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김대중] “막내아들이 본 김대중과 5·18” - 김홍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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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DJ탄생 100년「다시 만난 김대중」은 KBS 광주총국이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기획 연재물입니다. 월 1회 제작해 '뉴스7광주전남'과 '광주전남9시뉴스'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이번 디지털 기사에는 5.18 당시 상황을 들려주는 김 전 대통령의 막내아들 김홍걸 씨의 인터뷰 가운데 분량 때문에 방영되지 못한 부분을 담았습니다. 김홍걸 씨의 인터뷰 내용은 이탤릭체로 표시했습니다.
1979년 10·26 사태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지만 계엄군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은 해가 바뀌기 전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합니다. 신군부 출현의 서막이었습니다.
1980년 2월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인사 678명에 대한 사면·복권 조치가 내려집니다. 김대중은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인사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시작됐습니다.
김대중과 재야 인사들의 입당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전두환은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학생들의 시위는 무력 충돌까지 빚으며 전국으로 확대하지만 신군부 세력은 이를 방관합니다. 정국 혼란이 가중되길 기다려 정권을 빼앗으려는 계산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의도를 간파했던 김대중은 격화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공동으로 '시국 수습 6개항'을 발표하는 등 정국 수습에 나섭니다.
불안과 긴장 속에 맞이한 1980년 5월 17일,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 의해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김대중은 자택에 밀려든 40여 명의 군인에 의해 체포됩니다.
■ 토요일 늦은 밤 …들이닥친 군인들
2024년 5월 17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막내 아들로 21대 국회의원 김홍걸 씨를 만났습니다. 44년 전 그날 밤을 그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요. 그때가 토요일 밤이어서 항상 토요일 밤에 방송에서 영화 틀어주고 하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기억을 하는데 한 11시 반이 좀 지나서 12시 가까이 되는 그 상황에서 갑자기 문 앞에 누가 와서 사람이 나가서 문을 열어줬더니 총을 든 군인들이 여러 명 집안으로 뛰어들어 와가지고… 저하고 비서 하셨던 분들 이렇게 여러 명은 한 방에 가둬 놓고 못 나가게 하고, 전화기 부숴서 연락 못 하게 하고 이러면서 저희 아버님을 연행해 갔죠."
연행된 사람은 아버지 김대중 전 대통령만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인 김홍일, 김홍업 씨도 함께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때 저희 큰 형님은 바로 잡혀서 감옥으로 갔고, 작은 형님은 친구 집에 한 두어 달 숨어 있다가 뒤늦게 잡혀서 당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고…. 저만 유일하게 나이가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느라고 집을 드나들 수 있었고…. 외부에서 아무도 집에 못 들어오고 어머니도 아버지 면회 가실 때 빼고는 한 7-8개월 자택연금 돼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러니까 연행되신 후에 거의 3개월 가까이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살아는 계신지 무사하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 뒤늦게 마주한 5·18의 참상… 김대중, 죽음을 결심하다
김홍걸 씨 증언에 따르면 연행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바깥 세상의 일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5·18 당시에 정보기관 지하실 같은 곳에 갇혀 계셨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모르셨다가 두 달 이상 지난 후에서야 그쪽(신군부)에서 지나간 신문을 보여줘요. 근데 거기에 '170여 명 사망'하면서 김대중 내란 음모의 수괴, 이런 식으로 난 걸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고 기절까지 하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수사관이 신문 한 뭉치를 던져주었다. '광주 사태'를 보도한 신문들이었다. …(중략)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의 고딕체 제목들은 온통 '광주' 뿐이었다. 신문은 흡사 광주의 거대한 부고장 같았다. 기사는 하나같이 충격적이었다. 내 체포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궐기했다. 김대중 석방과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100명도 넘게 사망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고 신문의 활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
"신군부 측에서는 우리에게 협조를 한다면 살려줄 것이고 좋은 자리도 줄 수 있다. 회유를 했었는데 … 사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니까 사람이 마음이 흔들릴 수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그 신문을 보면 기가 꺾여가지고 말을 참 순순히 들을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고 그걸 보여준 것인데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광주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희생당했는데 내가 한목숨 살리기 위해서 야합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나도 목숨을 던지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조작된 혐의 …사형수가 된 김대중
(…) 나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혔다 창졸간에 잡혀 와 조사를 받으려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들은 내게 태어나서 최근까지 행적을 자세히 쓰라고 했다. 그러더니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했다며 그에 대해서 캐물었다. 50년 전의 자료까지 찾아와 들이대며 내란 음모와 관련 여부를 따졌다…(중략)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수모와 고통을 받았다. 그렇게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은 남산의 지하 감방에서 조작되었다. -「 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
"사형선고가 떨어질 무렵에 저희 가족들이 가서 면회를 했었는데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말씀들을 쫙하시고… "내가 죽더라도 절대 보복을 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런 말씀도 하시고,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죠. 저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 누구도 아버지께서 그 사람들하고 타협해서 좀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선되시기 훨씬 전부터. 감옥에 계실 때부터 그때 옥중 서신에도 나오는데 "복수는 다른 복수를 부르고 그럼 끊임없이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에 어디선가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관용과 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 그 철학이 확고하셨고 …. 사실 돌아가신 어른께서 맨 처음 죽을 고비를 넘기셨던 게 6.25 전쟁 때인데 그때 인민군에게 붙잡혀서 총살당할 뻔하다 간신히 살아남으셨거든요. 북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강경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그런데 오히려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을 멈출 수 있을까 연구하셔가지고 결국 햇볕정책이라는 게 나온 거 아닙니까. 그 분의 타고난 천성이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분이고 어떻게든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설득해서 그 사람과 화해를 하고 손을 잡을 수 있을까? 항상 연구하셨던 그런 정신과 철학을 갖고 계셨던 분이라고 해야죠."
■ 김대중을 살린 '1980년 광주'
1982년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적 여론에 부담을 느낀 신군부는 김대중의 미국 망명을 종용합니다. 같이 구속된 이들을 석방시켜주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억지 다짐을 받아내고 가족 요청에 따른 인도적 배려라고 포장했지만 정치 재개를 막고자 하는 꼼수였습니다.
고민 끝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두 번째 망명을 떠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그의 민주화 투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198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5·18의 본질에 대해 "우리 민족의 100년래의 원망 (願望)인 민중· 민족·민주, 이 세 민족적 열망을 집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021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1983년 망명 당시 연설에는 5 ·18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광주의 한을 푸는 것은 광주 사람들에게 총질한 사람에게 똑같이 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그 소망은 성취로서만 풀립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에 살고 싶다. 인간이 인간 대우를 받는 나라에 살고 싶다. 내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죄악된 나라를 후손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죽어간 광주의 한을 민주 회복을 통해서 풀어주는 것만이... - 1983년 미국 망명 당시 연설 |
"항상 하셨던 말씀이… "광주에서 희생당하신 그분들 덕분에 살 수가 있었다" 하시더라고요. 신군부에서 처음에는 강하게 진압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배후에 저희 아버지께서 계시다고 내란 음모로 엮어서 …즉, 한꺼번에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자기 집권의 정당성을 만들려고 했던 건데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는 바람에…계속해서 전두환 신군부에게는 광주가 족쇄가 됐고, 부담이 됐고 그렇기 때문에 저희 아버님도 함부로 그 사람들이 사형을 집행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아버님께서는 보셨던 거죠."
"71년도에 저희 아버님께서 대통령 선거에 나가셨다가 박정희 정권의 관권 ·금권 선거 때문에 패하셨는데 그때 처음으로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측에서 지역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선거 전략을 썼거든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같은 경상도 사람 박 대통령을 찍어줘야지 전라도 사람을 찍어주면 되겠느냐 이런 식의…. 그러면서 지역 감정이 점점 악화 됐고 그러면서 또 호남 차별이 심화됐고, 오랜 기간 독재가 이어지면서 '김대중이라는 존재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지역 화합을 이뤄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라는 생각을 하셨던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대중 석방을 외치는 그런 구호가 나왔던 것이고, 그랬던 분들이 희생당하셨기 때문에 저희 아버님께서는 두고두고 마음의 빚을 갖고 계셨던 거죠."
■ 김대중은 어떤 아버지였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감 생활 동안 아내와 아들들, 형제 조카들로부터 1,200여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단 하루도 빼지 않고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답장은 한 달에 딱 한 번, 그것도 봉함엽서만 허락됐습니다. 깨알만 한 글씨로 엽서 한 장에 14,000자를 써 보내기도 했습니다. 옥중에서 주고받은 편지는 이후 책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옥에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온갖 정성을 들여 편지를 썼다고 술회했습니다. 자서전에는 감옥에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아들들에게 전하기 위해 특히 노력했다는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김대중은 어떤 아버지였을까 궁금했습니다.
김홍걸 씨는 요즘과 달리 국회의원, 정치 지도자 이렇게 되면 항상 집에 정치적인 동지들, 기자들 이런 사람들이 왠종일 와서 거실에 있고 이랬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가족들하고의 시간을 보내실 수가 없었던 환경을 이야기했습니다.
"워낙 어렸을때부터 하시는 일들이 중요하고 또 신경 써줘야 될 분들도 많고 하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중요한 일 큰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거를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왜 우리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같이 놀아주지 않나, 서운하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고 또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거죠."
'혼나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항상 감옥에 계실 때조차도 좋은 책, 이걸 읽고 독후감을 써서 한번 보내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웠던 것이 1976년에 처음 감옥에 가셨는데 감옥에 들어가시기 전에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어요. 왜냐하면 일제 시대에 학교를 다니셨기 때문에 대학을 나오신 것도 아니고.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실 기회가 없었죠. 감옥에 가셔가지고 한 2년 지났는데 그때 이제 서울대학교 병원에 병실에 나와 계실 때 면회를 갔는데 영어 참고서를 놓고 제 영어 실력을 테스트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두 번째 감옥 갔다 나오셔서 미국으로 가셨는데 교도소 안에서 책은 열심히 보셨겠지만 영어를 듣고 말하고 이럴 기회는 참 전혀 없었는데…그때 출소하신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미국에서도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서 한국 쪽과 위성으로 연결해서 한국 쪽 정치인은 전두환 정권을 옹호하는 역할, 아버지께선 전두환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야당의 역할로서 방송에서 맞상대해서 그것도 생중계로 토론을 영어로 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까 미국서 10년, 20년 공부한 사람도 마이크 드리면 제대로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떻게 그걸 해내셨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아요."
■ 김대중의 정치역정에 5·18은 무엇이었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광주 5·18은 결국은 한국 민주화의 불씨를 살린 사건이었다.' 이렇게 보신 거죠. 부마 항쟁이 79년에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아버지께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우리가 민주화의 길로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희망을 가지셨는데… 10. 26이 나면서 어떻게 보면 생각했던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지 않았잖습니까. 광주가 우리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불씨를 살려내는 그런 역할을 한 거에 대해서 물론 희생되신 분들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드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움 자부심. '역시 내가 알던 광주가 맞았구나' 라는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44주년인 2024년,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한다면 어떤 메시지를 남길 것인지 물었습니다.
"우리 광주가 그동안에 정말 높은 정치의식으로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를 선도해 나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왔지 않습니까? 그 전통을 계속 이으면서 한 단계 발전시켜서 좀 더 수준 높은 민주주의. 증오와 적대감만 키우는 그런 정치가 아니고 화합을 하고, 그래서 생산적인 정치를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민주주의도 이끌어가는 그런 역할을 해주시길 바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광주 항쟁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열흘 동안 광주 시민들은 숭고한 일을 해냈다. 시민들은 무기를 손에 쥐고도 대화를 요구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시체를 눈앞에 두고서도 단 한사람에게도 보복을 하지 않았다. …(중략) 이런 민주 혁명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현대사의 비극이지만 분명 역사가 평가할 위대한 항쟁이었다. 불의에는 과감히 맞서되, 현실을 살폈던 광주시민들을 나는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한다. -「 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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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만난 김대중] “막내아들이 본 김대중과 5·18” - 김홍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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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6-07 13:57:01
- 수정2024-06-07 16:01:49
1979년 10·26 사태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지만 계엄군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은 해가 바뀌기 전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합니다. 신군부 출현의 서막이었습니다.
1980년 2월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인사 678명에 대한 사면·복권 조치가 내려집니다. 김대중은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인사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시작됐습니다.
김대중과 재야 인사들의 입당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전두환은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학생들의 시위는 무력 충돌까지 빚으며 전국으로 확대하지만 신군부 세력은 이를 방관합니다. 정국 혼란이 가중되길 기다려 정권을 빼앗으려는 계산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의도를 간파했던 김대중은 격화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공동으로 '시국 수습 6개항'을 발표하는 등 정국 수습에 나섭니다.
불안과 긴장 속에 맞이한 1980년 5월 17일,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 의해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김대중은 자택에 밀려든 40여 명의 군인에 의해 체포됩니다.
■ 토요일 늦은 밤 …들이닥친 군인들
2024년 5월 17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막내 아들로 21대 국회의원 김홍걸 씨를 만났습니다. 44년 전 그날 밤을 그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요. 그때가 토요일 밤이어서 항상 토요일 밤에 방송에서 영화 틀어주고 하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기억을 하는데 한 11시 반이 좀 지나서 12시 가까이 되는 그 상황에서 갑자기 문 앞에 누가 와서 사람이 나가서 문을 열어줬더니 총을 든 군인들이 여러 명 집안으로 뛰어들어 와가지고… 저하고 비서 하셨던 분들 이렇게 여러 명은 한 방에 가둬 놓고 못 나가게 하고, 전화기 부숴서 연락 못 하게 하고 이러면서 저희 아버님을 연행해 갔죠."
연행된 사람은 아버지 김대중 전 대통령만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인 김홍일, 김홍업 씨도 함께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때 저희 큰 형님은 바로 잡혀서 감옥으로 갔고, 작은 형님은 친구 집에 한 두어 달 숨어 있다가 뒤늦게 잡혀서 당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고…. 저만 유일하게 나이가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느라고 집을 드나들 수 있었고…. 외부에서 아무도 집에 못 들어오고 어머니도 아버지 면회 가실 때 빼고는 한 7-8개월 자택연금 돼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러니까 연행되신 후에 거의 3개월 가까이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살아는 계신지 무사하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 뒤늦게 마주한 5·18의 참상… 김대중, 죽음을 결심하다
김홍걸 씨 증언에 따르면 연행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바깥 세상의 일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5·18 당시에 정보기관 지하실 같은 곳에 갇혀 계셨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모르셨다가 두 달 이상 지난 후에서야 그쪽(신군부)에서 지나간 신문을 보여줘요. 근데 거기에 '170여 명 사망'하면서 김대중 내란 음모의 수괴, 이런 식으로 난 걸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고 기절까지 하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수사관이 신문 한 뭉치를 던져주었다. '광주 사태'를 보도한 신문들이었다. …(중략)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의 고딕체 제목들은 온통 '광주' 뿐이었다. 신문은 흡사 광주의 거대한 부고장 같았다. 기사는 하나같이 충격적이었다. 내 체포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궐기했다. 김대중 석방과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100명도 넘게 사망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고 신문의 활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
"신군부 측에서는 우리에게 협조를 한다면 살려줄 것이고 좋은 자리도 줄 수 있다. 회유를 했었는데 … 사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니까 사람이 마음이 흔들릴 수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그 신문을 보면 기가 꺾여가지고 말을 참 순순히 들을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고 그걸 보여준 것인데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광주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희생당했는데 내가 한목숨 살리기 위해서 야합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나도 목숨을 던지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조작된 혐의 …사형수가 된 김대중
(…) 나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혔다 창졸간에 잡혀 와 조사를 받으려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들은 내게 태어나서 최근까지 행적을 자세히 쓰라고 했다. 그러더니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했다며 그에 대해서 캐물었다. 50년 전의 자료까지 찾아와 들이대며 내란 음모와 관련 여부를 따졌다…(중략)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수모와 고통을 받았다. 그렇게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은 남산의 지하 감방에서 조작되었다. -「 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
"사형선고가 떨어질 무렵에 저희 가족들이 가서 면회를 했었는데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말씀들을 쫙하시고… "내가 죽더라도 절대 보복을 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런 말씀도 하시고,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죠. 저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 누구도 아버지께서 그 사람들하고 타협해서 좀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선되시기 훨씬 전부터. 감옥에 계실 때부터 그때 옥중 서신에도 나오는데 "복수는 다른 복수를 부르고 그럼 끊임없이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에 어디선가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관용과 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 그 철학이 확고하셨고 …. 사실 돌아가신 어른께서 맨 처음 죽을 고비를 넘기셨던 게 6.25 전쟁 때인데 그때 인민군에게 붙잡혀서 총살당할 뻔하다 간신히 살아남으셨거든요. 북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강경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그런데 오히려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을 멈출 수 있을까 연구하셔가지고 결국 햇볕정책이라는 게 나온 거 아닙니까. 그 분의 타고난 천성이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분이고 어떻게든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설득해서 그 사람과 화해를 하고 손을 잡을 수 있을까? 항상 연구하셨던 그런 정신과 철학을 갖고 계셨던 분이라고 해야죠."
■ 김대중을 살린 '1980년 광주'
1982년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적 여론에 부담을 느낀 신군부는 김대중의 미국 망명을 종용합니다. 같이 구속된 이들을 석방시켜주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억지 다짐을 받아내고 가족 요청에 따른 인도적 배려라고 포장했지만 정치 재개를 막고자 하는 꼼수였습니다.
고민 끝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두 번째 망명을 떠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그의 민주화 투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198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5·18의 본질에 대해 "우리 민족의 100년래의 원망 (願望)인 민중· 민족·민주, 이 세 민족적 열망을 집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021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1983년 망명 당시 연설에는 5 ·18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광주의 한을 푸는 것은 광주 사람들에게 총질한 사람에게 똑같이 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그 소망은 성취로서만 풀립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에 살고 싶다. 인간이 인간 대우를 받는 나라에 살고 싶다. 내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죄악된 나라를 후손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죽어간 광주의 한을 민주 회복을 통해서 풀어주는 것만이... - 1983년 미국 망명 당시 연설 |
"항상 하셨던 말씀이… "광주에서 희생당하신 그분들 덕분에 살 수가 있었다" 하시더라고요. 신군부에서 처음에는 강하게 진압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배후에 저희 아버지께서 계시다고 내란 음모로 엮어서 …즉, 한꺼번에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자기 집권의 정당성을 만들려고 했던 건데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는 바람에…계속해서 전두환 신군부에게는 광주가 족쇄가 됐고, 부담이 됐고 그렇기 때문에 저희 아버님도 함부로 그 사람들이 사형을 집행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아버님께서는 보셨던 거죠."
"71년도에 저희 아버님께서 대통령 선거에 나가셨다가 박정희 정권의 관권 ·금권 선거 때문에 패하셨는데 그때 처음으로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측에서 지역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선거 전략을 썼거든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같은 경상도 사람 박 대통령을 찍어줘야지 전라도 사람을 찍어주면 되겠느냐 이런 식의…. 그러면서 지역 감정이 점점 악화 됐고 그러면서 또 호남 차별이 심화됐고, 오랜 기간 독재가 이어지면서 '김대중이라는 존재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지역 화합을 이뤄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라는 생각을 하셨던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대중 석방을 외치는 그런 구호가 나왔던 것이고, 그랬던 분들이 희생당하셨기 때문에 저희 아버님께서는 두고두고 마음의 빚을 갖고 계셨던 거죠."
■ 김대중은 어떤 아버지였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감 생활 동안 아내와 아들들, 형제 조카들로부터 1,200여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단 하루도 빼지 않고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답장은 한 달에 딱 한 번, 그것도 봉함엽서만 허락됐습니다. 깨알만 한 글씨로 엽서 한 장에 14,000자를 써 보내기도 했습니다. 옥중에서 주고받은 편지는 이후 책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옥에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온갖 정성을 들여 편지를 썼다고 술회했습니다. 자서전에는 감옥에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아들들에게 전하기 위해 특히 노력했다는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김대중은 어떤 아버지였을까 궁금했습니다.
김홍걸 씨는 요즘과 달리 국회의원, 정치 지도자 이렇게 되면 항상 집에 정치적인 동지들, 기자들 이런 사람들이 왠종일 와서 거실에 있고 이랬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가족들하고의 시간을 보내실 수가 없었던 환경을 이야기했습니다.
"워낙 어렸을때부터 하시는 일들이 중요하고 또 신경 써줘야 될 분들도 많고 하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중요한 일 큰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거를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왜 우리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같이 놀아주지 않나, 서운하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고 또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거죠."
'혼나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항상 감옥에 계실 때조차도 좋은 책, 이걸 읽고 독후감을 써서 한번 보내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웠던 것이 1976년에 처음 감옥에 가셨는데 감옥에 들어가시기 전에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어요. 왜냐하면 일제 시대에 학교를 다니셨기 때문에 대학을 나오신 것도 아니고.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실 기회가 없었죠. 감옥에 가셔가지고 한 2년 지났는데 그때 이제 서울대학교 병원에 병실에 나와 계실 때 면회를 갔는데 영어 참고서를 놓고 제 영어 실력을 테스트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두 번째 감옥 갔다 나오셔서 미국으로 가셨는데 교도소 안에서 책은 열심히 보셨겠지만 영어를 듣고 말하고 이럴 기회는 참 전혀 없었는데…그때 출소하신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미국에서도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서 한국 쪽과 위성으로 연결해서 한국 쪽 정치인은 전두환 정권을 옹호하는 역할, 아버지께선 전두환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야당의 역할로서 방송에서 맞상대해서 그것도 생중계로 토론을 영어로 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까 미국서 10년, 20년 공부한 사람도 마이크 드리면 제대로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떻게 그걸 해내셨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아요."
■ 김대중의 정치역정에 5·18은 무엇이었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광주 5·18은 결국은 한국 민주화의 불씨를 살린 사건이었다.' 이렇게 보신 거죠. 부마 항쟁이 79년에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아버지께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우리가 민주화의 길로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희망을 가지셨는데… 10. 26이 나면서 어떻게 보면 생각했던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지 않았잖습니까. 광주가 우리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불씨를 살려내는 그런 역할을 한 거에 대해서 물론 희생되신 분들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드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움 자부심. '역시 내가 알던 광주가 맞았구나' 라는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44주년인 2024년,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한다면 어떤 메시지를 남길 것인지 물었습니다.
"우리 광주가 그동안에 정말 높은 정치의식으로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를 선도해 나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왔지 않습니까? 그 전통을 계속 이으면서 한 단계 발전시켜서 좀 더 수준 높은 민주주의. 증오와 적대감만 키우는 그런 정치가 아니고 화합을 하고, 그래서 생산적인 정치를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민주주의도 이끌어가는 그런 역할을 해주시길 바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광주 항쟁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열흘 동안 광주 시민들은 숭고한 일을 해냈다. 시민들은 무기를 손에 쥐고도 대화를 요구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시체를 눈앞에 두고서도 단 한사람에게도 보복을 하지 않았다. …(중략) 이런 민주 혁명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현대사의 비극이지만 분명 역사가 평가할 위대한 항쟁이었다. 불의에는 과감히 맞서되, 현실을 살폈던 광주시민들을 나는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한다. -「 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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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선 기자 b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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