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영혼이라도 위로했으면”…오상호 할아버지의 기억

입력 2024.05.09 (20:14) 수정 2024.05.09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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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증언으로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오상호 할아버지는 70여 년 전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끌려가 희생되며 가족이 모진 고통의 시간 속에 살아왔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오상호/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는) 순수한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들었습니다. 집에 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아버지를) 납치해 갔는데, 납치해 가니까 내일일까 모레일까 기다린 것이 몇 년이 흘러도 소식이 없으니까 어머니는 이제 죽은 줄 알고, 죽은 날짜를 모르니까 아버지 생일날 음력 7월 3일 날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형무소에서)엽서가 왔다 하니까 희망을 가지고 엽서 내용을 봐도, 희망을 가질만한 글자가 없어서. 15년 전 소식을 들어서 대전에 있는 형무소 생활하다가 대전 골령골 학살터, 집단 학살시켰다는 말을 듣고 현장을 가서 확인하고 했습니다만. 대형 구덩이를 한 몇십 미터, 그러니까 그냥 트럭으로 사람 실어다가 파리 목숨처럼 막 쏟아붓고 그 위에다 덮어 씌웠다 하는 데 대해서는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도 이루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하늘이 캄캄했습니다."]

[오상호/4·3 희생자 유족 : "셋아버지도 밭을 판 돈이 궤 속에 있다는 첩보를 수집해서, 그 돈을 노려서 우리 셋아버지를 납치해서 결국 사살시켰고, 뿐만 아니라 우리 작은 어머니도 두 살 된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총살당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 보니까 어머니 혼자서 농사일하는데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우리 형님은 워낙 공부를 잘해서 제주시에 있는 오현고등학교를 (입학했죠.) 우등생으로 나와서 공무원 시험도 보고 했는데. 합격자 발표를 일단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키, 신장이 1cm 모자라다는 이유를 붙여가 지고 불합격시켜버리니까. 우리 형님은 그 어려운데 밥을, 끼니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 시험 합격했는데 이렇게 되는구나 원통스럽고 해서 결국에는 화병이 들어서 1969년 7월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연좌제 때문이죠. 키가 1cm 모자라다는 이유로 공무원 생활을 못 한다 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갑니다."]

[오상호/4·3 희생자 유족 : "가정 형편이 어렵다보니까 고등학교 학비를 댈 형편이 못 돼서, 서귀포에 작은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사진관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워가지고 나중에 (직접)사진관, 예식장 하면서 우리 1남 3녀를 대학을 시켰습니다. 2022년도 10월에 제주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할 때 제가 참석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아들까지도 연좌제에 묶어서 숨을 못 쉬게 하는 그런 죄가 다, 74년 만에 풀려가지고 이제라도 무죄판결 난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목 놓아 울었죠. 아버지는 형무소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형사보상금에 해당돼서. 2023년 4월에 형사보상금 신청을 했는데 한 6개월이면 나온다는 것이 지금 1년이 훨씬 지나도 언제 나온다는 말도 없고. 내가 죽기 전에 보상금으로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영령들을 모시고, 절에라도 가서 모셔서 천도제라도 좀 한번 풀어드리고 싶은 심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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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증언] “영혼이라도 위로했으면”…오상호 할아버지의 기억
    • 입력 2024-05-09 20:14:16
    • 수정2024-05-09 20:46:53
    뉴스7(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증언으로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오상호 할아버지는 70여 년 전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끌려가 희생되며 가족이 모진 고통의 시간 속에 살아왔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오상호/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는) 순수한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들었습니다. 집에 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아버지를) 납치해 갔는데, 납치해 가니까 내일일까 모레일까 기다린 것이 몇 년이 흘러도 소식이 없으니까 어머니는 이제 죽은 줄 알고, 죽은 날짜를 모르니까 아버지 생일날 음력 7월 3일 날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형무소에서)엽서가 왔다 하니까 희망을 가지고 엽서 내용을 봐도, 희망을 가질만한 글자가 없어서. 15년 전 소식을 들어서 대전에 있는 형무소 생활하다가 대전 골령골 학살터, 집단 학살시켰다는 말을 듣고 현장을 가서 확인하고 했습니다만. 대형 구덩이를 한 몇십 미터, 그러니까 그냥 트럭으로 사람 실어다가 파리 목숨처럼 막 쏟아붓고 그 위에다 덮어 씌웠다 하는 데 대해서는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도 이루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하늘이 캄캄했습니다."]

[오상호/4·3 희생자 유족 : "셋아버지도 밭을 판 돈이 궤 속에 있다는 첩보를 수집해서, 그 돈을 노려서 우리 셋아버지를 납치해서 결국 사살시켰고, 뿐만 아니라 우리 작은 어머니도 두 살 된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총살당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 보니까 어머니 혼자서 농사일하는데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우리 형님은 워낙 공부를 잘해서 제주시에 있는 오현고등학교를 (입학했죠.) 우등생으로 나와서 공무원 시험도 보고 했는데. 합격자 발표를 일단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키, 신장이 1cm 모자라다는 이유를 붙여가 지고 불합격시켜버리니까. 우리 형님은 그 어려운데 밥을, 끼니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 시험 합격했는데 이렇게 되는구나 원통스럽고 해서 결국에는 화병이 들어서 1969년 7월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연좌제 때문이죠. 키가 1cm 모자라다는 이유로 공무원 생활을 못 한다 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갑니다."]

[오상호/4·3 희생자 유족 : "가정 형편이 어렵다보니까 고등학교 학비를 댈 형편이 못 돼서, 서귀포에 작은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사진관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워가지고 나중에 (직접)사진관, 예식장 하면서 우리 1남 3녀를 대학을 시켰습니다. 2022년도 10월에 제주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할 때 제가 참석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아들까지도 연좌제에 묶어서 숨을 못 쉬게 하는 그런 죄가 다, 74년 만에 풀려가지고 이제라도 무죄판결 난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목 놓아 울었죠. 아버지는 형무소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형사보상금에 해당돼서. 2023년 4월에 형사보상금 신청을 했는데 한 6개월이면 나온다는 것이 지금 1년이 훨씬 지나도 언제 나온다는 말도 없고. 내가 죽기 전에 보상금으로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영령들을 모시고, 절에라도 가서 모셔서 천도제라도 좀 한번 풀어드리고 싶은 심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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