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판잣집 ‘탈출’…외국인노동자의 편지

입력 2024.03.25 (14:3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요약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을 찾은 외국인 근로자가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스리랑카 출신 N씨입니다. 그러나 N씨가 한국에서 마주한 현실은 끔찍했습니다.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하는 그의 '기숙사'는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 있었고, 도움을 구하러 찾아간 관할 노동지청은 오히려 업주의 편을 들었습니다. 본국으로 쫓겨날 위기에 놓였던 N씨는 한국에 정착한 스리랑카 공동체 대표의 도움을 받아 국민권익위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A4 6장 분량의 편지에는 일터에서 당한 부당한 대우와 노동지청의 더 부당한 업무 처리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화장실도 없는 바다 위 판잣집이 숙소

N씨가 전남 여수의 한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을 시작한 건 2022년 11월입니다. 양식장의 물고기에게 사료를 주고 그물을 관리하는 게 N씨가 맡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끝난 뒤에도 N씨는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 머물렀습니다. 업주가 고용허가를 받고 근로계약을 맺을 때 제시했던 정상적인 숙소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N씨는 편지에서 "약속한대로 기숙사에서 생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이 작업장에 있는 나무판자 집에서 줄곧 생활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나무판자 집'은 제대로 된 주방과 화장실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바닥에 바다로 뚫린 구멍이 화장실이었습니다.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아 한겨울에도 찬물로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늘 흔들려서 정상적인 수면은 물론 생활조차 어려웠습니다."(N씨의 편지 중)



■두려움에 전화 걸었지만…육지에서는 집안일 동원

N씨는 편지에서 "무서워서 사장님께 전화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 사장님과 사모님이 엄청나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셨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어쩌다 육지로 나오는 날은 업주의 집 집안일에 동원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잔디를 깎고, 나무를 자르는 일이었습니다. 육지 역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서 사장님에게 저는 이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N씨의 편지 중) 

■바지선 '탈출'…'사업장 무단 이탈' 신고한 업주

N씨는 결국 양식장 '나무판자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한국어가 서툰 그는 스리랑카 공동체 대표의 도움을 받아 여수고용노동지청을 찾아 '사업장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업주는 오히려 N씨를 신고했습니다. 근로계약 때 약속한 사업장인 자신의 양식장을 무단 이탈했다는 겁니다. 업주는 N씨가 양식장 기계를 고장 내놓고 뒤늦게 숙소를 문제 삼아 사업장을 옮기려 한다고 여수고용노동지청에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장님은 숙소에서 제가 와이파이(기계)를 갖고 도망갔다고 하기도 했습니다…고용센터(여수고용노동지청)에 방문하고 전화했지만 '(사장님이 허락하지 않아) 사업장 변경을 해줄 수 없다'는 말만 계속했습니다."(N씨의 편지 중)



■현장조사 안 하고…'사업장 이탈' 결론

N씨와 업주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는 가운데 여수고용노동지청은 '외국인 근로자 권익보호협의회'를 열었습니다. N씨와 업주가 모두 참석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장님은 저에게 큰소리로 욕을 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미리 준비해간 증거물(바다 위 숙소, 근로계약서와 다른 작업)을 봐달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N씨의 편지 중)

협의회의 결론은 '사업장 무단 이탈'. 양식장 업무 특성상 육지 숙소와 바지선 쉼터를 함께 쓰고 있다'는 업주의 말만 그대로 믿은 겁니다. 여수고용노동지청은 단 한 번의 현장조사 없이 협의회를 열었습니다.

여수고용노동지청의 부실 조사와 이를 토대로 열린 엉터리  '외국인 근로자 권익보호협의회'의 결론으로 N씨는 스리랑카로 쫓겨날 처지에 놓였습니다. 업주는 고용허가와 근로계약 때는 육지의 정상적인 숙소를 사진으로 제출하고, 실제로는 바지선에서 N씨를 머물게 했지만, 피해자가 오히려 책임을 지게 된 겁니다.

"부당한 입장을 전하고 문제해결을 요구했는데 오히려 제가 무단으로 사업장을 이탈했다고 결정했습니다.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에서 근로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불투명하게 되는 억울한 입장이 됐습니다."(N씨의 편지 중)



■뒤늦게 입장 바꾼 여수고용노동지청

여수고용노동지청은 국민권익위의 실태조사가 시작되자 뒤늦게 입장을 바꿨습니다. N씨의 책임이 아닌 사업장 변경으로 판단하고, N씨가 원하는 지역으로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양식장 업주의 동티모르 노동자 고용허가는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여수고용노동지청의 업무 처리 과정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A씨가 권익위에 보냈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외국인 근로자가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일하며 경제발전에 기여하도록 꼭 세심하게 다시 살펴주시고, 저의 어려운 입장이 꼭 반영되어 안정적으로 일 할 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바다 위 판잣집 ‘탈출’…외국인노동자의 편지
    • 입력 2024-03-25 14:35:50
    심층K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을 찾은 외국인 근로자가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스리랑카 출신 N씨입니다. 그러나 N씨가 한국에서 마주한 현실은 끔찍했습니다.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하는 그의 '기숙사'는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 있었고, 도움을 구하러 찾아간 관할 노동지청은 오히려 업주의 편을 들었습니다. 본국으로 쫓겨날 위기에 놓였던 N씨는 한국에 정착한 스리랑카 공동체 대표의 도움을 받아 국민권익위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A4 6장 분량의 편지에는 일터에서 당한 부당한 대우와 노동지청의 더 부당한 업무 처리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화장실도 없는 바다 위 판잣집이 숙소

N씨가 전남 여수의 한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을 시작한 건 2022년 11월입니다. 양식장의 물고기에게 사료를 주고 그물을 관리하는 게 N씨가 맡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끝난 뒤에도 N씨는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 머물렀습니다. 업주가 고용허가를 받고 근로계약을 맺을 때 제시했던 정상적인 숙소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N씨는 편지에서 "약속한대로 기숙사에서 생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이 작업장에 있는 나무판자 집에서 줄곧 생활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나무판자 집'은 제대로 된 주방과 화장실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바닥에 바다로 뚫린 구멍이 화장실이었습니다.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아 한겨울에도 찬물로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늘 흔들려서 정상적인 수면은 물론 생활조차 어려웠습니다."(N씨의 편지 중)



■두려움에 전화 걸었지만…육지에서는 집안일 동원

N씨는 편지에서 "무서워서 사장님께 전화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 사장님과 사모님이 엄청나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셨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어쩌다 육지로 나오는 날은 업주의 집 집안일에 동원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잔디를 깎고, 나무를 자르는 일이었습니다. 육지 역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서 사장님에게 저는 이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N씨의 편지 중) 

■바지선 '탈출'…'사업장 무단 이탈' 신고한 업주

N씨는 결국 양식장 '나무판자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한국어가 서툰 그는 스리랑카 공동체 대표의 도움을 받아 여수고용노동지청을 찾아 '사업장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업주는 오히려 N씨를 신고했습니다. 근로계약 때 약속한 사업장인 자신의 양식장을 무단 이탈했다는 겁니다. 업주는 N씨가 양식장 기계를 고장 내놓고 뒤늦게 숙소를 문제 삼아 사업장을 옮기려 한다고 여수고용노동지청에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장님은 숙소에서 제가 와이파이(기계)를 갖고 도망갔다고 하기도 했습니다…고용센터(여수고용노동지청)에 방문하고 전화했지만 '(사장님이 허락하지 않아) 사업장 변경을 해줄 수 없다'는 말만 계속했습니다."(N씨의 편지 중)



■현장조사 안 하고…'사업장 이탈' 결론

N씨와 업주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는 가운데 여수고용노동지청은 '외국인 근로자 권익보호협의회'를 열었습니다. N씨와 업주가 모두 참석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장님은 저에게 큰소리로 욕을 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미리 준비해간 증거물(바다 위 숙소, 근로계약서와 다른 작업)을 봐달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N씨의 편지 중)

협의회의 결론은 '사업장 무단 이탈'. 양식장 업무 특성상 육지 숙소와 바지선 쉼터를 함께 쓰고 있다'는 업주의 말만 그대로 믿은 겁니다. 여수고용노동지청은 단 한 번의 현장조사 없이 협의회를 열었습니다.

여수고용노동지청의 부실 조사와 이를 토대로 열린 엉터리  '외국인 근로자 권익보호협의회'의 결론으로 N씨는 스리랑카로 쫓겨날 처지에 놓였습니다. 업주는 고용허가와 근로계약 때는 육지의 정상적인 숙소를 사진으로 제출하고, 실제로는 바지선에서 N씨를 머물게 했지만, 피해자가 오히려 책임을 지게 된 겁니다.

"부당한 입장을 전하고 문제해결을 요구했는데 오히려 제가 무단으로 사업장을 이탈했다고 결정했습니다.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에서 근로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불투명하게 되는 억울한 입장이 됐습니다."(N씨의 편지 중)



■뒤늦게 입장 바꾼 여수고용노동지청

여수고용노동지청은 국민권익위의 실태조사가 시작되자 뒤늦게 입장을 바꿨습니다. N씨의 책임이 아닌 사업장 변경으로 판단하고, N씨가 원하는 지역으로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양식장 업주의 동티모르 노동자 고용허가는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여수고용노동지청의 업무 처리 과정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A씨가 권익위에 보냈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외국인 근로자가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일하며 경제발전에 기여하도록 꼭 세심하게 다시 살펴주시고, 저의 어려운 입장이 꼭 반영되어 안정적으로 일 할 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