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주의 친구였다”…전주 신흥고 5·27시위 [영상채록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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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이 시국 시위에 나서는 일, 쉽지 않습니다. 특히 1980년, 광주의 5·18 시위가 폭력에 진압당한 걸 본 다른 도시에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1980년 5월 27일은 5·18 마지막 항쟁지 전남도청이 무참히 진압된 날입니다. 새벽녘 시민들을 학살한 공수부대원들이 승리의 군가를 부르고 난 몇 시간 뒤 전북 전주 신흥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함성이 터져 나옵니다. '전두환 물러가라! 민주 수호! 독재 타도!' 모르긴 몰라도 신군부가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날, 전주 신흥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영상채록 5·18 취재팀은 44년 전 신흥고 시위를 주도했던 당시 3학년생 허천일 씨를 만났습니다.
■ 유서까지 쓰고 만든 유인물…"30%가 전남 학생 그래서 더 분노"
허천일. 1962년생. 1981년 전북 전주 신흥고 졸업. 전 은행지점장. 현재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그리고 44년 전인 1980년 전주 신흥고의 반독재 시위를 주도했던 3학년생. 그를 만났습니다
전주 신흥고는 기독교계 미션 스쿨로 1900년에 세워진 전북의 사학 명문입니다. 124년 전통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의 역사도 있어 동문들은 물론 지역 사회의 자랑입니다.
44년 전 기억을 생생히 되살리기 위해 인터뷰 장소는 신흥고 도서관으로 잡았습니다. 허 씨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그 날의 일들을 되짚었습니다.
당시 광주가 외부와 교통과 통신이 끊긴 채 철저히 고립돼 있었는데 어떻게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광주 소식을 전해 듣고 공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전남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는 점. 둘째, '종교 채널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광주는 고교 평준화가 되면서 비평준화로 남아 있었던 전북 전주 지역으로 학생 지원이 있었던 시절입니다. 허 씨의 대답입니다.
"교회나 교계 쪽으로 전북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인권 인사들이 있으셔서 천주교 정의사회구제단이나 전주 남문교회, 서문교회… 목사님들이 시국 비판을 많이 하고, 또 여러 정보가 많이 들어와 있어서 광주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난리 났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 학교 인적 구성이 30%가 전남 출신들입니다. 또 그래서 더 분노하게 됐던 거였죠." |
애초 시위는 전주의 여러 고교가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됐다고 합니다. 예정된 날짜는 1980년 5월 24일. 그러나 시위를 모의한 사실이 노출돼 다른 학교들은 사전 제압을 당했습니다.
신흥고는 그래도 시위에 나서기로 했지만 대학생들이 전달해주기로 한 연설문도 계엄군의 불심검문에 걸리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집회 유인물을 직접 쓴 사람이 허천일 씨입니다.
교회 고등부실에서 등사판으로 1,000부를 찍었습니다. 유서도 썼습니다.
■ "정의롭게 하라 가르쳤으면서 왜 올바른 일을 하려는데 막습니까?"
교문 앞에는 선생님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D-day는 5월 27일. 0교시가 끝나는 오전 8시를 시위 시작으로 맞췄지만 학교 방송으로 주동자들이 생물실로 불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설득이 이어졌고 학교 상공에는 군 헬리콥터가 떴습니다. 담임 교사들은 교실로 들어가 학생들을 자제시키는 상황이었습니다.
"3학년 1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 학생 중 1명이 선생님하고 토론을 벌이고 "올바르고 정의롭게 하라고 가르쳤으면서 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하는데 막습니까?" 그래가지고 선생님을 밀치고 나오게 되는 겁니다. 지휘부는 불려가서 안 나오고 모든 학생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나가자!" 해서 터져 나오니까 전부 기다리고 있다가 숨 죽이고 있다가 다 한꺼번에 나오고. 저희도 맡은 바대로 1, 2학년 교실로 가서 유리창 깨고 나가자고 후배들 다 이끌고 나와서 신흥 5.27이 시작됩니다." |
허천일 씨는 그 며칠 전의 얘기도 들려줬습니다.
"5월 24일인가. 문봉길 선생님께서 '오늘 자습입니다' 그러더니 5분인가 있다가 '여러분들 지금 광주에서는 자유와 민주, 독재반대를 위해서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의 서울대(진학) 만을 위해 가르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수시로 만나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 저희들은 우리 당위성이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용기백배 됐었죠." |
시위는 교문을 나가 전북도청까지 가두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계획됐지만 학교 밖은 무장한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광주에 이어 이웃한 전주에서도 폭력진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필사적으로 학생들을 막았습니다. 진출이 막히자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민주수호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돕니다. 미션 스쿨이었던 만큼 구국 통성 기도를 하고 강당으로 옮겨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계엄군 측은 학교에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유혈진압 하겠다고 통보했다고 합니다. 계엄 당국과 학교의 협상 끝에 학생들은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오후 2시 즈음 되어 이름과 학년을 알아볼 수 있는 교복과 모자와 배지 등을 바꿔 달고 섞여서 학교 밖으로 나와 해산합니다. 도피 자금을 거둬서 나눠 갖고 어디로 피신할지 미리 짠 뒤였습니다.
지휘부는 검거를 피해 전국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연결고리는 한국 고등학교 기독교 총연맹 조직이었습니다.
허천일 씨는 경기도 파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가족과 학교의 설득으로 한 명씩 자수를 하고, 허 씨도 약 한 달여 만에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배후에 선배들이 있지 않냐며, 이름을 대라며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시위를 주동했던 친구 대부분은 정학 등의 징계를 받았지만 이강희, 이우봉 두 친구는 이후에 다시 전주 시내 고등학교에 벽보를 붙이는 사건으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휴교령·대량 징계, 남겨진 트라우마…"우리는 광주의 친구였다"
시위 뒤 학교에는 1주일간 휴교령이 내려집니다. 학생 27명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다시 학업에 매진해 좋은 대학도 가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트라우마는 남았습니다.
"5월만 되면 웁니다. 악몽을 꿉니다. 벌벌 떱니다. 친구들한테 앉아서 술 먹고 맨날 그럽니다. 그러다가 5월이 지나면 또 괜찮습니다. 80년도부터 90년대까지 저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은 다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끝내 치유가 안 될 것 같습니다." |
피해 조명과 보상은 광주에만 집중됐습니다. 44년이 무심히 흘렀습니다. 당시 징계를 받은 27명 중 19명은 최근에서야 8차 광주 민주화 보상 학사 징계자로 보상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 당시의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40여 년 만에 광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감계무량했다고 합니다.
"5·27이 그야말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긴 역사 속에서 한 점을 찍고, 또 광주의 친구가 되고, 이런 의미가 상당히 있다고 보고 앞으로도 그런 배움의 목적에서 그런 식으로 가야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신흥고 교정 뒷편에는 '오이칠정'이라고 불리는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그 앞 조그만 비석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고립된 80년 광주의 벗이 되어준 청년 학도들의 뒤늦은 새김입니다.
'의롭고 높고 뜨거웠던 '5·27 신흥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81회 동기들 모두 마음을 모아 기념 문집을 발간하고 이곳 황학대 옛터에 오이칠정을 세우니,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한 온누리에 그날의 함성이 길이 울려 퍼질 것이다. 2012년 5월 27일 신흥고등학교 81회 동기 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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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광주의 친구였다”…전주 신흥고 5·27시위 [영상채록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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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5-19 07:02:20
■ 유서까지 쓰고 만든 유인물…"30%가 전남 학생 그래서 더 분노"
허천일. 1962년생. 1981년 전북 전주 신흥고 졸업. 전 은행지점장. 현재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그리고 44년 전인 1980년 전주 신흥고의 반독재 시위를 주도했던 3학년생. 그를 만났습니다
전주 신흥고는 기독교계 미션 스쿨로 1900년에 세워진 전북의 사학 명문입니다. 124년 전통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의 역사도 있어 동문들은 물론 지역 사회의 자랑입니다.
44년 전 기억을 생생히 되살리기 위해 인터뷰 장소는 신흥고 도서관으로 잡았습니다. 허 씨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그 날의 일들을 되짚었습니다.
당시 광주가 외부와 교통과 통신이 끊긴 채 철저히 고립돼 있었는데 어떻게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광주 소식을 전해 듣고 공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전남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는 점. 둘째, '종교 채널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광주는 고교 평준화가 되면서 비평준화로 남아 있었던 전북 전주 지역으로 학생 지원이 있었던 시절입니다. 허 씨의 대답입니다.
"교회나 교계 쪽으로 전북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인권 인사들이 있으셔서 천주교 정의사회구제단이나 전주 남문교회, 서문교회… 목사님들이 시국 비판을 많이 하고, 또 여러 정보가 많이 들어와 있어서 광주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난리 났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 학교 인적 구성이 30%가 전남 출신들입니다. 또 그래서 더 분노하게 됐던 거였죠." |
애초 시위는 전주의 여러 고교가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됐다고 합니다. 예정된 날짜는 1980년 5월 24일. 그러나 시위를 모의한 사실이 노출돼 다른 학교들은 사전 제압을 당했습니다.
신흥고는 그래도 시위에 나서기로 했지만 대학생들이 전달해주기로 한 연설문도 계엄군의 불심검문에 걸리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집회 유인물을 직접 쓴 사람이 허천일 씨입니다.
교회 고등부실에서 등사판으로 1,000부를 찍었습니다. 유서도 썼습니다.
■ "정의롭게 하라 가르쳤으면서 왜 올바른 일을 하려는데 막습니까?"
교문 앞에는 선생님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D-day는 5월 27일. 0교시가 끝나는 오전 8시를 시위 시작으로 맞췄지만 학교 방송으로 주동자들이 생물실로 불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설득이 이어졌고 학교 상공에는 군 헬리콥터가 떴습니다. 담임 교사들은 교실로 들어가 학생들을 자제시키는 상황이었습니다.
"3학년 1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 학생 중 1명이 선생님하고 토론을 벌이고 "올바르고 정의롭게 하라고 가르쳤으면서 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하는데 막습니까?" 그래가지고 선생님을 밀치고 나오게 되는 겁니다. 지휘부는 불려가서 안 나오고 모든 학생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나가자!" 해서 터져 나오니까 전부 기다리고 있다가 숨 죽이고 있다가 다 한꺼번에 나오고. 저희도 맡은 바대로 1, 2학년 교실로 가서 유리창 깨고 나가자고 후배들 다 이끌고 나와서 신흥 5.27이 시작됩니다." |
허천일 씨는 그 며칠 전의 얘기도 들려줬습니다.
"5월 24일인가. 문봉길 선생님께서 '오늘 자습입니다' 그러더니 5분인가 있다가 '여러분들 지금 광주에서는 자유와 민주, 독재반대를 위해서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의 서울대(진학) 만을 위해 가르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수시로 만나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 저희들은 우리 당위성이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용기백배 됐었죠." |
시위는 교문을 나가 전북도청까지 가두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계획됐지만 학교 밖은 무장한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광주에 이어 이웃한 전주에서도 폭력진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필사적으로 학생들을 막았습니다. 진출이 막히자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민주수호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돕니다. 미션 스쿨이었던 만큼 구국 통성 기도를 하고 강당으로 옮겨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계엄군 측은 학교에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유혈진압 하겠다고 통보했다고 합니다. 계엄 당국과 학교의 협상 끝에 학생들은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오후 2시 즈음 되어 이름과 학년을 알아볼 수 있는 교복과 모자와 배지 등을 바꿔 달고 섞여서 학교 밖으로 나와 해산합니다. 도피 자금을 거둬서 나눠 갖고 어디로 피신할지 미리 짠 뒤였습니다.
지휘부는 검거를 피해 전국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연결고리는 한국 고등학교 기독교 총연맹 조직이었습니다.
허천일 씨는 경기도 파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가족과 학교의 설득으로 한 명씩 자수를 하고, 허 씨도 약 한 달여 만에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배후에 선배들이 있지 않냐며, 이름을 대라며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시위를 주동했던 친구 대부분은 정학 등의 징계를 받았지만 이강희, 이우봉 두 친구는 이후에 다시 전주 시내 고등학교에 벽보를 붙이는 사건으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휴교령·대량 징계, 남겨진 트라우마…"우리는 광주의 친구였다"
시위 뒤 학교에는 1주일간 휴교령이 내려집니다. 학생 27명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다시 학업에 매진해 좋은 대학도 가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트라우마는 남았습니다.
"5월만 되면 웁니다. 악몽을 꿉니다. 벌벌 떱니다. 친구들한테 앉아서 술 먹고 맨날 그럽니다. 그러다가 5월이 지나면 또 괜찮습니다. 80년도부터 90년대까지 저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은 다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끝내 치유가 안 될 것 같습니다." |
피해 조명과 보상은 광주에만 집중됐습니다. 44년이 무심히 흘렀습니다. 당시 징계를 받은 27명 중 19명은 최근에서야 8차 광주 민주화 보상 학사 징계자로 보상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 당시의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40여 년 만에 광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감계무량했다고 합니다.
"5·27이 그야말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긴 역사 속에서 한 점을 찍고, 또 광주의 친구가 되고, 이런 의미가 상당히 있다고 보고 앞으로도 그런 배움의 목적에서 그런 식으로 가야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신흥고 교정 뒷편에는 '오이칠정'이라고 불리는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그 앞 조그만 비석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고립된 80년 광주의 벗이 되어준 청년 학도들의 뒤늦은 새김입니다.
'의롭고 높고 뜨거웠던 '5·27 신흥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81회 동기들 모두 마음을 모아 기념 문집을 발간하고 이곳 황학대 옛터에 오이칠정을 세우니,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한 온누리에 그날의 함성이 길이 울려 퍼질 것이다. 2012년 5월 27일 신흥고등학교 81회 동기 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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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호 기자 menbal@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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