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장례곡 튼 ‘오송 참사’ 재판장…“형법체계 무기력함 느껴”

입력 2024.05.3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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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15일, 30명의 사상자를 낸 충북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 참사’ 현장.지난해 7월 15일, 30명의 사상자를 낸 충북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 참사’ 현장.

오늘(31일) 오후 2시, 청주지방법원 223호 법정에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바흐(J.S.Bach)의 장례 칸타타 '소나티나'였습니다.

지난해 7월, 30명의 사상자를 낸 충북 청주시 '오송 궁평 2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한 피고인 2명의 선고 공판을 앞두고 재판을 맡은 청주지법 형사5단독 정우혁 부장판사가 직접 선곡한 곡이었습니다.

정 부장판사는 "선고 전에 지난해 7월 15일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피해자들을 위해 (음악을)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약 2분 40초가량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방청객으로 가득 찬 법정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어 선고 공판을 시작한 정 부장판사는 1시간 40분 가까이 피고인들의 죄를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현행법의 한계를 토로하면서 "법관으로서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7월 15일, 충북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직전 급하게 임시제방을 보수하는 공사 관계자들.지난해 7월 15일, 충북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직전 급하게 임시제방을 보수하는 공사 관계자들.

■ '오송 참사' 피고인 2명, 법정 최고형 선고됐지만…

이날 선고 공판이 진행된 피고인은 55살 전 모 씨와 66살 최 모 씨입니다.

지난해 7월 15일, 14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16명을 다치게 한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해 재판에 넘겨진 이들입니다.

당시 충북 청주 미호강 근처에서 도로 확장공사가 진행됐는데 전 씨는 시공사의 현장소장, 최 씨는 감리단장으로 공사 과정을 관리·감독했습니다.

이들은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기존의 미호강 자연제방을 무단으로 헐고, 장마철이 임박한 지난해 6월 말에야 법정 기준보다 낮게 부실한 임시제방을 쌓은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집중호우로 급격히 불어난 강물이 부실한 임시제방 위로 흘러 넘치면서, 400m 떨어진 지하차도가 침수되는 등 홍수 피해를 키웠다는 겁니다.

이들은 또 참사가 난 이후 마치 임시제방이 설계도면에 따라 정상적으로 축조된 것처럼 관련 서류 등을 위조하는 데 관여한 혐의도 받았습니다.

잘못을 대부분 인정한 감리단장 최 씨와 달리, 현장소장 전 씨는 책임이 없다는 취지로 혐의를 부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 부장판사는 여러 증거 등을 종합해 봤을 때, 이들의 혐의가 대부분 유죄로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전 씨에게 관련 법상 최고 형량인 징역 7년 6개월, 최 씨에게는 징역 6년을 선고했습니다.


■ "죄에 합당한 형 선고할 수 없어"… 법 개정 촉구한 재판장

정 부장판사는 이날 선고 공판을 진행하면서 이례적으로 형법 체계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피고인들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2년형이 적당하지만, 현행법상 선고 형량에 한계가 있다"고 토로한 겁니다.

전 씨와 최 씨에게는 업무상 과실치사상과 증거위조교사, 사문서 위조 등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하지만 형법 제37조와 제40조 등 여러 가지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에게는 가장 무거운 죄에 대한 형량으로 처벌한다는 규정에 따라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선고 형량이 정해졌습니다.

결국, 징역 7년 6개월과 징역 6년이 이들에게 내릴 수 있는 사실상의 '법정 최고형'이었던 겁니다.

정 부장판사는 이런 규정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이 사건과 같이 피고인의 업무상과실이 매우 중하고,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법관으로 하여금 이를 충분히 고려해 형을 정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오히려 다수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형법의 경합범 규정이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필요한 것인지 이 사건을 계기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전 씨에 대한 양형 이유를 언급하면서도 "피고인의 태도에 분노하고, 피해자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함께하면서도 죄에 합당한 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법관으로서는 법을 준수해야 하지만, 입법부나 국민들께서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고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달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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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31 19: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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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15일, 30명의 사상자를 낸 충북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 참사’ 현장.
오늘(31일) 오후 2시, 청주지방법원 223호 법정에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바흐(J.S.Bach)의 장례 칸타타 '소나티나'였습니다.

지난해 7월, 30명의 사상자를 낸 충북 청주시 '오송 궁평 2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한 피고인 2명의 선고 공판을 앞두고 재판을 맡은 청주지법 형사5단독 정우혁 부장판사가 직접 선곡한 곡이었습니다.

정 부장판사는 "선고 전에 지난해 7월 15일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피해자들을 위해 (음악을)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약 2분 40초가량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방청객으로 가득 찬 법정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어 선고 공판을 시작한 정 부장판사는 1시간 40분 가까이 피고인들의 죄를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현행법의 한계를 토로하면서 "법관으로서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7월 15일, 충북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직전 급하게 임시제방을 보수하는 공사 관계자들.
■ '오송 참사' 피고인 2명, 법정 최고형 선고됐지만…

이날 선고 공판이 진행된 피고인은 55살 전 모 씨와 66살 최 모 씨입니다.

지난해 7월 15일, 14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16명을 다치게 한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해 재판에 넘겨진 이들입니다.

당시 충북 청주 미호강 근처에서 도로 확장공사가 진행됐는데 전 씨는 시공사의 현장소장, 최 씨는 감리단장으로 공사 과정을 관리·감독했습니다.

이들은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기존의 미호강 자연제방을 무단으로 헐고, 장마철이 임박한 지난해 6월 말에야 법정 기준보다 낮게 부실한 임시제방을 쌓은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집중호우로 급격히 불어난 강물이 부실한 임시제방 위로 흘러 넘치면서, 400m 떨어진 지하차도가 침수되는 등 홍수 피해를 키웠다는 겁니다.

이들은 또 참사가 난 이후 마치 임시제방이 설계도면에 따라 정상적으로 축조된 것처럼 관련 서류 등을 위조하는 데 관여한 혐의도 받았습니다.

잘못을 대부분 인정한 감리단장 최 씨와 달리, 현장소장 전 씨는 책임이 없다는 취지로 혐의를 부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 부장판사는 여러 증거 등을 종합해 봤을 때, 이들의 혐의가 대부분 유죄로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전 씨에게 관련 법상 최고 형량인 징역 7년 6개월, 최 씨에게는 징역 6년을 선고했습니다.


■ "죄에 합당한 형 선고할 수 없어"… 법 개정 촉구한 재판장

정 부장판사는 이날 선고 공판을 진행하면서 이례적으로 형법 체계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피고인들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2년형이 적당하지만, 현행법상 선고 형량에 한계가 있다"고 토로한 겁니다.

전 씨와 최 씨에게는 업무상 과실치사상과 증거위조교사, 사문서 위조 등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하지만 형법 제37조와 제40조 등 여러 가지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에게는 가장 무거운 죄에 대한 형량으로 처벌한다는 규정에 따라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선고 형량이 정해졌습니다.

결국, 징역 7년 6개월과 징역 6년이 이들에게 내릴 수 있는 사실상의 '법정 최고형'이었던 겁니다.

정 부장판사는 이런 규정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이 사건과 같이 피고인의 업무상과실이 매우 중하고,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법관으로 하여금 이를 충분히 고려해 형을 정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오히려 다수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형법의 경합범 규정이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필요한 것인지 이 사건을 계기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전 씨에 대한 양형 이유를 언급하면서도 "피고인의 태도에 분노하고, 피해자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함께하면서도 죄에 합당한 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법관으로서는 법을 준수해야 하지만, 입법부나 국민들께서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고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달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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