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외교문서 37만쪽 비밀해제…1차 북핵위기 ‘막전막후’ 담겨

입력 2024.03.29 (09:25) 수정 2024.03.2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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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북핵 위기 전후 북미 협상 기록이 담긴 1993년 외교문서가 공개됐습니다.

외교부는 오늘(29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2천306권, 37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정부는 국민 알권리 보장과 외교 행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생산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해마다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1993년 3월 북한의 핵비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촉발된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 로버트 갈루치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이 뉴욕과 제네바에서 1·2단계 고위급 회담 기록이 담겼습니다.

미국은 당초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하는 건 “당분간 고려하지 않을 것”(1993년 3월 26일 한미 외무장관회담)이라는 입장이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중국이 권유해온 대북 고위급 접촉을 수용하는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난항을 이어가던 협상은 6월 7일 북한의 요청으로 케네스 퀴노네스 당시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과 리용호 북한 외교부 국제기구국 부국장(후일 외무상·외교문서에는 ‘이영호’로 표기) 실무접촉을 하면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실무접촉에서 북측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지원, 내정불간섭, 자위 경우를 제외한 무력불행사,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의 4개 항이 포함된 북미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NPT 탈퇴 선언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나흘 뒤 북한의 NPT 탈퇴 유보와 미국의 무력 불행사 등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됐습니다.

한 달여 뒤인 1993년 7월 14∼19일 제네바에서 열린 2차 고위급 접촉에서 북한은 “현재 가동 중인 모든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협조한다면 모든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의를 내놓았습니다.

북한은 경수로 제안이 ‘김일성의 구상’이라며 “현재 운용 중인 원자로, 건설 중인 원자로 및 핵무기 관련시설(재처리시설)을 모두 폐기할 용의”를 표했다고 갈루치 차관보는 합의 타결 후 주제네바 한국대사에게 설명했습니다.

갈루치 차관보는 이후 한승주 외무장관과 통화하면서 “작지만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경수로 문제는 미국이나 한국 정부에 하나의 중요한 돌파구(significant opening)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경수로 문제에 대해 “야구 시합으로 비유한다면, 초구로 들어온 커브볼처럼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북측의 제안은 핵 비확산을 향한 진척(development)으로 볼 수 있으므로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본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현지에 체류하던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은 북한 측이 경수로 방식 전환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지연전술 책동이 아닌지” 우려를 표하기도 한 사실도 외교문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추가로 이어진 2차 북미 실무접촉과 IAEA 사찰 등 핵 문제엔 진전이 없는 가운데, 1993년 10월 개리 애커먼 미국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의 방북이 또 다른 분기점이 됐습니다.

북한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후일 6자회담 수석대표)는 당시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한 퀴노네스 담당관에게 ‘손으로 정리한’ 북측의 ‘일괄타결 방안’을 건넸습니다.

북한의 ▲ NPT 영구 잔류 ▲ 특별사찰 포함 IAEA와의 완전한 협력 등과 미국의 ▲ 핵무기 등 무력 불사용 법적 보장을 포함한 평화협정 체결 ▲ 외교관계 완전 정상화 ▲ 남북한 균형정책 약속 등을 맞바꾸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퀴노네스 담당관의 방북 관련 설명을 들은 한국 측은 평화협정, 균형정책 등 북한 측 요구의 ‘위험성’을 상세히 지적했습니다

이후 한미의 대북 대응 조율 과정은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94년 미국과 북한은 핵 동결 등을 대가로 경수로 발전소 건설과 중유를 제공하는 제네바합의에 도달하지만, 이마저도 2003년 북한이 NPT에서 최종 탈퇴하며 파기됩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와 빌 클린턴 미 행정부가 대북 협상 방안을 조율하면서 북미대화와 남북대화를 어떤 순서로 추진하고 서로 추동시킬 것인가를 치열하게 논의한 과정도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포함돼 있습니다.

북미 핵 협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와 관련된 1950년대 외교문서의 공개 여부를 두고 당시 정부가 고심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1983년 당시 소련의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가 한소 수교 이후인 1992~1993년 진행된 기록도 담겼습니다.

1992년 9월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방한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KAL기 블랙박스 내용을 포함한 사건 관계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블랙박스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한국 정부는 블랙박스 원본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옐친이 이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넘기겠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 1993년 개최된 대전세계박람회(대전엑스포) 조직위가 북한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단계별 계획’을 짰던 내용 등이 공개됐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외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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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9 09:25:23
    • 수정2024-03-29 09:29:02
    정치
제1차 북핵 위기 전후 북미 협상 기록이 담긴 1993년 외교문서가 공개됐습니다.

외교부는 오늘(29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2천306권, 37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정부는 국민 알권리 보장과 외교 행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생산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해마다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1993년 3월 북한의 핵비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촉발된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 로버트 갈루치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이 뉴욕과 제네바에서 1·2단계 고위급 회담 기록이 담겼습니다.

미국은 당초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하는 건 “당분간 고려하지 않을 것”(1993년 3월 26일 한미 외무장관회담)이라는 입장이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중국이 권유해온 대북 고위급 접촉을 수용하는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난항을 이어가던 협상은 6월 7일 북한의 요청으로 케네스 퀴노네스 당시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과 리용호 북한 외교부 국제기구국 부국장(후일 외무상·외교문서에는 ‘이영호’로 표기) 실무접촉을 하면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실무접촉에서 북측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지원, 내정불간섭, 자위 경우를 제외한 무력불행사,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의 4개 항이 포함된 북미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NPT 탈퇴 선언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나흘 뒤 북한의 NPT 탈퇴 유보와 미국의 무력 불행사 등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됐습니다.

한 달여 뒤인 1993년 7월 14∼19일 제네바에서 열린 2차 고위급 접촉에서 북한은 “현재 가동 중인 모든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협조한다면 모든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의를 내놓았습니다.

북한은 경수로 제안이 ‘김일성의 구상’이라며 “현재 운용 중인 원자로, 건설 중인 원자로 및 핵무기 관련시설(재처리시설)을 모두 폐기할 용의”를 표했다고 갈루치 차관보는 합의 타결 후 주제네바 한국대사에게 설명했습니다.

갈루치 차관보는 이후 한승주 외무장관과 통화하면서 “작지만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경수로 문제는 미국이나 한국 정부에 하나의 중요한 돌파구(significant opening)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경수로 문제에 대해 “야구 시합으로 비유한다면, 초구로 들어온 커브볼처럼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북측의 제안은 핵 비확산을 향한 진척(development)으로 볼 수 있으므로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본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현지에 체류하던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은 북한 측이 경수로 방식 전환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지연전술 책동이 아닌지” 우려를 표하기도 한 사실도 외교문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추가로 이어진 2차 북미 실무접촉과 IAEA 사찰 등 핵 문제엔 진전이 없는 가운데, 1993년 10월 개리 애커먼 미국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의 방북이 또 다른 분기점이 됐습니다.

북한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후일 6자회담 수석대표)는 당시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한 퀴노네스 담당관에게 ‘손으로 정리한’ 북측의 ‘일괄타결 방안’을 건넸습니다.

북한의 ▲ NPT 영구 잔류 ▲ 특별사찰 포함 IAEA와의 완전한 협력 등과 미국의 ▲ 핵무기 등 무력 불사용 법적 보장을 포함한 평화협정 체결 ▲ 외교관계 완전 정상화 ▲ 남북한 균형정책 약속 등을 맞바꾸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퀴노네스 담당관의 방북 관련 설명을 들은 한국 측은 평화협정, 균형정책 등 북한 측 요구의 ‘위험성’을 상세히 지적했습니다

이후 한미의 대북 대응 조율 과정은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94년 미국과 북한은 핵 동결 등을 대가로 경수로 발전소 건설과 중유를 제공하는 제네바합의에 도달하지만, 이마저도 2003년 북한이 NPT에서 최종 탈퇴하며 파기됩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와 빌 클린턴 미 행정부가 대북 협상 방안을 조율하면서 북미대화와 남북대화를 어떤 순서로 추진하고 서로 추동시킬 것인가를 치열하게 논의한 과정도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포함돼 있습니다.

북미 핵 협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와 관련된 1950년대 외교문서의 공개 여부를 두고 당시 정부가 고심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1983년 당시 소련의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가 한소 수교 이후인 1992~1993년 진행된 기록도 담겼습니다.

1992년 9월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방한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KAL기 블랙박스 내용을 포함한 사건 관계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블랙박스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한국 정부는 블랙박스 원본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옐친이 이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넘기겠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 1993년 개최된 대전세계박람회(대전엑스포) 조직위가 북한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단계별 계획’을 짰던 내용 등이 공개됐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외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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