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 5·18] 짜장면과 5·18, 영화 ‘1980’ 강승용 감독

입력 2024.03.27 (11:27) 수정 2024.04.2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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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강승용
-1965년생
-영화 미술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
-영화 감독('1980' 연출)

인터뷰 중인 영화 ‘1980’ 연출 강승용 감독인터뷰 중인 영화 ‘1980’ 연출 강승용 감독

카메라 앞에 선 강승용 감독은 쑥스러워 했습니다. 평생을 카메라 뒤편에서 작업하다가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낯설다는 거였습니다. 강승용 감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 미술감독입니다. 1995년 영화 '테러리스트'로 데뷔해서 30년 가까이 미술감독으로 살았습니다. '안시성', '사도', '왕의 남자' 등 영화 40여 편이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그런 그가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첫 작품은 5·18 을 소재로 다룬 영화 '1980'입니다. 지난 3월 20일 용산CGV에서 열린 시사회에 앞서 강승용 감독을 인터뷰했습니다. 영상채록 5·18 인터뷰이 가운데 첫 영화감독입니다.

■40년 영화 미술감독, 영화감독으로 전업 첫 영화 ' 5·18'

그의 나이와 고향부터 궁금했습니다. 5·18을 언제, 어떻게 겪었느냐는 보통 그 안에 함축됩니다. 1965년, 인천 태생. 하지만 군무원인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전국을 떠돌아 고향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온 구미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구미에서 중학교 1학년 때 5·18을 겪었습니다. 사실, 어린 나이기도 했고 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아 5·18을 모르고 넘어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추모 열기가 제 기억 속에 더 남아있고, 특히 저도 박정희 대통령의 학교 후배라는 것 때문에 단체로 추모하고 그런 시기여서 5·18은 전혀 감지나 인지를 못 하고 있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폭도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그렇구나 알게 됐는데,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본질을 알게 됐죠.

그의 성장 과정을 몇 가지 질문으로 따라가 봤습니다. 그는 부산 동의대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미술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84학번으로 입학해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에는 군 복무를 했습니다. 당시 시위 진압을 위한 '충정 훈련'을 받으면서 '이게 맞나?'라고 생각했고 '5·18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겠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제대 뒤 그는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시대극이나 사극을 하면서 전라도 지역으로 촬영을 다니게 됐고, 그 과정에 만난 분들의 얘기로 5·18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기존에 가졌던 의문들을 추적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1980’ 홍보 포스터영화 ‘1980’ 홍보 포스터

'어떻게 40년 넘게 가슴에 묻고 버티며 살았을까'에 대한 의문으로 만든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 가까이 미술감독으로 살다가 첫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작품의 소재가 왜 5·18인가?

피해자분들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면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40년 넘게 가슴에 담고 묻고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오셨을까' 라는 의문점이 많이 생겼죠. 또 중간중간 왜곡된 이야기들까지 두 번 가슴에 못을 박는 경우들이 많았잖아요. 제가 그 부분을 찾아 들어간 것 같습니다.

5·18 꼬마 상주 조천호 씨 가족과의 만남은 영화를 만드는 추진력이 됐습니다. 영화 속 인물 '철수'는 조천호 씨가 모티브가 됐습니다. 허락을 얻기 위해 조 씨와 조 씨의 어머니를 만나 설득했습니다. 강 감독은 그러면서 영화에 대한 책임감이 더 생겼다고 말합니다. 5·18을 공부하고 모니터링 하면서 피해자들이 굉장한 아픔이 많고 세상에 대한 벽이 있을 거라는 유추로만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는데, 직접 만나보니 너무 평범하고 밝고 쾌활하더랍니다. 그때부터 영화 속 인물들은 '피해자다움', '유족스러움'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제가 촬영을 하면서 배우들이나 출연진들, 스태프들에게 5·18민주항쟁에 대해서 가급적 학습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했어요. 왜냐면 굉장한 고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인물과 공간을 표현할 때 오히려 과잉된 감정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라는 염려가 생기더라고요. 저는 학습을 안 하고 이 시나리오 상황에만 젖어 들어도 감정은 충분히 나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5·18, 일부러 학습하지 않았다. 디테일한 미장센보다 인물 연기 봐달라"

감독이 꽤 받았을 법한 질문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30년 가까이 미술감독으로 살았느니, 섬세한 미장센에 대한 기대가 있지 않나, 실제 공을 많이 들였나?' '5·18을 일부러 학습하지 않았다'는 맥락과 같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80년대 레트로 문화를 베이스에 까는 미술적 장치는 있지만, 그게 시각적으로 눈에 안 띄게끔 하는 게 오히려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 인물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겠다 생각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뺏길 수 있는 부분들은 절제를 많이 했습니다. 미술 감독이기 때문에 비율적으로 아주 좋을 것이다는 기대는 조금 접어두시는 게 좋고, 등장 인물에 대한 내면 연기를 많이 봐주셨으면…


영화는 광주에서 짜장면집을 연 가족들이 5·18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아픔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감독이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의 대표 음식인 짜장면과 민주주의의 상징 사건인 5·18 민주항쟁을 엮어놨습니다. '1980'은 2021년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목포에서 야외 촬영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개봉이 2년 정도 미뤄져 12·12를 다룬 영화 '서울의봄' 이후에 개봉을 하게 됐습니다. 그 사이 제목은 '화평반점 1980'에서 '1980'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울의봄' 이후 개봉, 부담이지만 연결된 얘기로 '쌍끌이' 기대감"

부담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부담감은 있죠. 하지만 이야기로는 맞아떨어지는 게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12·12 군사 반란을 막았다면, 5개월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불행하게 막지 못했고… 이 이야기는 연결성이 있기 때문에 저한테는 큰 배경이 될 수 있죠. '쌍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전 반응은 좋습니다. 홍보 마케팅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은 3천만 원이 목표였는데, 2억 5천여만 원을 모았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만 보면 5·18을 소재로 한 '1980'은 12·12를 다룬 '서울의봄' 속편 느낌입니다. 국민들의 분노 지수를 높여놨던 천 3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울의봄'의 무게감을 제작비 10억 원 미만의 저예산 영화 '1980'이 감당하고, 흥행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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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채록 5·18] 짜장면과 5·18, 영화 ‘1980’ 강승용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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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용<br />-1965년생<br />-영화 미술감독<br />-프로덕션 디자이너<br />-영화 감독('1980' 연출)<br />
인터뷰 중인 영화 ‘1980’ 연출 강승용 감독
카메라 앞에 선 강승용 감독은 쑥스러워 했습니다. 평생을 카메라 뒤편에서 작업하다가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낯설다는 거였습니다. 강승용 감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 미술감독입니다. 1995년 영화 '테러리스트'로 데뷔해서 30년 가까이 미술감독으로 살았습니다. '안시성', '사도', '왕의 남자' 등 영화 40여 편이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그런 그가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첫 작품은 5·18 을 소재로 다룬 영화 '1980'입니다. 지난 3월 20일 용산CGV에서 열린 시사회에 앞서 강승용 감독을 인터뷰했습니다. 영상채록 5·18 인터뷰이 가운데 첫 영화감독입니다.

■40년 영화 미술감독, 영화감독으로 전업 첫 영화 ' 5·18'

그의 나이와 고향부터 궁금했습니다. 5·18을 언제, 어떻게 겪었느냐는 보통 그 안에 함축됩니다. 1965년, 인천 태생. 하지만 군무원인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전국을 떠돌아 고향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온 구미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구미에서 중학교 1학년 때 5·18을 겪었습니다. 사실, 어린 나이기도 했고 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아 5·18을 모르고 넘어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추모 열기가 제 기억 속에 더 남아있고, 특히 저도 박정희 대통령의 학교 후배라는 것 때문에 단체로 추모하고 그런 시기여서 5·18은 전혀 감지나 인지를 못 하고 있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폭도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그렇구나 알게 됐는데,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본질을 알게 됐죠.

그의 성장 과정을 몇 가지 질문으로 따라가 봤습니다. 그는 부산 동의대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미술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84학번으로 입학해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에는 군 복무를 했습니다. 당시 시위 진압을 위한 '충정 훈련'을 받으면서 '이게 맞나?'라고 생각했고 '5·18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겠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제대 뒤 그는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시대극이나 사극을 하면서 전라도 지역으로 촬영을 다니게 됐고, 그 과정에 만난 분들의 얘기로 5·18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기존에 가졌던 의문들을 추적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1980’ 홍보 포스터
'어떻게 40년 넘게 가슴에 묻고 버티며 살았을까'에 대한 의문으로 만든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 가까이 미술감독으로 살다가 첫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작품의 소재가 왜 5·18인가?

피해자분들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면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40년 넘게 가슴에 담고 묻고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오셨을까' 라는 의문점이 많이 생겼죠. 또 중간중간 왜곡된 이야기들까지 두 번 가슴에 못을 박는 경우들이 많았잖아요. 제가 그 부분을 찾아 들어간 것 같습니다.

5·18 꼬마 상주 조천호 씨 가족과의 만남은 영화를 만드는 추진력이 됐습니다. 영화 속 인물 '철수'는 조천호 씨가 모티브가 됐습니다. 허락을 얻기 위해 조 씨와 조 씨의 어머니를 만나 설득했습니다. 강 감독은 그러면서 영화에 대한 책임감이 더 생겼다고 말합니다. 5·18을 공부하고 모니터링 하면서 피해자들이 굉장한 아픔이 많고 세상에 대한 벽이 있을 거라는 유추로만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는데, 직접 만나보니 너무 평범하고 밝고 쾌활하더랍니다. 그때부터 영화 속 인물들은 '피해자다움', '유족스러움'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제가 촬영을 하면서 배우들이나 출연진들, 스태프들에게 5·18민주항쟁에 대해서 가급적 학습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했어요. 왜냐면 굉장한 고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인물과 공간을 표현할 때 오히려 과잉된 감정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라는 염려가 생기더라고요. 저는 학습을 안 하고 이 시나리오 상황에만 젖어 들어도 감정은 충분히 나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5·18, 일부러 학습하지 않았다. 디테일한 미장센보다 인물 연기 봐달라"

감독이 꽤 받았을 법한 질문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30년 가까이 미술감독으로 살았느니, 섬세한 미장센에 대한 기대가 있지 않나, 실제 공을 많이 들였나?' '5·18을 일부러 학습하지 않았다'는 맥락과 같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80년대 레트로 문화를 베이스에 까는 미술적 장치는 있지만, 그게 시각적으로 눈에 안 띄게끔 하는 게 오히려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 인물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겠다 생각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뺏길 수 있는 부분들은 절제를 많이 했습니다. 미술 감독이기 때문에 비율적으로 아주 좋을 것이다는 기대는 조금 접어두시는 게 좋고, 등장 인물에 대한 내면 연기를 많이 봐주셨으면…


영화는 광주에서 짜장면집을 연 가족들이 5·18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아픔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감독이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의 대표 음식인 짜장면과 민주주의의 상징 사건인 5·18 민주항쟁을 엮어놨습니다. '1980'은 2021년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목포에서 야외 촬영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개봉이 2년 정도 미뤄져 12·12를 다룬 영화 '서울의봄' 이후에 개봉을 하게 됐습니다. 그 사이 제목은 '화평반점 1980'에서 '1980'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울의봄' 이후 개봉, 부담이지만 연결된 얘기로 '쌍끌이' 기대감"

부담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부담감은 있죠. 하지만 이야기로는 맞아떨어지는 게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12·12 군사 반란을 막았다면, 5개월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불행하게 막지 못했고… 이 이야기는 연결성이 있기 때문에 저한테는 큰 배경이 될 수 있죠. '쌍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전 반응은 좋습니다. 홍보 마케팅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은 3천만 원이 목표였는데, 2억 5천여만 원을 모았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만 보면 5·18을 소재로 한 '1980'은 12·12를 다룬 '서울의봄' 속편 느낌입니다. 국민들의 분노 지수를 높여놨던 천 3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울의봄'의 무게감을 제작비 10억 원 미만의 저예산 영화 '1980'이 감당하고, 흥행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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