열사의 모교인 전라고등학교 후배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전달해 왔고, 올해부터는 5.17 추모제때 전북대 재학생에게 전북대총동창회가 나서서 이세종장학금 지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공식인정을 계기로 전북대학교총동창회와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서'5․18민주화운동 첫 희생자 이세종 열사 기념추모사업회'를 조직, 다가오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기념행사를 범도민 차원에서 도민들과 함께 개최하는 '2024년 전북민주주의행동 4월에서 6월로, 전북특별자치도 추진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앵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영상편집:최승리/글·구성:진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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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K] 5·18 첫 사망자 ‘故 이세종 열사’ 의미는?
    • 입력 2024-03-19 19:55:40
    • 수정2024-03-19 20:27:35
    뉴스7(전주)
[앵커]

이슈K 시간입니다

전북대학교 학생이었던 고 이세종 열사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첫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전북은 물론,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재정립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세종 열사의 5.18 첫 사망자 공식 인정이 어떤 의미가 있고, 전북민주화운동이 재평가받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지 이석환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과 함께 자세히 알아봅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고 이세종 열사, 어떤 분이었는지 소개해주십시오.

[답변]

고 이세종 열사는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요,

5월 17일 토요일 전북대 제1 학생회관에서 '계엄반대' '전두환 결사반대'를 외치며 4월부터 연일 계속되던 농성을 40여명의 학우들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자 전북대 안에는 제7공수 계엄군이 들어와 학생회관을 포위했는데요,

시위중이던 학생들을 마치 토끼몰이하듯 옥상까지 쫒아가며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 진압작전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체포되었는데, 결국 이세종 열사는 새벽 6시경 학생회관 옆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됐습니다.

그의 죽음이 단순 추락사가 아닌 무력에 의한 폭력에 의한 죽음임이 밝혀졌고, 이후 동료들과 학생들이 이세종 추모비를 세우고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등을 계속 요구해왔습니다.

[앵커]

최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이 열사를 첫 사망자로 공식 인정했는데요,

어떤 점을 근거로 들어 첫 사망자로 인정했는지요?

[답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월 18일 1시40분에서 50분 사이에 전북대를 장악하려는 제7공수 여단의 진압과정에서 폭행당한 뒤 추락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기존에 알려진 첫 희생자보다 하루가 빠른건데요,

이것은 목격자 진술과 계엄군 작전일지, 그리고 현장조사를 통해 이뤄진 결과입니다.

2002년 학술세미나에서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가 '5.18 최초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최초 희생자는 이세종이다' 라고 발표하면서 우리는 이세종열사의 첫 사망자 공식인정을 항상 기원해왔는데요,

실로 44년만에 공식 인정된 것입니다.

[앵커]

이세종 열사가 첫 사망자로 공식 인정되면서 전라북도 민주화운동,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역사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답변]

먼저 5.18 민주화운동이 광주,전남에서 전북을 포함한 전국적인 민중항쟁으로 시간적, 공간적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군부가 노렸던 지역 고립전략이 밝혀졌고, 특히 5.18민주화운동하면 변방으로만 알려졌던 전북이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전북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묻혀졌던 과거 진실들을 발굴할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나아가 전북대학교와 전북이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진원지와 성지라는 사실이 역사로 기록됐고요 앞으로 전북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가 새로 쓰이게 될것임을 인정받게 된겁니다.

[앵커]

그런데 아직도 이세종 열사의 죽음의 원인을 확실히 밝히지 못했죠.

전북 민주화운동이 새롭게 재평가받으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요?

[답변]

일단, 이세종 열사 죽음의 원인부터 밝혀야죠.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민주화운동이고 민중항쟁이지만 지금도 누가 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을 승인한 미국의 책임 등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한 당시 희생자 명단이 대부분 광주.전남지역에 한정되어 초기에 이세종열사가 포함되지 않았던 거지요.

아직도 이세종열사가 누구에게 폭행당하고, 옥상에서 추락한 경위등이 규명되지 않아, 지금이라도 누군가의 양심고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앵커]

이세종 열사뿐 아니라 전북 지역 5.18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와 진상규명도 이뤄져야겠지요?

[답변]

전북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건과 관련자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당시 전북대 시위현장에서 체포, 구금된 사람이 35명에 이르고, 전북대 뿐만 아니라 전북지역의 모든 대학 대표자들이 온 몸으로 항거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당시 원광대 한의대 재학중이던 임균수 열사가 광주항쟁에 참여하다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 총탄에 희생되었고요.

고등학생으로는 최초로 5. 27에 신흥고등학생들이 시위를 했습니다.

이외에도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5.18진상을 알리다 피습, 징계를 당한 종교계, 교육계, 공무원들이 적지 않은데요,

여산성당 박창신신부를 군인들이 성당까지 찾아와 대검으로 테러한 사건이 대표적이며 이 사전 역시 가해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진실과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겠습니다.

[앵커]

이세종열사의 첫 사망자 공식인정을 계기로 추모사업에도 큰 힘이 실릴 전망이라고요?

[답변]

그동안 5.18동지회등에서 열사의 모교인 전라고등학교 후배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전달해 왔고, 올해부터는 5.17 추모제때 전북대 재학생에게 전북대총동창회가 나서서 이세종장학금 지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공식인정을 계기로 전북대학교총동창회와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서'5․18민주화운동 첫 희생자 이세종 열사 기념추모사업회'를 조직, 다가오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기념행사를 범도민 차원에서 도민들과 함께 개최하는 '2024년 전북민주주의행동 4월에서 6월로, 전북특별자치도 추진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앵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영상편집:최승리/글·구성:진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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