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다] 부활 천안함, 다시 서해로

입력 2024.03.2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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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보다 6회] 부활 천안함, 다시 서해로


2010년 3월 16일 평택항, 해군 승조원들이 출항 준비에 바쁩니다.

낮 12시 22분, 104명의 해군 장병들을 태운 초계함이 평택항을 떠나 작전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뒤.

문병옥/민군합동조사단 대변인(2010년 4월)
오전 8시 20분경 경비구역에 도착하여 정상적인 작전 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습니다. 20시 이후부터는 대위 등 29명이 야간 당직 근무를 수행하고 기타 인원은 휴식 및 정비 중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의 시작.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날 걔가 백령도 갈 때 11시인가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야 너는 엄마 바쁠 때 전화하냐. 엄마가 저녁에 전화할게.’ 그러고서 전화도 이제 끊기고 없지.

46명의 해군 장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았던 58명의 장병들에게도 힘겨웠던 고통의 시간들.

동료를 잃은 슬픔, 바닷물보다 차가웠던 사회적 냉대가 살아남은 장병들을 10년 넘게 괴롭혔습니다.

류지욱/중사(천안함 참전 장병)
생존자들에 대한 아픔을 모르는 경우도 많고, 손가락질하고….

말로 다 할 수 없었던 억울함.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예우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장병들의 희생을 딛고 다시 태어난 천안함.

10년 넘게 소홀했던 희생 장병들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14년 전 아비규환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던 해군 장교는 새롭게 태어난 천안함의 함장이 됐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장병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길.

새 천안함에 부여된 첫 번째 임무입니다.


<평택 2함대, 1월 22일>

한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던 지난 1월 새벽, 박연수 중령이 함정에 오릅니다.

14년 전 자신이 근무했던 초계함과 같은 이름을 가진 천안함.

지난해 해군에 인도돼 서해에 작전 배치된 새로운 천안함입니다.

천안함 피격 당시 대위였던 박연수 중령은 새 천안함의 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함장으로 부임하는 첫날.

지금부터 천안함장 임명장 전도 수여 및 보직 선서를 수여하겠습니다.

임명장. 해군 중령 박연수, 천안함장에 보함.
2024년 1월 22일 해군참모총장 대장 양용모 대신 읽음.

박연수 중령/제2대 신임 천안함장
중령 박연수. 싸우면 박살 내겠습니다.

몇 시간 후 함장 취임식이 열리는 자리.

지금부터 초대 제2대 천안함장 이취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중령 박연수. 명 2함대, 보 천안함장. 2024년 1월 22일부. 해군 참모총장

14년 전, 자식들을 바다에 묻은 유가족들의 얼굴도 보입니다.

수많은 장병들의 희생을 딛고 다시 태어난 천안함.

떠나는 함장에게도 천안함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규철 중령/제1대 천안함장
오늘 취임하는 박연수 중령은 초계함 천안함의 작전관이었고 이제 호위함 천안함의 함장이 되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합니다. 신인 함장을 필두로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가 되어 서해에 뿌려진 전우들의 눈물을 잊지 않고 굳건히 서해를 수호하기를 당부합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날의 기억.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신임 천안함장의 각오는 더욱 비장합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천안함 46 용사와 고 한주호 준위,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전 등 서해 바다를 목숨 바쳐 지킨 모든 해양 수호 영웅들의 고귀한 희생에 존경을 표하며 서해수호 용사들 앞에서 다짐합니다. 적이 도발하면 그곳을 적들의 무덤으로 만들겠습니다. 또한, 단 한 명의 전우도 잃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천안함 장병 여러분, 함장과 함께 승리의 전장으로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박연수 중령의 각오와 결의를 말없이 듣고 있는 한 사람.

2010년 3월 26일 희생된 고(故) 이상희 하사의 아버지입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여행을 간다고 집사람이랑 내려가는 중이었어요. 삼천포를 거쳐서 샤랑도를 가려고 했었는데, 삼천포 다다르기 전에 둘째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아빠, 형이 탄 배가 이름이 천안함이 맞아요?’ 그러더라고요. ‘어, 그래 맞아. 천안함이야. 근데 왜?’ 그러니까 ‘아빠 지금 천안함이 침몰하고 있대’ 그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죠. ‘아니 멀쩡하던 배가 왜 침몰이 돼? 왜 침몰이 돼?’

믿기지 않았던 소식.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래서 삼천포에서 바로 차를 돌려서 평택으로 올라오는데, 삼천포에서 평택까지 올라오는 그 길이 왜 그렇게 길고 먼 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삼천포에서 평택까지 오면서 부처님부터, 예수님부터… 신이란 신은 다 찾은 것 같았어요. 제발 내 애가 살아있게만 좀 해달라고.

당시 소식을 들었던 또 한 사람.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배가 뭐 초계함이라고 나오더라고. 천안함이 아니고 초계함 어쩌고 이래. 나는 아무 생각도 없지 그런 거는.

처음에 부산에 있을 때 사고가 났다고 해도 그 배인줄 모르고 TV에 나온 자막 보니까 '문규석'이 있는 거야 아닌 줄 알았는데 아우…. 뭐 아무 생각도 없지.

'진짜인가?' 이런 생각만 들더라고요. 그래서 와보니까 뭐 그런데….

평택 2함대로 한걸음에 달려온 유가족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어떻게 올라온 지도 모르겠어요. 평택 도착하니까 새벽이더라고요. 새벽인데….

살아만 돌아와 달라는 간절한 바람.

하지만 아들 이름은 실종자 46명의 명단에 있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쭉 뜨더라고요. 생존 장병, 실종자….

실종자에 저희 애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거예요. 와. 진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 엄마하고 거기 바닥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어요. 다리에 힘이 풀려 갖고. 참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지옥이었죠. 지옥 같은 생활이었죠. 거기 애들 사고 나서 수습하고 뭐 하고 한 달 정도 평택 거기에 있으면서 그 한 달이 완전히 생지옥이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실종자 명단에 이름이 있어도 시신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귀한 자식이 하나둘 주검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에도 실종자 수색은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한 명의 목숨이라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시간들.

하지만 하늘은 이런 절박함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구조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UDT 대원의 죽음.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희생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유가족들은 간절했던 바람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46명 가족당 한 명 엄마든 아빠든 대표 한 명씩 해서 회의를 했어요. 저희가 회의를 해서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고 인양하는 쪽으로 가자. 어차피 그 당시에는 며칠 지났으니까 어차피 우리가 인정할 건 인정을 하자. ‘애들은 죽었다.’ ‘시신이라도 건지자.’

수색이 중단되고, 인양 작업이 본격화됐습니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선미 쪽을 인양하는 거로 결정을 내렸죠. 그래도 저희는 그것도 몰랐어요. 저희가 뭐 바다를 압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물때가 안 맞아서, 시야가 확보가 안 돼서 못 하느니 …. 가슴은 조마조마하고.

자식들이 잠들어있을 천안함이 하루라도 빨리 인양되길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마침내 차가운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던 천안함이 침몰 20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애들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요.

하나둘 발견되는 아들들의 주검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진짜 피가 마르더라고요. 저희가 스물세 번째인가, 스물네 번째에 나왔는데, 누구 애는 나오는데 우리 애는 기약도 없이 스물 몇 번째인데…그거를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너무 힘든 거였어요, 그때.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면서도 오히려 안도해야 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가족들에게 시신을 건져 올리면 연락이 오고 헬기로 애들 시신을 평택으로 보내고 했었는데, 누구 시신 건졌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박수 쳐주고 축하해줬어요. 부모들끼리 죽은 자식 시신 구했다고 박수 치고 가서 축하해줬어요. 그런 상황이었어요. 왜? 서로 자식들 시신도 못 건질까 봐.

이렇게 40명의 장병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창기 준위 등 6명의 장병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산화자로 분류됐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근데 결과적으로는 6명의 시신을 산화자로 분류됐잖아요. 그러니 그 부모 심정은 오죽하겠어. 난 다른 건 몰라도 그 여섯 분에 대한 그 심정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 왜? 내가 그 간절한 그 심정이었으니까. 시신이라도 건질 수 있게끔 해달라고.

동생이나 다름없었던 소중했던 장병들, 동료를 잃은 전우들, 아버지와 자식을 모두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몇몇 유가족은 끝내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 6명 산화자 중에 동해 사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애 보고 싶으면, 술 한잔 먹으면 동해바다 가서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자식 이름 부르면서 울었다 그러더라고요. 그 건강하던 분이 작년인가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래서 저희가, 가족들이 상처를 진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라면 자식을 나라를 위해서 바친 죄밖에는 없는데, 완전히 국민 절반이 절반 정도는 저희를 바라볼 때 무슨 자식 앞세워 이권을 취득한다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같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지인들이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맞아?’ 라고 물어보면 이제 탁 막히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뭘 어떻게 이해를 시키겠어요?

합동조사단의 공식적인 발표를 부인하는 의혹들이 무차별적으로 제기되면서 유가족들은 말 못할 울분을 삭여야 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게 싫었어요. ‘천안함 폭침 북한 소행 맞아?’ 라고 얘기를 물어보는 그게 싫었기 때문에 내가, 내 새끼가 천안함이랑 연관돼서 희생됐다는 얘기를 안 했었어요. 이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 부모들은 다 똑같은 심정일 거야. 그걸 어떻게 상세하게 설명을 하느냐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욕보이는 막말과 악성 댓글들이 유가족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결국, 유가족들은 천안함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래서 특별법을 요구했던 부분은 거기에 넣고 싶은 문구가 딱 있는 거예요. 허위사실 유포하는 죄, 그 죄를 묻고 싶은 겁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게 되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대가, 죗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거를 저희는 얘기하고 싶은 거였어요.

하지만 2020년 발의된 천안함 특별법은 4년간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습니다.

이번 국회 임기인 5월 말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될 예정입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더해 각종 억측과 비아냥까지 견뎌야 했던 힘겨웠던 시간들.

처참한 천안함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평택에 그 두 쪽 난 천안함을 바라볼 때는 참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천안함이 찢어진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 부모들 다 똑같은 심정일 겁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이 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천안함이 부활해서, 취역해서 서해를 누빈다는 생각을 할 때는 진짜 저희 그 찢어지는 가슴이 조금은 치유되는 느낌이죠.

아마 이런 감동은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잘 이해를 못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천안함 부활이 뭐가 그렇게 대수냐’라고 말씀하시는,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저희 부모들 입장에서는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천안함 부활이라는 그 자체는 내 자식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조금의 어떤 보답이라고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신형 천안함 취역식, 지난해 5월 19일>

지난해 5월, 13년 만에 새롭게 태어난 천안함이 본격적인 전투 임무를 부여받은 날.

류지욱 중사는 자신의 손으로 새 천안함의 공식 임무를 상징하는 깃발을 올렸습니다.

류지욱 중사/지난해 5월
새로운 천안함의 취역을 알리는 취역기 게양은 하늘에 있는 46명의 전우와 군과 사회에 있는 58명의 전우들과 함께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년이 지나고, 류지욱 중사는 14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천안함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천안함의 모습도, 동료들도 바뀌었지만, 천안함이란 세 글자는 가슴 속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류지욱 중사/천안함 통신 부사관(참전 장병)
'함명을 천안함으로 한다.' 그때부터 천안함을 꼭 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가졌고, 새로운 천안함에 꼭 타고 싶다고 제가 직접 지원을 했습니다.

14년 전, 작전 수행 중 동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천안함에 다시 승선하겠다는 결정을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류지욱 중사/천안함 통신 부사관(참전 장병)
천안함을 새로 탄다고 했을 당시에 제 아내가 가장 많이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자녀들은 제가 천안함 생존자라는 거를 아직은 잘 모르고 있는데, 이제는 자녀들한테도 아빠가 어떤 일을 했었고, 어떤 임무를 하다가 어떤 사건을 당했다. 그리고 그거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천안함을 탄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헌신, 남은 가족들의 희생과 아픔에 걸맞은 예우까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장병들에게 돌아왔던 냉소와 비아냥, 억울하게 희생된 동료 장병들에게 쏟아졌던 거친 언사들은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천안함에 다시 타야겠다는 결심은 여기에서 비롯됐습니다.

류지욱 중사/천안함 통신 부사관(참전 장병)
천안함을 다시 제가 타는 이유 중 하나가 지금 사람들 시선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하고, 생존자들에 대한 아픔을 모르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저는 일단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저의 명예를 위해서 천안함을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형 천안함 장교회의, 1월 23일>

함장으로 부임한 이후 열린 첫 장교회의.

먼저, 부하 직원을 보내는 전출 신고를 받습니다.

부하 장교들과 마주 앉은 첫 자리.

천안함이라서 각오가 더 남다릅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그래요. 함장 취임하고 지금 첫 사관회의를 하는데 어제 1차적으로 행사 잘 준비해줘서 너무 고맙고, 함장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천안함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 부탁하고.

오늘 제박훈련 갈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서 잘 준비해서 숙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합시다. 이상.

수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사고 직후에는 전역까지도 결심했었고 심적으로는 부담이 많이 됐지만 결국 해군 생활을 계속 하고 있으면 저는 함정 병과 장교로서 어느 배에서든 함장을 하게 될텐데, 천안함이 아닌 다른 함정에서 함장을 하게 된다면 평생 좀 후회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은 장병들의 희생을 딛고 부활한 천안함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습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저희가 이제 함형을 좀 구분을 해서 부르는데 PCC라는 한 1,000톤급 되는 과거의 천안함이 있었고, 폭침 이후에 그 천안함은 지금 2함대에 전시 시설로 관리가 되고 있고요.

지금 현재 제가 타고 있는 신형 천안함은 과거에 비해서 더 커진, 더 신형 무장을 탑재한 신형 전투함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이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었던 천안함과의 인연.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사실 천안함 참전 장병이라는 타이틀이 항상 제 앞에 붙어 있고, 그거는 먼저 전사한 천안함 46 용사에 대한 몫까지 계속 다 하라는 어떤 의미로 생각됐습니다. 그 책임감을 좀 잃고 싶지 않았고. 그게 제가 지금 천안함장으로 보직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원천적인 힘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냥 아무 영문도 없이 그냥 한 거예요. 우리 아들 그 한 마디에.

아들 문규석 원사가 천안함을 타고 출항하던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부대 앞에서 식당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건넸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오면 같이 얘기해보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여 년 전 이곳으로 이사 와 아들이 떠났던 그 부대 앞에 식당을 열었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날 부산에서 보따리 다 싸서 온다고 해서 왔는데 시작하고 나니까 이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갔어. 뭐 그때도 아마 이때 됐을 거야. 이 눈이 왔네. 너무 아는 사람도 없지. 그러고서 시작이라고 그냥 해봤어요.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유의자/장병들 식사 메인
많이 먹어라. 군인들은 특별히 두 개씩이다. 많이 먹어.

생전에 아들이 가장 좋아했던 계란 프라이.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유난히 그렇게 계란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군인들은 오면은 2개씩 해주고, 또 젊은 사람이 오면 2개씩 해주고….

그렇게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저녁에 일 마치고 아들이 생각나면 술 한잔 먹고 2함대 앞에 가서 내내 울고. 보고 싶어서. 그래서 12시 넘어서 가게 와가지고 아침밥 준비하고 그냥 그랬어요. 보고 싶으니까. 저녁에 술 한잔 먹고 가서 앞에서 울었어.

하루하루 힘겨웠던 시간들.

그러다 천안함이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좋더라고요. 어저께 다 들어가 봤는데 할미라서 몰라도 내 눈으로 보기에는 좋대. 잘 해주시겠지 뭐 함장님이 이끌어서.

아들이 출항했던 부두 앞에서 10년 넘게 천안함 장병들의 명예 회복을 기다려왔던 어머니.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약속 때문에. 안 했으면 아예 괜찮았을 건데 그 약속 해준다고 한 게 이렇게 된 거예요. 살아있을 때 지가 오면 가게 자리도 보러 다니자고 그랬는데… 그만 둬야지 뭐….

2010년 3월 26일, 당시 류지욱 하사는 통신 하사로, 박연수 대위는 작전관으로 천안함에서 근무했습니다.

이제 박연수 대위는 중령으로 진급해 새 천안함의 함장으로, 류지욱 하사는 통신 중사로, 다시 새 천안함에 몸을 실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긴박했던 순간, 46명의 부하와 동료를 떠나보냈던 두 사람.

당시 돌아오지 못한 전우와 유족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임무, 조국을 지키다 희생된 영령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들을 잊지 말아 달라는 염원이 더 새롭고 강력해진 천안함에 새겨져 있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더 필요한 게 뭐 있어. 천안함은 이렇게 됐으니까 잊지 말고 항상 기억을 좀 해줬으면 그거 바라는 거뿐이 더 있어요?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안보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안보라는 게 어느 희생 없이 되는 겁니까?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진보든 보수든 간에 거기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1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천안함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딛고 부활한 천안함이 이제 다시 서해로 향합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해군은 바다의 방패라고 합니다. 싸우면 박살 낼 수 있도록 정말 2함대 최전선에서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천안함 46용사의 몫까지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우리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취재: 강나루
촬영: 조선기 설태훈 최승구 강우용
편집: 강정희 이기승
그래픽: 장수현
리서처: 김경찬 김보현
조연출: 유화영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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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보다] 부활 천안함, 다시 서해로
    • 입력 2024-03-24 23:11:53
    사회
[더 보다 6회] 부활 천안함, 다시 서해로


2010년 3월 16일 평택항, 해군 승조원들이 출항 준비에 바쁩니다.

낮 12시 22분, 104명의 해군 장병들을 태운 초계함이 평택항을 떠나 작전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뒤.

문병옥/민군합동조사단 대변인(2010년 4월)
오전 8시 20분경 경비구역에 도착하여 정상적인 작전 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습니다. 20시 이후부터는 대위 등 29명이 야간 당직 근무를 수행하고 기타 인원은 휴식 및 정비 중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의 시작.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날 걔가 백령도 갈 때 11시인가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야 너는 엄마 바쁠 때 전화하냐. 엄마가 저녁에 전화할게.’ 그러고서 전화도 이제 끊기고 없지.

46명의 해군 장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았던 58명의 장병들에게도 힘겨웠던 고통의 시간들.

동료를 잃은 슬픔, 바닷물보다 차가웠던 사회적 냉대가 살아남은 장병들을 10년 넘게 괴롭혔습니다.

류지욱/중사(천안함 참전 장병)
생존자들에 대한 아픔을 모르는 경우도 많고, 손가락질하고….

말로 다 할 수 없었던 억울함.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예우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장병들의 희생을 딛고 다시 태어난 천안함.

10년 넘게 소홀했던 희생 장병들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14년 전 아비규환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던 해군 장교는 새롭게 태어난 천안함의 함장이 됐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장병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길.

새 천안함에 부여된 첫 번째 임무입니다.


<평택 2함대, 1월 22일>

한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던 지난 1월 새벽, 박연수 중령이 함정에 오릅니다.

14년 전 자신이 근무했던 초계함과 같은 이름을 가진 천안함.

지난해 해군에 인도돼 서해에 작전 배치된 새로운 천안함입니다.

천안함 피격 당시 대위였던 박연수 중령은 새 천안함의 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함장으로 부임하는 첫날.

지금부터 천안함장 임명장 전도 수여 및 보직 선서를 수여하겠습니다.

임명장. 해군 중령 박연수, 천안함장에 보함.
2024년 1월 22일 해군참모총장 대장 양용모 대신 읽음.

박연수 중령/제2대 신임 천안함장
중령 박연수. 싸우면 박살 내겠습니다.

몇 시간 후 함장 취임식이 열리는 자리.

지금부터 초대 제2대 천안함장 이취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중령 박연수. 명 2함대, 보 천안함장. 2024년 1월 22일부. 해군 참모총장

14년 전, 자식들을 바다에 묻은 유가족들의 얼굴도 보입니다.

수많은 장병들의 희생을 딛고 다시 태어난 천안함.

떠나는 함장에게도 천안함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규철 중령/제1대 천안함장
오늘 취임하는 박연수 중령은 초계함 천안함의 작전관이었고 이제 호위함 천안함의 함장이 되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합니다. 신인 함장을 필두로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가 되어 서해에 뿌려진 전우들의 눈물을 잊지 않고 굳건히 서해를 수호하기를 당부합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날의 기억.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신임 천안함장의 각오는 더욱 비장합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천안함 46 용사와 고 한주호 준위,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전 등 서해 바다를 목숨 바쳐 지킨 모든 해양 수호 영웅들의 고귀한 희생에 존경을 표하며 서해수호 용사들 앞에서 다짐합니다. 적이 도발하면 그곳을 적들의 무덤으로 만들겠습니다. 또한, 단 한 명의 전우도 잃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천안함 장병 여러분, 함장과 함께 승리의 전장으로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박연수 중령의 각오와 결의를 말없이 듣고 있는 한 사람.

2010년 3월 26일 희생된 고(故) 이상희 하사의 아버지입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여행을 간다고 집사람이랑 내려가는 중이었어요. 삼천포를 거쳐서 샤랑도를 가려고 했었는데, 삼천포 다다르기 전에 둘째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아빠, 형이 탄 배가 이름이 천안함이 맞아요?’ 그러더라고요. ‘어, 그래 맞아. 천안함이야. 근데 왜?’ 그러니까 ‘아빠 지금 천안함이 침몰하고 있대’ 그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죠. ‘아니 멀쩡하던 배가 왜 침몰이 돼? 왜 침몰이 돼?’

믿기지 않았던 소식.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래서 삼천포에서 바로 차를 돌려서 평택으로 올라오는데, 삼천포에서 평택까지 올라오는 그 길이 왜 그렇게 길고 먼 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삼천포에서 평택까지 오면서 부처님부터, 예수님부터… 신이란 신은 다 찾은 것 같았어요. 제발 내 애가 살아있게만 좀 해달라고.

당시 소식을 들었던 또 한 사람.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배가 뭐 초계함이라고 나오더라고. 천안함이 아니고 초계함 어쩌고 이래. 나는 아무 생각도 없지 그런 거는.

처음에 부산에 있을 때 사고가 났다고 해도 그 배인줄 모르고 TV에 나온 자막 보니까 '문규석'이 있는 거야 아닌 줄 알았는데 아우…. 뭐 아무 생각도 없지.

'진짜인가?' 이런 생각만 들더라고요. 그래서 와보니까 뭐 그런데….

평택 2함대로 한걸음에 달려온 유가족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어떻게 올라온 지도 모르겠어요. 평택 도착하니까 새벽이더라고요. 새벽인데….

살아만 돌아와 달라는 간절한 바람.

하지만 아들 이름은 실종자 46명의 명단에 있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쭉 뜨더라고요. 생존 장병, 실종자….

실종자에 저희 애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거예요. 와. 진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 엄마하고 거기 바닥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어요. 다리에 힘이 풀려 갖고. 참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지옥이었죠. 지옥 같은 생활이었죠. 거기 애들 사고 나서 수습하고 뭐 하고 한 달 정도 평택 거기에 있으면서 그 한 달이 완전히 생지옥이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실종자 명단에 이름이 있어도 시신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귀한 자식이 하나둘 주검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에도 실종자 수색은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한 명의 목숨이라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시간들.

하지만 하늘은 이런 절박함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구조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UDT 대원의 죽음.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희생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유가족들은 간절했던 바람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46명 가족당 한 명 엄마든 아빠든 대표 한 명씩 해서 회의를 했어요. 저희가 회의를 해서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고 인양하는 쪽으로 가자. 어차피 그 당시에는 며칠 지났으니까 어차피 우리가 인정할 건 인정을 하자. ‘애들은 죽었다.’ ‘시신이라도 건지자.’

수색이 중단되고, 인양 작업이 본격화됐습니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선미 쪽을 인양하는 거로 결정을 내렸죠. 그래도 저희는 그것도 몰랐어요. 저희가 뭐 바다를 압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성우/ 故 이상희 하사 부친
물때가 안 맞아서, 시야가 확보가 안 돼서 못 하느니 …. 가슴은 조마조마하고.

자식들이 잠들어있을 천안함이 하루라도 빨리 인양되길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마침내 차가운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던 천안함이 침몰 20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애들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요.

하나둘 발견되는 아들들의 주검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진짜 피가 마르더라고요. 저희가 스물세 번째인가, 스물네 번째에 나왔는데, 누구 애는 나오는데 우리 애는 기약도 없이 스물 몇 번째인데…그거를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너무 힘든 거였어요, 그때.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면서도 오히려 안도해야 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가족들에게 시신을 건져 올리면 연락이 오고 헬기로 애들 시신을 평택으로 보내고 했었는데, 누구 시신 건졌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박수 쳐주고 축하해줬어요. 부모들끼리 죽은 자식 시신 구했다고 박수 치고 가서 축하해줬어요. 그런 상황이었어요. 왜? 서로 자식들 시신도 못 건질까 봐.

이렇게 40명의 장병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창기 준위 등 6명의 장병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산화자로 분류됐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근데 결과적으로는 6명의 시신을 산화자로 분류됐잖아요. 그러니 그 부모 심정은 오죽하겠어. 난 다른 건 몰라도 그 여섯 분에 대한 그 심정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 왜? 내가 그 간절한 그 심정이었으니까. 시신이라도 건질 수 있게끔 해달라고.

동생이나 다름없었던 소중했던 장병들, 동료를 잃은 전우들, 아버지와 자식을 모두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몇몇 유가족은 끝내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 6명 산화자 중에 동해 사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애 보고 싶으면, 술 한잔 먹으면 동해바다 가서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자식 이름 부르면서 울었다 그러더라고요. 그 건강하던 분이 작년인가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래서 저희가, 가족들이 상처를 진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라면 자식을 나라를 위해서 바친 죄밖에는 없는데, 완전히 국민 절반이 절반 정도는 저희를 바라볼 때 무슨 자식 앞세워 이권을 취득한다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같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지인들이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맞아?’ 라고 물어보면 이제 탁 막히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뭘 어떻게 이해를 시키겠어요?

합동조사단의 공식적인 발표를 부인하는 의혹들이 무차별적으로 제기되면서 유가족들은 말 못할 울분을 삭여야 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게 싫었어요. ‘천안함 폭침 북한 소행 맞아?’ 라고 얘기를 물어보는 그게 싫었기 때문에 내가, 내 새끼가 천안함이랑 연관돼서 희생됐다는 얘기를 안 했었어요. 이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 부모들은 다 똑같은 심정일 거야. 그걸 어떻게 상세하게 설명을 하느냐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욕보이는 막말과 악성 댓글들이 유가족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결국, 유가족들은 천안함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그래서 특별법을 요구했던 부분은 거기에 넣고 싶은 문구가 딱 있는 거예요. 허위사실 유포하는 죄, 그 죄를 묻고 싶은 겁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게 되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대가, 죗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거를 저희는 얘기하고 싶은 거였어요.

하지만 2020년 발의된 천안함 특별법은 4년간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습니다.

이번 국회 임기인 5월 말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될 예정입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더해 각종 억측과 비아냥까지 견뎌야 했던 힘겨웠던 시간들.

처참한 천안함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평택에 그 두 쪽 난 천안함을 바라볼 때는 참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천안함이 찢어진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 부모들 다 똑같은 심정일 겁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이 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천안함이 부활해서, 취역해서 서해를 누빈다는 생각을 할 때는 진짜 저희 그 찢어지는 가슴이 조금은 치유되는 느낌이죠.

아마 이런 감동은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잘 이해를 못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천안함 부활이 뭐가 그렇게 대수냐’라고 말씀하시는,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저희 부모들 입장에서는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천안함 부활이라는 그 자체는 내 자식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조금의 어떤 보답이라고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신형 천안함 취역식, 지난해 5월 19일>

지난해 5월, 13년 만에 새롭게 태어난 천안함이 본격적인 전투 임무를 부여받은 날.

류지욱 중사는 자신의 손으로 새 천안함의 공식 임무를 상징하는 깃발을 올렸습니다.

류지욱 중사/지난해 5월
새로운 천안함의 취역을 알리는 취역기 게양은 하늘에 있는 46명의 전우와 군과 사회에 있는 58명의 전우들과 함께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년이 지나고, 류지욱 중사는 14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천안함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천안함의 모습도, 동료들도 바뀌었지만, 천안함이란 세 글자는 가슴 속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류지욱 중사/천안함 통신 부사관(참전 장병)
'함명을 천안함으로 한다.' 그때부터 천안함을 꼭 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가졌고, 새로운 천안함에 꼭 타고 싶다고 제가 직접 지원을 했습니다.

14년 전, 작전 수행 중 동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천안함에 다시 승선하겠다는 결정을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류지욱 중사/천안함 통신 부사관(참전 장병)
천안함을 새로 탄다고 했을 당시에 제 아내가 가장 많이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자녀들은 제가 천안함 생존자라는 거를 아직은 잘 모르고 있는데, 이제는 자녀들한테도 아빠가 어떤 일을 했었고, 어떤 임무를 하다가 어떤 사건을 당했다. 그리고 그거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천안함을 탄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헌신, 남은 가족들의 희생과 아픔에 걸맞은 예우까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장병들에게 돌아왔던 냉소와 비아냥, 억울하게 희생된 동료 장병들에게 쏟아졌던 거친 언사들은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천안함에 다시 타야겠다는 결심은 여기에서 비롯됐습니다.

류지욱 중사/천안함 통신 부사관(참전 장병)
천안함을 다시 제가 타는 이유 중 하나가 지금 사람들 시선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하고, 생존자들에 대한 아픔을 모르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저는 일단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저의 명예를 위해서 천안함을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형 천안함 장교회의, 1월 23일>

함장으로 부임한 이후 열린 첫 장교회의.

먼저, 부하 직원을 보내는 전출 신고를 받습니다.

부하 장교들과 마주 앉은 첫 자리.

천안함이라서 각오가 더 남다릅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그래요. 함장 취임하고 지금 첫 사관회의를 하는데 어제 1차적으로 행사 잘 준비해줘서 너무 고맙고, 함장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천안함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 부탁하고.

오늘 제박훈련 갈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서 잘 준비해서 숙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합시다. 이상.

수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사고 직후에는 전역까지도 결심했었고 심적으로는 부담이 많이 됐지만 결국 해군 생활을 계속 하고 있으면 저는 함정 병과 장교로서 어느 배에서든 함장을 하게 될텐데, 천안함이 아닌 다른 함정에서 함장을 하게 된다면 평생 좀 후회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은 장병들의 희생을 딛고 부활한 천안함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습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저희가 이제 함형을 좀 구분을 해서 부르는데 PCC라는 한 1,000톤급 되는 과거의 천안함이 있었고, 폭침 이후에 그 천안함은 지금 2함대에 전시 시설로 관리가 되고 있고요.

지금 현재 제가 타고 있는 신형 천안함은 과거에 비해서 더 커진, 더 신형 무장을 탑재한 신형 전투함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이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었던 천안함과의 인연.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사실 천안함 참전 장병이라는 타이틀이 항상 제 앞에 붙어 있고, 그거는 먼저 전사한 천안함 46 용사에 대한 몫까지 계속 다 하라는 어떤 의미로 생각됐습니다. 그 책임감을 좀 잃고 싶지 않았고. 그게 제가 지금 천안함장으로 보직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원천적인 힘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냥 아무 영문도 없이 그냥 한 거예요. 우리 아들 그 한 마디에.

아들 문규석 원사가 천안함을 타고 출항하던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부대 앞에서 식당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건넸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오면 같이 얘기해보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여 년 전 이곳으로 이사 와 아들이 떠났던 그 부대 앞에 식당을 열었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날 부산에서 보따리 다 싸서 온다고 해서 왔는데 시작하고 나니까 이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갔어. 뭐 그때도 아마 이때 됐을 거야. 이 눈이 왔네. 너무 아는 사람도 없지. 그러고서 시작이라고 그냥 해봤어요.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유의자/장병들 식사 메인
많이 먹어라. 군인들은 특별히 두 개씩이다. 많이 먹어.

생전에 아들이 가장 좋아했던 계란 프라이.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유난히 그렇게 계란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군인들은 오면은 2개씩 해주고, 또 젊은 사람이 오면 2개씩 해주고….

그렇게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저녁에 일 마치고 아들이 생각나면 술 한잔 먹고 2함대 앞에 가서 내내 울고. 보고 싶어서. 그래서 12시 넘어서 가게 와가지고 아침밥 준비하고 그냥 그랬어요. 보고 싶으니까. 저녁에 술 한잔 먹고 가서 앞에서 울었어.

하루하루 힘겨웠던 시간들.

그러다 천안함이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좋더라고요. 어저께 다 들어가 봤는데 할미라서 몰라도 내 눈으로 보기에는 좋대. 잘 해주시겠지 뭐 함장님이 이끌어서.

아들이 출항했던 부두 앞에서 10년 넘게 천안함 장병들의 명예 회복을 기다려왔던 어머니.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그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약속 때문에. 안 했으면 아예 괜찮았을 건데 그 약속 해준다고 한 게 이렇게 된 거예요. 살아있을 때 지가 오면 가게 자리도 보러 다니자고 그랬는데… 그만 둬야지 뭐….

2010년 3월 26일, 당시 류지욱 하사는 통신 하사로, 박연수 대위는 작전관으로 천안함에서 근무했습니다.

이제 박연수 대위는 중령으로 진급해 새 천안함의 함장으로, 류지욱 하사는 통신 중사로, 다시 새 천안함에 몸을 실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긴박했던 순간, 46명의 부하와 동료를 떠나보냈던 두 사람.

당시 돌아오지 못한 전우와 유족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임무, 조국을 지키다 희생된 영령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들을 잊지 말아 달라는 염원이 더 새롭고 강력해진 천안함에 새겨져 있습니다.

유의자/故 문규석 원사 모친
더 필요한 게 뭐 있어. 천안함은 이렇게 됐으니까 잊지 말고 항상 기억을 좀 해줬으면 그거 바라는 거뿐이 더 있어요?

이성우/故 이상희 하사 부친
안보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안보라는 게 어느 희생 없이 되는 겁니까?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진보든 보수든 간에 거기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1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천안함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딛고 부활한 천안함이 이제 다시 서해로 향합니다.

박연수 중령/제2대 천안함장
해군은 바다의 방패라고 합니다. 싸우면 박살 낼 수 있도록 정말 2함대 최전선에서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천안함 46용사의 몫까지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우리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취재: 강나루
촬영: 조선기 설태훈 최승구 강우용
편집: 강정희 이기승
그래픽: 장수현
리서처: 김경찬 김보현
조연출: 유화영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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